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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경술은 뒤늦은 모내기를 하느라 마음이 안달이 났다. 그는 해가 뜨기 전부터 아내 신노미와 함께 일할 준비를 하느라 서둘렀다. 그의 부친, 남동생도 마찬가지였다.

보통 시골에서 '농사철에는 부지깽이에도 심부름을 시킨다'는 말이 있듯이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농사일에 동원되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12세 소년 권영찬이 새벽처럼 부모를 따라가 논에서 개구리 울음소리를 마주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보통 마을에서 모내기나 벼 베기를 할 때는 '두레'라는 공동노동을 하였지만, 유독 늦은 모를 심는 권경술은 가족노동만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논 양쪽 가에 못줄을 띄우면 각자가 나름대로 정한 구역에 모를 기계적으로 꽂았다. 거머리가 종아리에 달라붙는 것은 애초에 신경 쓰지도 않았다.

"쉬었다 하세요." 권영찬 어머니 신노미가 새참을 내오면서 하는 소리였다. 허리가 끊어질 듯이 아팠지만, 가족들은 요기를 한다는 생각에 얼굴들이 저절로 펴졌다.

기관총에 낭심이
 
고자무 사건을 그림으로 재구성
▲ 고자무 사건 현황도 고자무 사건을 그림으로 재구성
ⓒ 그림: 차준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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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들이 논두렁에 막 둘러앉았을 때였다. 봉화 방향에서 헐레벌떡 뛰어오던 경찰들이 고가무에 다다랐을 때 먼저 총격을 개시했다. '탕탕탕'하는 소리에 경북 안동군 예안면 삼계리에는 일순간 긴장감이 돌았다.

선제공격을 놓친 안동 방향에서 진격한 청년방위대원들은 적군과 아군을 확인할 새도 없이 무조건 총격을 가했다. 잠시 후 청년방위대원들은 자신들이 위치한 머늠골에 기관총을 설치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두두두'하는 둔탁음이 개구리 목을 잔뜩 움츠러들게 했다.

밥숟가락을 막 뜨려던 찰나에 때아닌 콩 볶는 소리에 놀란 권경술 가족은 사방으로 튀었다. 어른들이 논둑으로 뛰어가는 사이 정신이 없었던 소년 권영찬은 논 한가운데로 뛰었다. 쉭쉭 하는 소리에 기관총 탄환이 논에 박히면서 개구리도 사방으로 튀고, 소년도 정신 줄을 잃은 지 오래였다.

동계천을 사이로 두고 고가무와 머늠골에서 벌어진 때아닌 총격전 속에 가족들이 머늠골 방향의 바위 뒤로 숨었다. 소년 권영찬이 가장 늦게 바위께로 갔을 때 소년의 몸이 기울었다. 엉치뼈에 탄환이 박힌 것이다. 엉치뼈로 들어간 탄환은 낭심으로 나왔다. 소년이 엉금엉금 기어 온 밭고랑은 피로 얼룩졌다.

"총 맞았어요!"라고 간신히 말한 소년은 몸을 한 바퀴 돈 후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소년의 삼촌 권갑출이 조카를 둘러업었다. 권영찬이 삼촌의 등에 업혀 머늠골 어귀에 들어섰을 때는 둘러업은 이나 업힌 이나 온통 피칠갑이었다.

"아이고 우리 손주 죽는다"라며 혼이 절반은 나간 권영찬 할머니가 걸레를 갖고 동분서주했다. 손주의 피를 연신 닦아냈지만, 흐르는 피는 끝이 없었다. 같은 마을에 살던 소녀 금후남(1945년생)이 피투성이 이웃을 본 것은 1949년 6월이었다.

그렇다면 소년 권영찬은 왜 아군인 대한민국 경찰과 청년방위대의 총격전에서 낭심에 총을 맞는 불운의 주인공이 되었을까?

아군(我軍)끼리 교전
 
당시 사건 현장에 대한 항공사진
▲ 사건 현황 지도 당시 사건 현장에 대한 항공사진
ⓒ 카카오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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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의 대표적인 산악지역인 경북 봉화군과 안동군(현재의 안동시)에서는 일찍부터 빨치산이 활동했다. 특히 봉화군 명호면과 재산면, 안동군 연안면에 위치한 청량산은 빨치산 활동의 주 무대가 되었다.

