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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린 파파야의 향기(메콩 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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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위에 집을 짓고, 강에서 먹을 것을 구하고, 강으로 모든 것을 떠나보내는 수상족 사람들.
▲ 아름다운 사람들(메콩 강) 강 위에 집을 짓고, 강에서 먹을 것을 구하고, 강으로 모든 것을 떠나보내는 수상족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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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표를 안 판다는 거죠?"
"드라이버(driver)!"

매표원이 창구 밖으로 얼굴을 내밀며 운전사 쪽을 가리켰다.

"아니, 운전사가 8만동(5.5달러) 달라잖아요. 여기 요금표에는 분명 '달랏'까지 4만동이라 적혀 있는데!"
"노 잉글리쉬! 드라이버!"

찬바람이 쌩~. 그녀는 매정하게 잘라버렸다.

"도대체 매표소에서 표를 살 수 없다니!"
"기가 막혀!"

아내와 나는 투덜거리며 운전사에게로 갔다.

"매표소에 4만동이라 적혀 있는데 왜 8만동이죠?"
"이 버스가 막차거든. 나 출발해야 하니까 갈 거면 타고 싫으면 저기 호텔로 가라고."

'왜 이렇게 딱딱한 거야!' 결국 흥정 끝에 6만동을 내고 버스에 올랐다. 요금표에 떡하니 적어두고선 가격의 두 배를 요구하다니! 너무했다. 그런데도 아내와 난 기분이 상하기는커녕 버스 위로 튀어오를 것처럼 즐거웠다.

그건, 이 나라의 별난 상황 때문이었다.

베트남에는 외국인요금이 있다. 입장료는 물론이고 교통비까지도 2배에서 5배의 비싼 요금을 지불해야 했다. 그 틈을 비집고 등장한 것이 외국인 전용 '투어리스트 버스'다. 일부 여행사들이 외국인요금을 무는 것에 비해, 더 싼 가격에 더 질 좋은 버스를 내놓은 것이다.

하노이는 시클로를 대신해 오토바이가 장악했고 그들이 뿜어내는 매연과 소음이 거리를 뒤흔들고 있었다.
▲ 시클로와 오토바이(하노이) 하노이는 시클로를 대신해 오토바이가 장악했고 그들이 뿜어내는 매연과 소음이 거리를 뒤흔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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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어리스트 버스를 타는 순간 여행자는 무거운 배낭을 메고 터미널까지 나갈 필요도, 굳이 호텔을 찾아 헤맬 필요도 없어진다. 버스는 '도어 투 도어'. 즉, 호텔 문 앞에서 호텔 문 앞까지 데려다 준다. 게다가 내려주는 호텔도 싸고 무난한 편이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이런 '안락한' 조건을 마다하고 '로컬버스'를 타는 '바보'는 흔치 않았다.

그리하여 여행자들은 같은 버스를 타고, 같은 호텔에서 자고, 같은 도시를 돌아다니는 일이 벌어지곤 했다. 베트남 땅 위에 보이지 않는 '선'이 생겨난 것이다.

하노이에서 나짱까지 우리는 '선' 안에서 편안히 여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허전했다. '선' 안에서 만나게 되는 현지인은 여행자에게 닳고 닳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보여주는 베트남과 그들이 웃고 돌아선 자리에는 왠지 씁쓸함이 남곤 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베트남 사람들은 외국인은 곧 '돈'이라고만 바라보는 것 같았다. 제2의 중국, 세계자본의 최고 재테크시장으로 떠오르고 있는 베트남은 변화하고 있었다. 기회와 경쟁, 돈과 속도, 자본주의의 물결이 거세게 몰아닥치고 있었다. 내가 상상해오던 시클로의 베트남이 아니었다. 이미 도시는 시클로를 대신해 오토바이가 장악했고 그들이 뿜어내는 매연과 소음이 거리를 뒤흔들고 있었다.

사실 아내와 난 진작부터 '선'을 넘기로 결심했다. 여행사가 만들어 놓은 '베트남 루트'를 탈출하고 싶었다. 하지만 '바보'가 되는 일이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하노이에서는 투어리스트버스도 한 번쯤 타보자고, 훼에서는 비오는 날 오토바이를 타고 돌아다녀 감기가 들어서, 호이안에선 우기(!)에 비가 온다는, 말도 안 되는 핑계로 차일피일 미루어왔다. 비용과 질의 차이가 워낙 컸기 때문이었다.

'싱글벙글' 마침내 바보가 된 아내와 나는 날아갈 것만 같았다. 로컬버스(15인승 이스타나)는 해안도시 나짱을 떠나 산길을 내달렸다. 창 밖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언덕을 넘자 붉은 논과 밭이 넓게 펼쳐졌다. 여기저기 베트남 고깔모자(?)를 쓴 농부들이 한 마리 '학'처럼 점점이 박혀 있었다. 더없이 평화로웠다.

누런 들판에서 일하는 농부는 한 마리 학처럼 아름답다.
▲ 베트남의 농부(하롱베이) 누런 들판에서 일하는 농부는 한 마리 학처럼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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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작(하롱베이)
 타작(하롱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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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작은 마을을 지날 때였다. 흰색 아오자이를 입은 여인이 손을 흔들며 서 있었다. 운전사가 차를 세우고 내렸다. 언제 준비했는지 그녀에게 꽃다발을 건넸다. 애인인 모양이었다. 쑥스러워 얼굴이 빨개진 여인이 참 예뻐 보였다. 운전사가 다시 시동을 걸자 승객들이 너도나도 한 마디씩 쏟아냈다. 내가 아내에게 물었다.

