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무안군, 목포시, 함평군 보도연맹원들이 수장된 무안군(현재의 신안군) 비금면 앞 바다
 무안군, 목포시, 함평군 보도연맹원들이 수장된 무안군(현재의 신안군) 비금면 앞 바다
ⓒ 카카오맵

관련사진보기

 
양대성과 마을 조무래기들은 철봉에서 열다섯 바퀴째 돌고 있는 재화형을 마냥 신기해하며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하나부터 세기 시작한 아이들이 이구동성으로 "스물"을 세자 표재화는 철봉 위에서 몸을 휘리릭 돌아 땅에 착지했다. 그 순간 조무래기들의 '와'하는 함성과 박수 소리로 와우마을 사장이 떠나가는 듯했다.

목포상고에 재학 중인 표재화(1931년생)가 방학을 맞아 전남 무안군(현재의 신안군) 자은면 백산리 와우마을을 찾아 마을 놀이터이다시피 한 사장에서 동네 아이들에게 철봉 시범을 보인 것이다. 그는 아이들이 벌린 입을 채 다물기도 전에 이번에는 역기 시범을 보였다. 그의 울뚝불뚝한 근육을 바라보는 아이들의 눈망울에서는 선망의 눈빛이 역력했다.

이어 두 패로 나뉜 마을 아이들이 축구공을 따라 땀방울을 한 양동이쯤 흘렸을 때 표재화는 아이들을 팽나무 아래로 모이게 했다. 단군왕검 설화부터 시작된 이야기는 일제강점기의 자은도 소작쟁의 이야기와 독립운동 이야기로 이어졌다.

"이제 해방이 됐응께 니들도 공부 열심히 해서 이 나라의 기둥이 되어야 한다" '나같은 시골 놈 주제에 나라의 기둥이 될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은 잠시, 재화형의 신념에 찬 눈동자를 본 양대성(1939년생)은 굳은 결심을 했다. '그래. 나도 재화형처럼 공부 열심히 해야지' 양대성에게 표재화는 말 그대로 롤모델 이었다.

신혼살림 풀어보지도 못하고...
 
무안군 자은면 국민보도연맹원들이 구금되었던 남진창고 터
 무안군 자은면 국민보도연맹원들이 구금되었던 남진창고 터
ⓒ 박만순

관련사진보기

 
해방 후 목포상고에 재학중이던 표재화는 만능스포츠맨이자 수재였다. 당시 5년제였던 목포상고를 졸업하고 교원양성소에 다녔다. 1950년 초여름 교원양성소 재학 중에 무안군 도초면 출신의 이금자와 식을 올렸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 했던가! 표재화 부부가 혼인신고도 하기 전에 전쟁이 터졌다는 소식이 목포에 전해졌다.

신혼살림을 풀어보지도 못한 표재화 부부는 자은면 와우리로 피난길에 올랐다. 반갑게 맞이해 줄 집안 어른들의 따듯한 품과 팽나무 아래의 시원한 바람을 기대하며 오랜 시간의 배벌미를 참아냈다.

하지만 그가 집에 도착해 아버지 표복암에게 큰절을 올렸을 때 "표재화씨 잠깐 서에 갑시다"라고 들이닥친 불청객이 있었다. 자은지서에서 온 경찰들이었다. '무슨 일이냐?'라고 묻기도 전에 표재화는 경찰의 거센 손길에 등이 떠밀렸다.

'삐꺽'하는 소리와 함께 남진창고 문이 열렸다. 자은지서 옆에 있던 남진창고는 6.25 직후 자은면 내 국민보도연맹원들을 예비검속해 구금하는 장소로 이용됐다.

표재화가 남친창고에 구금되었을 때 그의 아내 이금자와 둘째 형수 문유금이 며칠 밥을 해 날랐지만 이내 헛걸음을 했다. 창고가 텅 비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남진창고에 구금되어 있던 자은면 보도연맹원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자은면 보도연맹원과 무안군 소재 각 지서 유치장과 창고에 구금되어 있던 보도연맹원들은 각 섬에서 배에 몸을 싣고 목포로 향했다. 목포경찰서를 경유한 이들은 목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목포형무소에 일시 구금된 보도연맹원들은 1950년 7월 13일부터 23일까지 전라남도 경찰국 경비선 '금강호'에 실려 목포항을 떠나 신안군 비금면 앞바다로 끌려 나간 뒤 바다에 수장되었다.(진실화해위원회, <전남 국민보도연맹사건 2>, 2009년)

커다란 돌을 가슴에 메달은 이들이 비금도 앞바다에서 '풍덩'하는 소리와 함께 물고기 밥이 되었다. 바다귀신이 된 이들은 비단 신안군 보도연맹원들 뿐만이 아니었다. 당시 목포형무소 관할이었던 전남 목포시,  무안군, 함평군 보도연맹원들이 모두 비금도 앞바다에서 물고기 밥이 된 것이다.

