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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소환된 원세훈 전 국정원장 이명박 정부 시절 국가정보원의 불법적인 국내 정치공작을 지휘한 의혹을 받고있는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26일 오후 검찰 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으로 소환돼 호송차에서 내리고 있다.
▲ 검찰 소환된 원세훈 전 국정원장 이명박 정부 시절 국가정보원의 불법적인 국내 정치공작을 지휘한 의혹을 받고있는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9월 26일 오후 검찰 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으로 소환돼 호송차에서 내리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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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권 하의 국가정보원은 원세훈 원장 주도로 댓글 공작을 벌였다. 이명박 정권은 대통령선거와 여야 정치구도에 영향을 주려는 불법적 목적으로 이런 음지 공작을 활용했다.

이명박 정권은 국가안보를 우선시해야 할 국정원을, 숨어서 악성 댓글이나 올리며 국민이 아닌 정권에 충성하는 조직으로 전락시켰다. 국가안전기획부가 국정원으로 거듭난 1999년 이후로 국민의 정보기관을 이렇게까지 망친 정권은 없었다.

중앙정보부나 안기부 시절의 부훈은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였다. 국정원이 되면서 '정보는 국력이다'로 바뀌었다. 그런데 이명박 정권은 국정원을 음지에서 일하는 조직으로 되돌려놓았다.

우리 역사에서 정보기관을 가장 많이 활용한 군주는 이명복 황제였다. 명복은 고종 황제의 민간인 시절 이름이다. 이명복은 국내뿐 아니라 일본·청나라·러시아에까지 정보원을 상주시켰다. 이렇게 국제적 범위에서 체계적으로 정보 활동을 벌인 군주는 고종 이전에는 없었다. 이명박처럼 이명복도 정보기관에 많이 의존한 것이다.

이명박이 그랬던 것처럼, 이명복 황제도 정보기관을 통해 정보수집뿐 아니라 여론조작까지 했다. 그래서 외형상으론 이명복과 이명박이 유사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 결이 무척이나 달랐다. 이명복은 이명박처럼 그렇게 비열하지는 않았다. 

왕조시대 군주는 천명의 대리인으로 자처했다. 스스로 하늘의 아들로 높인 것이다. 그런 영험한 존재가 정보기관을 이용해 백성들 동태를 살피는 것은 군주의 체모에 맞지 않았다. 전지전능해도 시원찮을 신의 대리인이 남의 뒷조사를 하는 것은 자기 위신을 깎아내리는 일이었다. 족집게 무녀로 소문난 사람이 심부름센터에 돈을 주고 의뢰인의 과거 행적을 조사하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그래서 역대 한국 왕조에서는 공식 정보기관이 없었다.

조선시대 암행어사의 임무 중 하나였던 정보 수집

중국 명나라 때는 이례적으로 동창(東廠)이란 첩보기관이 있었다. 제3대 황제인 영락제가 1420년 환관(내시)들을 중심으로 세계 최초의 정보기관을 만들었다. 이것은 군주의 위신을 깎아내리는 일이지만, 명나라에서는 황제권력이 막강했기에 그런 위신 문제가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군주보다는 귀족들이 강했다. 그래서 왕이 위신을 손상시키면서까지 정보기관을 만들기는 힘들었다.

그렇다고 옛날 한국에서 군주의 정보활동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신의 대리인이 정보기관을 두는 게 논리적으로 맞지 않지만, 진짜로 신의 대리인은 아니므로 국정을 운영하자면 정보활동을 무시할 수 없었다. 조선시대 경우에는 전국 각지에 파견된 암행어사들이 지방 정보를 왕에게 보고했다. 정보 수집은 암행어사의 임무 중 하나였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국외 활동 중에는 암행어사와 흡사한 데가 있었다. 이 점은 이 시리즈에서 조만간 다루어질 것이다. 이렇게 정보요원과 유사한 암행어사가 활동한 적은 있지만, 지금의 국정원처럼 공식 간판을 단 정보기관이 등장하지는 않았다. 

 가족과 함께한 고종. 서울시청 옆 덕수궁에서 찍은 사진.
 가족과 함께한 고종. 서울시청 옆 덕수궁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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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이명복은 그런 세상에서 왕이 됐다. 그랬으므로 그 역시 공식 정보기관을 둘 수 없었다. 하지만, 기존 관행을 따랐다가는 정권을 지키기 힘든 사정이 있었다. 바로, 점증하는 일본의 위협 때문이었다.

