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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영이 어서 오게!" 앞서가던 박봉우는 뒤따라오는 이건영을 잠시 기다리다가 지게를 내려놨다. 참새골은 이들이 사는 내암리에서 1.8km에 불과하지만 급경사 지역이라 중간에 한 번 쉬면 마을에서 40분가량 걸렸다.

땀을 식힌 이들이 참새골 옆 골짜기인 작은가죽나무골에서 지게를 세워놓고 부지런히 솔가지를 긁어모았다. 땔감용 솔가지들이 아궁이에 들어가면 금방 타버리기에 굵은 나무들이 필요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때나 한국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당시에 전국의 산하는 온통 민둥산이었다.

이들은 준비한 낫으로 나뭇가지를 잘랐다. 톱이나 도끼로 나무 밑둥치를 잘랐다가는 산 임자에게 뒤탈이 날 터였다. 솔가지를 줍거나 낫으로 잔나무를 베는 일은 암묵적으로 허용됐으나 톱이나 도끼로 나무를 자르는 행위는 산림취체법 위반으로 단속대상이었다.

그러다 보니 도심지에 사는 시민들은 겨울철이면 날마다 땔감과의 전쟁을 벌여야 했다. 박봉우·이건영 두 젊은이가 땔감을 하기 위해 오른 뒷산에는 충북 청원군 가덕면 사람뿐만 아니라 멀리서 청주시 사람들이 오기도 했다. 청주에서 내암리까지는 20km 거리였다.

참새골의 비극
 
청원군 낭성면 명당골에서 생포된 빨치산. 1954.2.10. 1950년대 빨치산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청원군 낭성면 명당골에서 생포된 빨치산. 1954.2.10. 1950년대 빨치산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 충북경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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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지게가 묵직하게 됐을 참에 웬 기침 소리가 났다. 8개의 눈이 마주쳤을 때 정작 화들짝 놀란 것은 나무꾼들보다는 차림이 남루한 불청객이었다.

"누구요?" "나무하러 온 사람들입니다." 총을 멘 산사람들이 묻고 나무꾼들이 답했다. 박건영은 사시나무 떨듯 하는 이건영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만 내려가세"라며 지게를 지고 발걸음을 산 아래로 향했다. 순간적으로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던 산사람(빨치산)들은 결국 두 사람을 해코지하지 않았다. 산사람들이 내암리 청년 두 명을 살려 보낸 일은 몇 시간 후 산사람들에게 비극의 씨앗이 됐다.

"작은가죽나무골에 빨갱이가 나타났습니다." 숨을 헐떡이는 청년들이 가덕지서에 도착한 것은 오전 10시 경이다. 이미 빨치산들이 관내에 비트(비밀 아지트)에서 은거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터라, 지서장은 전 경찰을 동원해 긴급출동했다. 정식 경찰은 6~7명에 불과했지만 의용 경찰은 30명가량이었다.

청원군 가덕지서에서 내암리까지(9.5km)는 신속하게 이동했다. 참새골로 이동한 경찰 병력이 작은가죽나무골로 이동할 때는 지서장의 지휘에 의해 3개 조로 나뉘어 앞에총 자세를 취했다. 나무꾼 역시 안내인 역할을 맡아 자신들이 산사람들과 조우한 곳까지 가야만 했다.

앞에 선 나무꾼이 바위 근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경찰들은 바위를 둘러쌌다. 잠시 후 지서장이 손나팔을 하고 "너희는 포위됐다. 자수하면 살려준다"라고 했다. 바위 사이에 있는 비트와 경찰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지서장의 고함이 세 번째 외쳐질 때였다. 산사람들의 총구에 불이 붙었다. 이에 경찰들이 응사(應射)했다. 산사람들은 사방으로 튀었다. 김종하, 송영길은 무사히 탈출했고, 박우현 충남도당 위원장은 산능선을 따라 참새골 방향으로 도주했다. 여성대원 한 명을 포함한 세 명이 교전 중에 사망했다. 한 명은 생포됐다. 생포된 이는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 출신의 신형식이었다. 잠시 후 박우현 위원장도 참새골에서 교전 중 사망했다. 박우현이 검거 후 소변을 보러 간다며, 도주해 뾰족바위에 머리를 찧어 자진했다는 증언도 있다.

경찰들은 담가(擔架)를 준비하지 못했기에 죽은 시신 4구의 목에 새끼를 걸어 눈 쌓인 산에서 끌고 내려왔다. 총소리에 기겁한 주민들이 두려움 반 호기심 반으로 마을 어귀로 모여들었다. 시신 4구와 포로 한 명을 앞세운 경찰들의 눈은 살기로 번득였다.