귀신처럼 나타난 아들
 
광주형무소 재소자가 학살된 볼갱이고개 터
 광주형무소 재소자가 학살된 볼갱이고개 터
ⓒ 박만순

관련사진보기

 
"아이고 이게 귀신여, 사람이여!" 어머니는 아들 석기호(가명)를 붙들고 곡을 했다. 아들이 살아서 집으로 돌아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터였다.

누더기옷을 입은 채 정신이 절반쯤 나간 듯한 석기호는 '보도연맹원들이 비금도에서 모두 죽었다더라'는 소문을 비웃듯이 자기 집으로 되돌아왔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6.25가 터지자마자 전남 무안군 암태면 기동리 석기호는 바닷가에 있던 암태지서에 연행되었다. 곧이어 목포경찰서를 경유해 목포형무소에 구금되었다.

서기호의 아버지가 아들의 구명운동을 위해 급전을 마련해 부랴부랴 목포형무소로 갔지만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형무소 간수와 목포경찰서 경찰들이 모두 후퇴한 상태였다. 형무소 경비를 서고 있던 대한청년단원에게 물었더니, "모두 배에 싣고 가버렸소. 모두 죽었다대요"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석기호를 포함한 몇몇 보도연맹원들은 그 시간 유달산에 있었다. 경찰들이 목포형무소 감방문을 열고 보도연맹원들을 금강호에 실을 때, 그들이 어떤 이유에서인지 마지막 감방에 갇혀 있던 이들을 처리(?)하지 못한 것이다.

시간이 없어 후퇴하기에 급급해서인지, 무슨 착오로 인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석기호가 갇혀 있던 감방문을 열지도 못한 채로 경찰은 후퇴 차량에 몸을 실었다. 그 감방에 있던 이들은 한참 후에 감방문을 부수었다. 이들은 염라대왕이 붙잡을 것 같아 부리나케 유달산 쪽으로 뜀박질을 했다. 아무리 여름이라지만 산에서 며칠간 노숙을 하는 것은 고역이었다.

세수는 고사하고 먹을 것이 일체 없었기 때문이다. 먹을 것을 찾기 위해 산속을 헤맸지만 특별한 것이 없었다. 그러는 사이 옷은 누더기가 되었고, 얼굴과 손, 팔은 나뭇가지와 가시로 인해 생채기를 입었다. 며칠이 지나도 경찰이 자신들을 찾는 움직임이 없자 각자의 고향으로 발걸음을 한 것이다.

친일경찰 물러가라

"친일경찰 물러가라!" "토지개혁 실시하라" 자은지서 앞에 모인 군중들은 23년 전 벌어진 소작쟁의 당시의 기분이 되살아났다. 자은면에서는 일제강점기 조선농민운동사에 영원히 기록될 암태도 소작쟁의가 일어난 지 두 해 만인 1925년에 소작쟁의를 벌였다.

자은면 농민들은 일본제국주의로부터 해방되면 농민들이 살맛 나는 세상이 열릴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그렇게 고대한 토지개혁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미군정은 친일관료와 친일경찰을 재등용했다. 더군다나 1948년 5월 10일에는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치른다고 공포했다.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두 달여 앞둔 1948년 3월 1일 자은지서 앞에는 수백 명의 주민이 운집했다. 자은면 대부분의 마을에서 청·장년들이 참석한 이날의 시위에 백산리에서는 박종남과 차덕근 등 5~6명이 참여했다.

이날의 3.1기념 시위는 결의문 낭독으로 분위기가 최고조에 달했다. 그런데 잠시 후 '탕'하는 소리가 났다. 백산리 표재혁이 쓰러졌고 허벅지에서 붉은 피가 쿨럭쿨럭하며 쏟아졌다. 경찰이 맨몸뚱이의 농민들을 향해 발포를 한 것이다. 표재혁은 며칠 후 집에서 숨을 거두었다. 해방 후 무안군 자은면에서의 최초의 민간인 희생 사건이었다.

이날 시위를 주도한 박종남은 경찰의 검거를 피해 영암군 월출산으로 피신했다. 시커먼 얼굴에 터벅머리를 한 박종남은 한국전쟁 전 경찰에 검거되어 광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광주형무소 재소자들은 1950년 7월 초부터 인민군이 광주에 진입하기 하루 전인 7월 23일까지 광주 불갱이고개를 포함한 다수의 장소에서 20연대 헌병대 5중대 소속 군인에게 집단학살되었다.