1894년까지만 해도 조선은 청나라의 정치적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뒤로 이 나라의 입김이 세졌다. 그러다가 1896년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아관)으로 도피한 아관파천 이후로 러시아의 발언권이 증대되면서, 러·일 양국의 세력균형이 조선에서 형성됐다.

이 세력균형으로 어느 한 나라도 조선을 장악할 수 없게 되자, 고종은 1897년 10월 12일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직함을 황제로 바꾸었다. 하지만 불과 한 달 뒤에 독일이 산동반도(산둥반도) 교주만을 점령하면서부터 상황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독일이 서해 서쪽에 기지를 가지면, 러시아가 서해를 통해 남진할 기회가 차단될 수밖에 없었다. 이를 막기 위해 러시아는 1898년 3월 평안도 서쪽의 요동반도(랴오둥반도)를 점령했다. 이로 인해 국제사회의 집중 견제를 받게 되자, 러시아는 요동반도에 집중할 목적으로 한반도에서 발을 뗐다.

이 때문에 1898년부터 세력균형이 흔들리면서, 조선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이 급증했다. 이런 속에서 1902년 6월 이명복 황제가 중대 조치를 내렸다. 주로 일본의 침략을 막을 목적으로 현대적 정보기관을 창설한 것이다. 제국익문사(帝國益聞社)가 그것이다.

대한제국 정보기관, '제국익문사'

대한제국 멸망 2개월 전인 1910년 6월 조선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본국 외무대신 고무라 주타로에게 보낸 보고서 속에 제국익문사 해외 정보원의 활동에 관한 내용이 있었다. 이때까지도 제국익문사가 활동했던 것이다.

왕조시대에는 정보기관이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서 제국익문사는 공식적으로는 정보기관이 될 수 없었다. 외형상으로는 연합뉴스나 AP 통신 같은 통신사였다.

제국익문사의 내부 규정을 담은 <제국익문사 비보장정>이 있었다. 황제에게 매일 보고할 비보 즉 비밀보고에 관한 규정이다. 비보장정 제16조에서는 매일 같이 소식지를 발간하여 대중에게 판매하라고 했고, 제20조에서는 소식지를 관청에도 유상 배포하라고 했다. 일반 신문이 아닌 소식지 수준의 인쇄물을 배포했던 것이다.  

밖에서 보면 언론기관과 유사했지만, 내부적으로는 분명히 정보기관이었다. 비보장정 제2조에서는 비밀리에 탐지한 사항을 매일 같이 비밀 보고서로 작성해 황제에게 보고하라고 했다. 소식지에 싣지 않은 고급 정보는 황제에게만 보고했던 것이다.

제9조에서는, 비밀 보고서를 쓸 때 붓을 이용하지 말고 화학 비사법을 활용하라고 했다. 화학적 방법으로 종이에 문자를 찍어서, 얼른 보면 백지처럼 보이게 하라고 했다. 비밀 정보기관의 분위기를 물씬 풍겼던 것이다.

제국익문사는 국내 파트와 국외 파트로 활동했지만, 중점을 둔 것은 대일 정보활동이었다. 비밀리에 수집해야 할 사항을 열거한 부분에서도 일본에 관한 게 가장 많다.

일례로 제5조에서는 일본군 장교들의 이동, 일본 상인들의 불법행위, 일본 조선협회의 동정, 일본인 소유의 한성신보사 비밀 활동 등을 탐지하도록 했다. 제6조에 따르면, 심지어는 국내 거주 일본인 중에 특별한 일 없이 노는 사람들까지 철저히 조사하도록 했다. 서울대 국사학과가 1997년 발행한 <한국사론> 제38권에 실린 이태진 교수의 논문 '제국익문사 비보장정: 대한제국 황제 직속 항일 정보기관 규정집'에 이런 대목이 있다.

"특별히 일본인 및 일본 기관을 지칭한 사항이 10개에 달하는 것은 정탐의 주 목적이 일본·일본인에 대한 경계에 있었던 것을 말해준다. 다시 말하면, 이 기구는 대한제국 황제정과 경제질서에 대한 일본의 침투를 저지하기 위한 역정보 획득을 위해 설립된 기구였다고 할 수 있다."