"다들 뭐라는 거야?"
"애인이 예쁘다거나 젊음이 부럽다거나 뭐 그런 얘기 아니겠어?"
"그러게, 세상 어디를 가도 사랑에 빠진 연인만큼 아름다운 건 없나봐."

꽃다발과 여인 덕분에 차 안이 따뜻해졌다. 사람들은 서로 인사를 나누는 것 같았다. 그때였다.

"어느 나라에서 왔어요?"

깜짝 놀랄 만큼 유창한 영어가 날아들었다. 40대 초반의 여성 '응구엔 티 호아'는 달랏에 있는 연구소의 생물학자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녀가 물었다.

"투어리스트버스가 따로 있을 텐데 왜 이 버스를 탔어요?"
"아, 그냥, 음… 뭐랄까 리얼 베트남을 만나고 싶었어요."

"리얼 베트남…, 맞아요. 베트남은 변화하고 있죠. 하지만 그것마저도 베트남이 아닐까요?"
"아…, 그렇군요."

그녀는 이것저것 설명했다. 달랏은 프랑스가 점령했을 때 휴양지로 개발한 곳인데, 미국과의 전쟁이 끝난 후에 북베트남 사람들이 많이 내려와 산다고 했다. 베트남 사람들에겐 유명한 신혼여행지라고도 일러줬다.

고산 마을, 교실이 하나 뿐인 초등학교에서.
▲ 베트남의 아이들(달랏) 고산 마을, 교실이 하나 뿐인 초등학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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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람들의 평균 수입이 얼마나 되냐고 물었다. 앞자리의 사람들에게 알아보더니 노동자의 경우 보통 80만동(55달러) 정도라 했다. 80만동이라니! 이 버스비가 4만 동인데! 놀라는 우릴 보고 그녀는 웃기만 했다. 그런 후에 내가 어리석은 질문을 하고 말았다.

"한국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음… 한국과 베트남의 역사는 비슷하잖아요. 한국도 전쟁을 경험했고 아직도 분단되어 있잖아요. 그래도 베트남은 통일되었죠. 지금은 다 지나간 일이에요. 한국이 미국 전쟁에 따라 왔지만, 아마 오고 싶어 온 건 아닐 거예요. 그때 한국은 가난했잖아요."

그랬다. 그때 한국은 베트남보다 가난했다. 그렇다고 영혼을 팔아 배를 불리는 짓이 용서될 수 있을까? 그리고 그녀의 멘트(!)처럼 과연 다 지나간 일일까? 겨우 30여 년 전의 일인데. 그것도 그때 부모형제를 잃고 포탄과 지뢰에 팔다리가 잘려나간 사람들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데 말이다.

사실 난 이들 앞에 죄인일지도 몰랐다. 베트남전쟁 특수가 70년대 가파른 한국경제의 성장 동력이었다면, 내가 먹고 자란 밥에도 틀림없이 베트남 사람들의 피와 눈물이 배어 있었을 테니까.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내게 그녀가 조심스레 한 마디 덧붙였다.

"이번에는 한국이 이라크전쟁에 참전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이미 대한민국 국회는 '국익'이라는 명분으로 이라크파병을 결정해 놓은 상태였다. 남의 나라 국민의 목숨을 팔아서 밥을 먹겠다는 발상. 베트남전쟁 후 30여년, 과연 대한민국은 무엇을 반성하고 무엇을 배웠을까.  

포탄의 파편으로 쌓은 탑과 아이.
▲ 전쟁의 흔적(구찌 터널) 포탄의 파편으로 쌓은 탑과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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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가 멈췄다. 주유소에는 간이매점이 있었다. 목이 탔다. 음료수라도 한 병 살까 해서 일어서려는데 그녀가 기다리라고 했다. 그녀가 돌아왔을 땐 손에 콜라가 쥐어져 있었다.

"베트남에는 어디든 외국인요금이 있어요!"

그녀가 웃으면서 주소와 이메일을 적어주며 말했다.

"우리 이다음에 만날 땐 베트남이 아닌 곳에서 만나요!"

그녀의 말처럼 달랏에서 우린 그녀를 다시 만나지 못했다. 사진 한 장 남기질 못했다. 하지만 그녀가 건넨 콜라 한 병이 가슴 속에 들어와 앉았다. 그녀는 베트남에서 처음으로 '돈'이 아니라 '사람'으로 우릴 대해준 이였다. '노란선'을 처음 벗어난 그 날, 아내와 나는 한 뼘은 더 자유로워져 있었다.

덧붙이는 글 | 블로그(http://blog.naver.com/wetravelin)가 생겼습니다. 세계여행 첫걸음부터 여행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양학용 & 김향미 부부는 결혼 10년째이던 해에 길을 떠나 2년 8개월 동안(2003년 10월 16일~2006년 6월 4일) 아시아·유럽·북미·중남미·아프리카·중동·러시아 등 세계 47개국을 여행했습니다.



태그:#베트남, #달랏, #하노이, #시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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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섬 제주에서 살고 있다. 나이 마흔이 넘어 초등교사가 되었고, 가끔 여행학교를 운영하고, 자주 먼 곳으로 길을 떠난다. 아내와 함께 한 967일 동안의 여행 이야기를 묶어 낸 <길은 사람 사이로 흐른다> 이후, <시속 4킬로미터의 행복>, <아이들, 길을 떠나 날다>, <여행자의 유혹>(공저), <라오스가 좋아>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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