자은면 3.1기념 시위 주도자인 박종남도 한국전쟁 발발 직후 광주시 일대에서 대한민국 군인에 의해 불법적인 죽임을 당했다. 박종남처럼 1948년 3.1기념 시위에 참여한 자은면, 임자면, 지도면 청·장년들은 이후에 빨갱이로 규정되어 온갖 불이익을 받아야 했다.

무안군 지도면은 경우 1948년 3월 6일 3백여 명의 군중이 지서를 습격했는데, 참석자들의 이후 행적은 구체적으로 확인되지 않지만 자은면의 박종남처럼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죽임을 당하거나 인공 때의 부역혐의로 UN군 수복 후에 군경과 우익에 의해 죽임을 당한 이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무소불위의 서북청년회
 
1948년 자은면 3.1시위를 증언하는 윤봉희
 1948년 자은면 3.1시위를 증언하는 윤봉희
ⓒ 박만순

관련사진보기

 
해방 후 전국에서는 좌·우 갈등이 격심했는데, 신안군에서는 1948년 3.1기념 시위가 좌·우 갈등을 촉발시킨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한국전쟁 전 좌·우의 합리적 토론이나 경쟁이 불가능했던 데에는 몇 가지 결정적 요인이 있었다.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이 된 후 자신의 정적을 무조건 '빨갱이'로 몰아 사회로부터 배제 시킨 것이 그 시발점이었다. 즉 1948년 12월 국가보안법의 제정이 그것이다.

국가보안법의 적용을 통한 좌익과 그 동조자의 사회적 배제는 전국의 형무소가 만원이 되는 상황을 초래했다. 이러한 채찍 정책만으로는 국가를 통치할 수 없다는 상황인식에 따라 정부는 1949년 4월 국민보도연맹을 창립했다. 즉 좌익 전력자들을 전향시켜 대한민국에 충성을 서약하는 반공 집단을 육성하겠다는 것이다.

국가 차원에서 당근과 채찍 정책을 동시에 추구했다면 민간에서는 선택의 폭이 넓지 않았다. 좌익단체는 1946년을 기점으로 대부분 불법화되었으며, 좌·우익의 대결에서 경찰의 비호를 받은 우익의 일방적인 우세가 대세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북청년회(이하 서청)는 테러와 학살이라는 기름을 끼얹었다.

1948년 임자면에 입도한 서청은 테러활동을 진행했다. 1948년 음력 3월 말경 임자면 이흑암리 주민 김엽이가 마을에 들어온 서북청년회원에게 구타당하였다가 얼마 뒤인 단오날(양력 6월 11일)에 사망하였다. 김엽이의 아들인 신〇〇(당시 15세)의 증언이다.

"아랫집에 살았던 유택준이 좌익활동을 하였다고 서북청년단(정식 명칭은 '서북청년회'임) 2명이 잡으러 왔었습니다. 그런데 유택준의 여동생이 저의 집에 유택준이 있다고 잘못 이야기하여 서북청년단이 우리 집에 와서 '유택준이 있는 곳을 말하라'고 하면서 벚나무 몽둥이로 저를 때렸습니다. 이를 보고 어머니가 집으로 달려와 '왜 내 아들을 때리느냐'고 하자 서북청년단은 어머니를 마을 공동 우물가로 데려가 구타하였고 어머니는 바로 쓰러지셨습니다. 저희들이 어머니를 집으로 모셔왔는데 시름시름 앓으시다가 그해 단오날에 사망하셨습니다."(진실화해위원회, <신안·광주지역 민간인 희생사건>, 2010)

서청은 임자면 이흑암리에 좌익활동가가 있다는 정보를 접하고 마을에 들어와 테러를 가하여 김엽이를 사망에 이르케 한 것이다. 그날의 테러로 죽임을 당한 이는 김엽이 한 명에 불과했지만, 골병이 든 이는 여럿이었다.

서청이 마을 공동 우물가에서 구타를 한 것은 김엽이 뿐만이 아니라 마을주민 다수였기 때문이다. 전남 무안군 임자면에서 서청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집단이었다. 이들에 대한 적절한 통제는 경찰도 행정기관인 무안군청이나 임자면사무소의 그 누구도 할 수 없었다. 신안군에서의 '작은 전쟁'은 한국전쟁 전인 1948년부터 이미 싹터 오른 것이다.    

태그:#자은도, #비금도, #31시위, #서북청년회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