"이이고 저 여자는 임신했나부네." 한 아줌마가 가르킨 여성 시신의 배는 남산만 했다. "쯧쯧쯧" 마을 어귀에 모인 아낙들이 모두 혀를 찼다.

경찰과 산사람, 주민들이 뒤섞여 웅성거리는 모습을 마을 어귀의 논에서 썰매를 타다가 지켜본 소년은 윤종한(당시 10세)이었다. 소년과 청원군 가덕면 내암리 주민들의 마음에 큰 충격을 준 사건이 벌어진 일은 1954년 1월 29일이었다.(충청북도경찰청, <충북경찰사>, 2003)

지략가 박우현
 
박우현 위원장이 전사한 참새골. 사진 속 인물은 증언자 윤종한.
 박우현 위원장이 전사한 참새골. 사진 속 인물은 증언자 윤종한.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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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암리 참새골에서 최후를 맞은 박우현은 누구인가? 1910년 10월 19일 함경북도 길주에서 태어난 박우현은 일제강점기에 민족해방투쟁의 대열에 참가했고, 해방 직후에는 조선공산당 함경북도당 선전부장을 맡았다. 1950년 6월 모스크바 당중앙학교에 유학 중 한국전쟁이 터져 그해 7월에 충남도당 위원장으로 임명돼 대전으로 파견됐다.(김광운, <북한정치사 연구 1>, 2003)

1950년 9월 말 UN군의 진격으로 충남도당의 주력부대는 대둔산으로 이동했다. 군경토벌 작전으로 충남도당은 대둔산에 안주할 수 없었다. 소련(러시아)혁명 기념일인 1950년 11월 7일 충남부대(백두산부대와 논산군 유격대)와 호남부대는 합동으로 충남 논산군 구자곡면(현재 논산군 연무읍)을 습격했다. 지서를 단숨에 습격해, 유치장에 구금됐던 이들 10여 명을 구출한 유격대는 논산군(현재의 논산시) 강경읍으로 진출했다.

곽해봉 부대로도 불린 백두산부대는 2개 조로 나뉘어 한 개 조는 강경경찰서를 습격했다. 경찰서 창고에 구금됐던 300여 명이 구출됐다. 고문과 굶주림으로 제대로 걷지 못하는 이들은 불과 20여 명만이 빨치산을 따라 입산했다.

다른 조는 강경역사를 불태우고 호남선을 폭파시켜 철도교통을 마비시켰다. 그날 밤 빨치산부대는 의약품과 신발을 대량 확보할 수 있었다. 충남부대가 강경읍을 휘저은 것은 구자곡면 습격사건이 발생한 지 이틀 뒤인 1950년 11월 9일이었다.

충남도당 위원장 박우현의 진가가 돋보인 것은 전북 완주군 운주면 용계원에서의 전투였다. 인민군과 중국인민지원군이 서울을 점령(소위 '1.4 후퇴')한 것을 기념하는 충남도당 집회가 1951년 1월 14일 운주면 용계원에서 벌어졌다. 하지만 경찰의 기습으로 양편의 교전이 이루어졌다.

박우현 위원장은 "두만강 부대는 우측으로, 대둔산 부대는 좌측으로"라고 외치며 진두지휘를 했다. 경찰들은 거대병력이 있는 줄 지레짐작하고 철수를 결정했다. 사실 박 위원장은 있지도 않은 부대 이름을 부르며 작전명령 하듯이 외친 것이다. 그의 지략이 돋보인 작전이었다.(<통일뉴스>, 2018.3.17. 임방규, '충남 빨치산 전적지 답사')

옥천역 습격과 제3지구당 출범

충남도당의 주력부대는 대둔산에서 논산을 경유해 전북 완주군 운주면 방향으로 이동한 반면 충남도당 압록강 부대(윤가현 부대)는 대둔산에서 옥천으로 이동했다.

1951년 1월 10일경 충남부대 압록강 부대는 충북 옥천군당과 합동으로 경부선에 폭탄을 매설하고 멍석을 물에 적셔서 철로에 깔아 놓아 군용열차를 폭파시켰다. 이로 인해 경부선이 근 일주일간 마비됐다.

1950년 9월 말부터 1951년 초까지 전개된 충남도당 유격대 투쟁을 이끈 지도부는 다음과 같다. 위원장 박우현, 부위원장 겸 충남빨치산 총사령관 박천평, 도 인민위원장 윤가현, 2대 인민위원장 곽해봉, 선전부장 겸 노동신문 주필 세민(가명), 기요과장 라실(가명) 등으로, 충남도당 산하의 전체 인원은 약 1000명 이었다.(임방규 글)

중국인민지원군의 참전과 빨치산의 처절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전선은 3.8선에서 고착화되됐다. 이에 남한지역의 빨치산은 대열을 새롭게 정비했다. 1951년 6월 중순 덕유산 송치골에서 남한 6개 도당 위원장 회의가 소집됐다. 참석자들은 유격대를 하나로 묶는 남부군 결성에 합의를 이뤘다.

