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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오수 검찰총장이 14일 오전 국회에서 박광온 법사위원장과 면담 전 입장을 밝히고 있다. 김 총장은 민주당이 이달 내 처리를 추진하고 있는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법안에 대해 "헌법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것"이라며 입법 절차를 진행할 국회를 먼저 방문했다.
 김오수 검찰총장이 14일 오전 국회에서 박광온 법사위원장과 면담 전 입장을 밝히고 있다. 김 총장은 민주당이 이달 내 처리를 추진하고 있는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법안에 대해 "헌법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것"이라며 입법 절차를 진행할 국회를 먼저 방문했다.
ⓒ 공동취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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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오수 검찰총장이 검수완박 저지에 사활을 걸고 있다. 11일 전국지검장회의에서는 검찰 수사권이 완전 박탈되면 총장직에 더는 연연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민주당 의원총회에서 검수완박이 당론으로 채택된 다음날인 13일에는 출근길에 만난 기자들에게 "4.19 혁명 이후에 헌법에는 수사의 주체를 검사만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라며 "(검수완박은) 헌법에 위반되는 것이지요"라고 발언했다.

검수완박이 1960년 4.19 이후의 헌법 정신에 위반한다는 김오수 총장의 발언은 사실관계에 부합하지 않는다. 한국 현대사의 맥락과도 맞지 않는다.

그가 말한 '4.19 혁명 이후'는 정확히 표현하면 '1961년 5.16 쿠데타 이후'다. 대한민국정부 수립 이후의 제5차 개정인 1962년 12월 26일 개정으로 등장한 제3공화국 헌법에 김오수 총장이 말한 것이 들어 있다.

1962년 헌법은 제10조 제3항에서 "체포·구금·수색·압수에는 검찰관의 신청에 의하여 법관이 발부한 영장을 제시하여야 한다"라고 규정했다. 이 규정이 현행 헌법 제12조 제3항에서는 "체포·구속·압수 또는 수색을 할 때에는 적법한 절차에 따라 검사의 신청에 의하여 법관이 발부한 영장을 제시하여야 한다"로 되어 있다.

대한민국정부 하의 첫 헌법인 1948년 헌법과 그 이후의 1952년 헌법, 1954년 헌법, 1960년 6월 헌법 및 1960년 11월 헌법에는 "체포, 구금, 수색에는 법관의 영장이 있어야 한다"라고 돼 있었다. 그랬다가 1962년 헌법에 이르러 검사의 영장 청구권이 명시됐던 것이다.

그전에는 경찰도 영장청구권을 행사했었다. 1954년 9월 23일 제정된 형사소송법 제201조는 "검사 또는 사법경찰관은 관할지방법원 판사의 구속영장을 받어 피의자를 구속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검찰과 더불어 경찰도 영장청구권을 행사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던 부작용을 헌법적으로 해소시킨 것이 바로 1962년 헌법이다. 

김오수 총장은 1962년 헌법에 나타난 그 같은 변화가 검찰 수사권의 필요성을 뒷받침하는 듯이 발언했다. 하지만 1962년 헌법의 그 조문은 영장청구의 절차에 관한 것이지 수사권의 주체에 관한 것이 아니다. 검수완박이 되어 검찰이 수사권을 놓게 되더라도, 영장청구의 필요성에 대한 판단은 여전히 검사가 하게 된다.

김오수 총장은 "수사권이 없는데 어떻게 영장청구를 하겠나?"라고 항변한다. 이는 사법제도의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다. 영장실질심사를 담당하는 법관은 수사권 없이도 영장발부 여부를 판단한다. 수사권이 없이도 영장청구나 발부에 필요한 조사 작업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역사적 맥락

헌법 조문에 검찰관(검사)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 1962년 개헌을 두고 2005년 <형사법 연구> 제24호에 실린 문성도 경찰대 교수의 논문 '영장주의의 비교법적 고찰'은 "이와 같은 헌법 개정을 통하여 이제 한국의 검찰은 헌법에 의하여 설치된 기관은 아니지만 적어도 헌법에 규정된 기관으로 격상되었으며"라고 평가한다.