이로 인해 한국전쟁 전부터 청량산 주변에서는 빨치산과 군경의 교전이 빈번했다. 1949년 6월 17일 새벽, 재산면사무소와 재산지서가 빨치산들에게 기습 점거되었다는 급보를 받은 지용호 봉화경찰서장은 경찰 20여 명과 대한청년단원 등 50명을 인솔, 트럭 2대에 분승하여 현지로 출동했다.

출동하던 봉양경찰서 지용호 서장 일행은 봉성면 봉양리 미륵재에서 빨치산 200여 명의 기습공격을 받아 경찰관 3명과 청년단장 등 4명이 총탄에 맞아 희생되었다. 이 와중에 지용호 서장도 목숨을 잃었다.

빨치산의 공격을 피해 안동 방향으로 도주하던 재산지서 경찰은 동계천을 앞두고 안동군 예안면 고가무 앞에 다다랐다. 거꾸로 재산지서가 습격받았다는 정보를 접한 안동 청년방위대도 출동을 했다. 청년방위대는 대한청년단의 준군사 조직으로 국민방위군의 전신이었다.

동계천을 사이에 둔 북쪽의 재산지서 경찰과 남쪽의 청년방위대가 전투 경험이 미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불과 600미터 거리에 위치한 상대방이 적군인지, 아군인지 분별하지 못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경찰이던 군인이던 전투대형에서는 정찰병(첨병)을 먼저 세우고 본대와 무전을 주고받는다.

그런데 이날의 재산지서 경찰과 안동 청년방위대는 이런 기본적인 전투수칙도 지키지 않았다. 육안으로도 적아를 구분할 수 있는 거리임에도 잔뜩 긴장한 탓에 앞뒤 가릴 것 없이 상대방을 적군으로 오인(誤認)한 것이다.

무장한 상대방은 그렇다 치더라도 논에서 모내기하던 권영찬 가족 일행에게 총질을 한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정작 피해 당사자인 권영찬은 "당시 군경이 우리 가족을 빨갱이(빨치산)로 오인한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군경 대치선의 중간지점에 있던 이들은 서로에게는 약 300미터의 거리에 있었다. 그렇다면 육안으로도 쉽게 민간인인지, 빨치산인지 구별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모내기하는 농민들을 빨치산과 혼동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결론은 민간인인줄 알면서 총질을 했다고밖에 볼 수 없다.

즉, '작전 지역에서 움직이는 것은 무조건 적이다'라는 인식 때문이다. 그렇다면 최소한 작전지역의 주민들에게 소개령을 내리는 조치가 먼저 취해져야 했겠지만, 그런 조치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구덩이 바로 앞에 세워진 아홉 명의 청년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으로 모내기하다가 낭심에 총을 맞은 소년 권영찬은 예안면 소재지의 서아무개 의원으로 갔다. 하지만 서 의사는 치료 부위에 아까장끼(머큐로크롬)만을 바르고 손을 내저었다.

더 큰 병원으로 가라는 것이다. 권영찬은 안동에 있는 도립병원으로 긴급 후송되었다. 소년의 할머니가 병간호를 했지만, 소년의 병원 생활은 마냥 불안하기만 했다. 비록 병원이 안동 읍내 한가운데 있었지만, 밤에 병실에 불도 켤 수 없었다.

빨치산이 출몰한다는 이유였다. 병원에서는 소년에게 퇴원하라고 아우성쳤다. 제대로 병 치료도 못한 소년은 한 달 만에야 어쩔 수 없이 퇴원을 해야 했다. 약을 타와 집에서 자가 치료를 하니 제대로 치료가 될 수 없음은 당연했다.

그런 일이 있은 지 1년 만에 한국전쟁이 터졌다. 안동지역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39일 만인 1950년 8월 3일 인민군에게 점령되었다.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안동에서도 인민위원회가 구성되어 토지개혁, 의용군 모집, 식량 공출 등이 이루어졌다.