제국익문사, 여론 형성 위해 소식지 활용

이명박 대통령은 동족을 상대로 뭔가를 하기 위해 국정원을 악용했다. 이에 비해 이명복 황제는 주로 일본의 침략을 막을 목적으로 비밀 정보기구를 운영했다. 물론 그렇다고 고종 황제가 다 잘했다는 것은 아니다. 나라를 잃은 책임은 어떤 경우에도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이명복은 정보기구 운용이란 측면에서 이명박처럼 비열하게 행동하지는 않았다.

이명복 황제는 정보기구가 첩보 수집뿐 아니라 여론 형성에도 개입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 점에서는 이명박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 그렇게 할 것인가 하는 방법론에서는 확연히 달랐다.

이명박 정권 하의 국정원은 오피스텔 같은 곳에서 은밀하게 댓글 공작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국민 혈세도 많이 새나갔다. 국정원 직원뿐 아니라 민간인들까지 댓글 공작에 끌어들이고 활동성과에 따라 돈을 지급했다. 꽤 많은 숫자의 민간인이 동원됐다는 보도도 있었다.

이명복 황제는 그런 은밀한 방법은 쓰지 않았다. 밤중에 남몰래 길에다 벽보를 붙이거나 허위 선전물을 민가나 관청에 집어넣는 따위의 일을 시키지는 않았다. 실제로 그런 일을 시켰을 수도 있지 않느냐고 말할 수 있지만, 제국익문사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았던 듯하다.

<제국익문사 비보장정>은 일반에 공개된 게 아니라, 내부에서만 회람되는 비밀 규정이었다. 따라서 여론을 의식해, 좋은 내용만 비보장정에 담을 이유가 없었다. 이들의 활동은 비보장정 범위 안에서 이루어졌다고 봐도 무방할 듯하다. 

비보장정에서는 여론 형성을 위해 소식지를 활용할 것을 규정했다. 제16조 및 제20조에서는 민간과 관청을 상대로 소식지를 유상으로 배포하라고 했다. 공개적인 소식지를 배포하되, 돈을 받으라고 했다. 이명박 시대의 국정원처럼 은밀한 방법을 쓰지도 않고 국고를 축내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게 있다. 여론 형성의 주 목적이 일본 침략을 막는 데 있었다는 점이다. 제국익문사는 탐지된 정보를 바탕으로 외부 소식지를 만들었다. 그런데 정보수집이 주로 일본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소식지에 담길 내용도 주로 일본에 관한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명박 정권처럼 소수 집단의 이익을 위해 여론조작을 한 게 아니라, 나라를 지킬 목적으로 여론 형성에 나섰던 것이다.

물론 그렇게 했지만, 결국엔 나라를 지키지 못했다. 그런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일본의 침략을 막을 목적으로 비밀 정보기구를 운영했다는 점, 또 은밀하고 유치하지 않은 방법으로 정보활동을 했다는 점만큼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런 면에서 이명복과 이명박의 정보활동은 결이 달랐다.

질적으로 차원이 다른, 이명복과 이명박

<시사인> 주진우 기자의 <주진우의 이명박 추격기>에 따르면, 주진우 기자가 일명 '국정원 부원장'으로 통했던 이병채씨(원세훈의 부인)에게 전화를 걸어 "전 국민이 원세훈 원장이 댓글 부대를 창설해서 댓글 달라고 했다고 알고 있는데요"라고 말하자 '부원장'은 몇 마디 말을 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잘못된 언론이 보도를 잘못하고 있는 것이고요. 상식적으로 될 수 있는가를 살펴보시면 아실 거예요."

국정원의 댓글 공작이 상식적으로 있을 수 있는 일인가 하는 말이었다.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말이었다. 남편 원세훈의 혐의는 부인하면서도, 댓글 공작 자체는 비상식적인 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이명복 황제의 제국익문사가 그런 몰상식한 일을 했다면, 일제강점기 때 그것이 어떻게든 드러났을 것이다. 일본은 조선왕조와 대한제국을 어떻게든 폄하하려 했다. 그랬기 때문에 제국익문사가 비열한 짓을 했다면, 그런 사실이 일제강점기 때 공개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제국익문사가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명복과 이명박의 정보기관 운용은 그래서 차원이 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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