그런데 그 같은 변화는 5·16의 결과물이 아니었다. 5·16 뒤의 개헌을 통해 이뤄진 일이기는 하지만 5·16과는 직접적 관련이 없다. 그렇다고 그 이전에 있은 4·19의 결과물이라고도 할 수 없다. 이는 4·19 이전부터 꾸준히 이어지던 논의의 산물이었다. 경찰의 영장청구권을 거둬들여야 한다는 주장이 그 전부터 제기되고 있었던 것이다.

2017년에 <형사법의 신동향> 제57호에 실린 김상겸 동국대 교수의 논문 '검사의 영장 청구에 관한 헌법적 연구'는 영장청구권을 검찰에만 부여하는 형사소송법 개정안이 1954년·1956년·1957년에 발의됐지만 번번이 좌절됐다고 말한다. 그랬다가 1961년 형소법 개정으로 드디어 관철됐고 뒤이어 1962년 헌법에도 반영됐다고 설명한다.

김오수 총장은 이 시기에 헌법적으로 보장된 검사의 수사 주재권이 검수완박을 통해 박탈되는 것은 헌법에 맞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헌법에 위반되는 것이지요"라고 그는 말한다.

그의 주장은 이 시기에 검찰 권력을 강화시킬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결과다. 한국 현대사의 흐름을 고려했다면 '검수완박을 반대하는 것은 헌법 정신에 어긋나는 것이지요'라는 말이 나왔어야 마땅하다.

한국인들은 해방 80년이 다 되어 가는 지금까지도 '일제 순사'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갖고 있다. 일제 순사는 식민지 한국인들과 한국 독립운동을 탄압한 상징적 존재로 각인돼 있다.

그에 비해 '일제 검찰관', '일제 검사'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상대적으로 옅은 편이다. 유관순을 비롯해 한국인들을 억압하는 각종 재판에 검사가 반드시 등장하지만, 일제 검사는 일제 경찰에 비해 비판을 덜 받는다.

일제 경찰이 혐오의 대상이 된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의 영장청구권 남용 혹은 강제수사 남용에 있었다. 위의 김상겸 논문은 "세계 주요 문명국가 중에서 경찰의 10일 구속제도를 인정하고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 밖에 없는데, 이러한 경찰의 구속수사 권한은 바로 일본 식민지시대 경찰의 권한에서 유래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각주를 통해 "프랑스·독일·일본·영국·미국 등 소위 선진국들의 경찰은 모두 체포권한 정도만 보유하고 있고, 경찰에서 피의자를 구금할 수 있는 시간도 최대 48시간 정도에 불과하다"고 덧붙인다. 그런 다음, 경찰을 앞세운 일본제국주의의 한국인 억압을 논문 본문에서 이렇게 요약한다. 아래의 괄호 내용은 논문에 있는 그대로다.
 
"일본 식민지시대 경찰에는 독자적 구금 권한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당시 경찰에는 범죄즉결권(검사·판사 관여 없이 경찰이 피고인의 진술을 듣고 형을 선고하는 권한), 태형집행권(볼기를 때리는 야만적 형벌로서 조선인에 대해서만 집행), 훈계방면권(경찰이 경미사건이라고 판단하면 피의자를 훈계·방면하는 권한), 행정검속권(공안을 해할 우려가 있다고 판단하면 3일간 예방구금 권한) 등 실로 막강한 권한이 있었다. 그 시대에는 전체 사건의 40% 가량을 판사와 검사의 관여 없이 경찰이 단독으로 범죄즉결처분을 하였다고 한다."
 
40% 정도의 사건에서 경찰이 판사·검사의 몫까지 대신했다. 경찰이 형을 선고하기도 형을 집행하기도 했다. '일제 순사'에 치를 떠는 한국인들이 해방 뒤에도 많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 중 하나를 여기서 찾을 수 있다.