총사령관에는 이현상, 충남북을 총괄하는 3지구당 위원장에는 박우현(가명 남충열)이 선임됐다. 빨치산투쟁이 장기화되면서 빨치산 대오는 와해됐고, 3지구당 위원장 박우현 역시 충북 청원군 가덕면 내암리 비트에서 은신하고 있다가 최후를 맞은 것이다. 내암리에서 탈출한 김종하와 송영길이 1955년 봄 충남 천안군에서 생포됨으로써 충남도당은 막을 내리게 됐다.
 
작은가죽나무골. 박우현 위원장과 경찰의 교전장소.
 작은가죽나무골. 박우현 위원장과 경찰의 교전장소.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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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애국열사릉에 있는 박우현 묘비
 평양 애국열사릉에 있는 박우현 묘비
ⓒ 김광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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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중 애인의 최후

박우현이 전사하던 날, 경찰과의 교전 중에 총 맞은 만삭의 임산부는 누구인가? 후일 밝혀진 바에 의하면 충남도당 기요과장 이었던 라실(가명)로, 그녀는 박우현의 비서 겸 산중처 역할을 맡았다.

과연 총알이 빗발치는 산속의 전쟁터에서 빨치산 최고지도부가 애인(산중처)을 둘 수 있었을까? 청주상고 출신의 충남 빨치산 장환은 자전적 소설 <불꽃 1~3>(2001)에서 충남도당 위원장의 산중처 문제를 거론했다. 장환은 박우현 위원장을 포함한 최고지도부의 산중처 문제가 현실적으로 대두됐으며, 조직 대오의 혼란을 야기시켰다고 했다.

산중처는 충남도당만의 문제가 아니라 여러 도당에서도 발생했다.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 전북도당 위원장 방준표, 동해남부 유격대장 하준수(남도부), 경남도당 위원장 이영회 등 여러 빨치산 간부들이 산중 애인을 두고 있었다.(안재성, <이현상 평전>, 2007)

사실 빨치산의 산중처 문제가 도덕적으로 비난 받아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남녀가 있는 곳이라면 전쟁터이든 어디든 사랑이 싹트는 것은 자연의 이치다. 그런데 문제는 최고지도부의 산중처는 용인되고, 하급 당원들은 그렇지 못했던 것이 문제였다. 그렇다고 빨치산 활동을 하면서 남녀 대원들의 연애를 공공연하게 권장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하지만 자연스럽게 사랑이 싹 텃을 때 이를 처벌하거나 제재하는 것이 문제이다. 특히 위원장을 포함한 최고위 간부의 연애는 묵인되고, 하급대원들은 처벌됐다면 이는 심각한 문제이다.

소설가 안재성은 후일 경남도당 위원장을 맡게 되는 이영회가 이현상에게 본인의 '산중 연애를 자기비판하고 처벌해 줄 것을 요구'한 것에 대해, 이현상이 반대했다고 한다. "사랑은 처벌의 대상이 아니오"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후일 이현상도 하수복과 사랑이 싹터 당의 비판을 받게 된다.

임신한 하수복은 공세적인 토벌 작전이 벌어지기 전 체포돼 옥중에서 아기를 낳았다. 하지만 전북도당 위원장 방준표는 1954년 1월 31일 남덕유산 해발 1046미터 고지의 바위산에서 애인 신단순과 함께 자폭을 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 속에서 70여 년 전의 빨치산 활동, 그중에서도 산중처 문제를 흥미 위주로 보는 것에 대해서는 경계해야 한다. 하지만 명확한 신념에 기초해 입산한 여성 대원들이라 하더라도 그들의 인권에 대해 이제는 진지하게 돌이켜 볼 때가 됐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두 가지를 상상을 해 볼 수 있다. 산중에서 연애를 권장할 수는 없지만 자연스럽게 남녀 빨치산의 사랑이 싹 텃을 때 그들의 신분 여하와는 관계없이 연애를 용인하는 문제와 임신한 여성 빨치산의 처신 문제이다.

비트에서 자폭을 하거나 교전 중에 사망하는 것이 빨치산 본인의 결심과 선택의 문제이기는 하지만 새 생명의 존엄성을 인정해, 귀순하는 것도 하나의 길이지 않았을까 하는 역사적 상상을 해 본다.

태그:#박우현, #참새골, #빨치산, #산중처, #3지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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