권영찬은 소년단에 소속되어 여성동맹원들에게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배웠다. 그보다 3~4세 위 선배들은 민청(민주청년동맹)에 소속되어 쌀과 부식 등을 운반하는 등 인민위원회와 인민군의 심부름을 했다.

그해 가을, 수복한 군경에 의해 이런 행위는 이적행위로 간주되었다. 수복 후 군경은 마을 청장년들을 모래사장에 세워놓았다. 사실 모래사장에 세워진 청·장년들은 인공 시절 감투조차 쓰지 못했던 이들이다. 정작 감투를 쓴 이들은 인민군을 따라 월북을 했고, 남은 부모와 아내, 자식들은 공개총살의 타깃이 되었다.

이들 9명은 일렬횡대로 세워졌다. 당시 오일장에 나왔던 주민들이 호기심 반, 강제동원 반으로 모래사장 주위에 둘러섰다. 군인들은 면소재지 청년들을 동원해 아홉 개의 모래 구덩이를 팠다. 구덩이 바로 앞편에 아홉 명의 청년이 세워졌다.

정식적인 재판이고 뭐고 일체 요식 행위는 없었다. 단지 피의 제전(祭典) 준비가 마무리되자 군 장교는 들었던 손을 아래로 향했다. 앉아쏴 자세를 취한 군인들의 방아쇠에 걸린 손만이 움직였다. 탕탕탕하는 소리와 함께 젊은이들의 목과 무릎이 꺾이었다. 동시에 그들의 몸뚱이는 사전에 파놓은 모래 구덩이로 쑤셔 박혔다.

살육 현장은 다시 모래로 뒤덮였고, 선연한 핏자국만이 당시의 참혹한 현장을 증언했다. 주민들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긴 이 사건은 쉽게 수습되지 않았다. 군경이 죽은 이들의 시신을 수습하지 못하게 한 이유가 그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마을 개들이 피 냄새를 맡고 모래 구덩이를 파헤쳐 시신들을 물고 사방으로 뛰어다녔다.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었다.

그의 삶은 누가 보상할 것인가
 
증언자 권영찬
 증언자 권영찬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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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권영찬이 대한민국 군경의 오인 총격으로 평생을 장애인으로 살았다면, 부역혐의자의 공개총살 사건은 그에게 정신적 트라우마를 남겼다. 또한 소개령으로 피난을 갔다 온 사이 온 집이 불태워진 사건은 사건 축에 끼지도 못할 정도였다.

그런데 권영찬과 소년의 가족이 단순히 모내기를 하다가 횡액을 맞았다면 이에 대한 국가의 사과와 보상(배상)이 반드시 뒤따라야 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런 조치는 일체 이루어지지 않았다.

심지어 반성 없는 국가폭력은 반드시 반복되기 마련이다. 안동군 예안면 권영찬 사건이 발생한 지 31년 만에 광주광역시 송암동에서 유사한 사건이 발생했다.

1980년 5월 24일 오전 1시 30분, 주남마을에 주둔해 있던 7공수여단과 11공수여단은 주둔지를 20사단 61연대에 인계하고 광주비행장으로 이동하여 기동타격대 임무를 수행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들은 작전지역을 인수인계하는 과정에서 아군을 적(시민군)으로 오인하고 총격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군인 11명이 사망했다. 이는 광주민주화운동 전 기간에 발생한 군 사망자 23명의 절반에 가까운 수치였다.                                                                                                                                               
이 오인 총격 사건은 군인들의 엉뚱한 분풀이 상대가 필요했고, 송암동 주민들이 그 희생양이 되었다. 아니 희생양이 아닌 학살 대상이 필요했을 뿐이다.

12세에 총을 맞은 소년 권영찬은 그날부로 국민학교를 작파해야 했다. 30세가 되기 전까지 시골에서 농사 일을 하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가 전쟁 전에 군경의 오인 총격으로 평생을 장애인으로 살았는데 이에 대한 국가의 사과와 배상은 없었다. 그의 삶을 누가 보상할 것인가.

태그:#모내기, #낭심, #오인사격, #공개총살, #송암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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