그 정도로 식민지 한국인들을 괴롭혔으니, 한국 경찰은 해방 직후의 친일청산 열기 속에서 반성과 참회의 시간을 가졌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친일청산은 성사되지 못했고, 경찰은 도리어 강해졌다. 친일청산 기구인 국회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를 와해시키는 데 앞장서기까지 했다. 그런 뒤 이승만 정권에 협력하면서 일제 때보다 훨씬 강력해졌다.

박정희 정권의 폭정이 중앙정보부에 의해 뒷받침되고 전두환 정권의 폭정이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에 의해 뒷받침됐다면, 이승만 정권의 그것은 경찰에 의해 뒷받침됐다. 경찰이 너무 강력해진 결과였다.

그런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있었다. 검사가 경찰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었다. 박찬길 검사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박찬길은 1911년 황해도에서 태어나 미군정 때 검사가 됐다. 광주지검 순천지청 차석검사 재직 당시, 그는 경찰이 체포한 좌파(좌익) 혐의자들을 무혐의로 풀어주거나 선처했다. 조작된 빨갱이 사건이라는 판단에서였다.

검사의 직무에 관한 현행 검찰청법 제4조 제2항에 "검사는 그 직무를 수행할 때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로서 헌법과 법률에 따라 국민의 인권을 보호하고"라는 문구가 있다. 이 같은 검사의 인권보호의무를 누구보다 잘 지킨 인물이 바로 박찬길이다. 그는 무고한 피의자들을 풀어주는 동시에, 무고한 시민을 살해한 경찰에게 징역 10년을 구형했다.

이 일로 인해 경찰의 주시를 받은 그는 결국 보복을 당했다. 1948년에 여순사건(여순항쟁)이 발생하자, 경찰은 이 분위기에 편승해 박찬길을 빨갱이로 몰아 살해했다. 경찰 지도부의 밀명을 받은 경찰토벌대가 그를 찾아내 '토벌'했다.

이처럼 검사의 생명을 우습게 여길 정도로 경찰 권력이 막강했기 때문에, 1950년대에는 검찰개혁이 아닌 경찰개혁 논의가 활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흐름이 1950년대 중반 이후의 형사소송법 개정 시도를 낳고, 이것이 1961년 형소법 개정과 1962년 개헌으로 이어졌다.

지금은?
 
더불어민주당이 '검수완박'(검찰수사권 완전 박탈) 입법을 4월 국회에서 처리하는 방안을 당론으로 확정한 지난 12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이 불을 밝히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이 "검수완박"(검찰수사권 완전 박탈) 입법을 4월 국회에서 처리하는 방안을 당론으로 확정한 지난 12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이 불을 밝히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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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검찰과 경찰의 위상이 일제강점기나 1950년대와 판이하다. 그 시절에는 경찰 권력의 부작용이 논의의 초점이었지만, 지금은 검찰 권력의 문제점이 우려의 대상이 되고 있다.

검찰 수사권 상당부분을 거둬들이는 검찰개혁이 2020년에 있었지만, 검찰 권력은 여전히 상당하다. 이를 합리적으로 조정하기 위한 노력이 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이다. 검찰이 너무 비대해진 지금 시점에는 검수완박이 시대적 정의에 부합한다고 할 수 있다.

1962년 시점에는 검찰권을 강화시켜 경찰의 힘을 조정하는 것이 그 시대 정의에 부합했다면, 지금은 검찰의 권한을 좀더 거둬들이는 것이 시대적 가치에 부합한다. 김오수 검찰총장의 반발은 팩트와도 맞지 않을 뿐 아니라 이 같은 시대적·역사적 맥락에도 어긋난다. 김오수 검찰총장은 한국 현대사의 맥락을 뒤트는 발언을 더는 내놓지 말아야 한다.

태그:#검수완박, #검찰개혁, #검찰수사권, #김오수, #검사의 영장청구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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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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