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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매일 이용하는 교통, 그리고 대중교통에 대한 최신 소식을 전합니다. 가려운 부분은 시원하게 긁어주고, 속터지는 부분은 가차없이 분노하는 칼럼도 써내려갑니다. 교통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전하는 곳, 여기는 <박장식의 환승센터>입니다. [기자말]
'산업역군' 8000호대 전기기관차가 옛 태백선 송학역 일대를 지나는 모습.
 '산업역군' 8000호대 전기기관차가 옛 태백선 송학역 일대를 지나는 모습.
ⓒ 박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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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철도 역사에서 중요한 차량을 꼽으라면 어떤 차량을 꼽을 수 있을까. 2004년 개통해 전국이 하루에 연결되는 시대를 연 KTX의 첫 번째 차량을 생각할 수도 있고, 서울과 부산의 거리를 4시간으로 좁힌 새마을호 동차 차량을 떠올린다면 '아저씨'라는 우스갯소리를 들을 수도 있을 테다.

하지만 한국 철도역사에서 이 차량을 빼놓을 수 없다. 대한민국 역사 상 첫 번째 전기기관차이자, 1972년 도입된 이후 무려 50년이라는 세월 동안 한국의 산업철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 온 이 기관차가 있기 때문이다. KTX, 그리고 수도권 곳곳의 전철 노선을 누비는 전동차의 까마득한 대선배인 셈이다.

단양에서 생산된 시멘트는 이 기관차의 뒤에 실려 서울의 건설현장으로 향했고, 태백 철암에서 캐낸 석탄도 이 기관차에 이끌려 전국 곳곳으로 향해 겨울밤을 밝히는 역할을 했다. 한국 철도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 기관차의 이름은 '8000호대 전기기관차'다. 

산업의 발전, 절실해진 '강한 철도'의 힘

1960년대부터 한국은 산업 발전에 큰 힘을 쏟았다. 철도도 예외는 아니었다. 건설현장에 필요한 시멘트를 얻을 수 있는 중앙선, 영동선 등 노선의 중요성이 커졌고, 광복 이후 처음으로 개통한 간선철도 노선인 태백선은 험준한 태백산맥을 뚫고 석탄이 있는 태백, 그리고 영동을 향해 동진을 거듭해나가고 있었다.

한국 산업에 이들 노선의 역할은 막중했다. 당시에는 강원도 삼척 일대에서 나는 석탄이 전기를 생산할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수단이었고 난방을 위한 역시 유일한 수단이기도 했다. 산업의 토대가 될 무엇인가를 지으려면 석회석, 즉 시멘트의 힘이 필요했다. 공교롭게도 시멘트 역시 태백산맥 초입의 험준한 곳에서 많이 났다.
 
태백 철암역 구내에 있는 석탄을 고르는 시설, 선탄시설의 모습. 석탄은 1970년대 경제발전에 있어 필요한 '검은 쌀' 역할을 했다.
 태백 철암역 구내에 있는 석탄을 고르는 시설, 선탄시설의 모습. 석탄은 1970년대 경제발전에 있어 필요한 '검은 쌀' 역할을 했다.
ⓒ 박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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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석탄이며, 석회석이며 무거운 짐을 싣고 달릴 기관차가 마땅치 않았다. 증기기관차가 1960년대를 지나며 퇴역했다지만, 미국 국제협력처의 도움을 받아 도입한 디젤기관차도 그리 성능이 좋지 못했다. 당시 한국의 주력 디젤기관차인 대형 디젤기관차의 출력은 1650마력. 요즈음의 대형 트럭 세 대를 합친 정도에 불과했다.

급경사가 심한 험준한 지형을 돌파하는 태백선과 영동선을 지나려면 당시의 기관차로는 사고 위험 그리고 출력 부족이라는 이유 탓에 많은 화차를 연결할 수 없었다. 철도청은 1967년 험지 노선에 투입할 목적으로 6200호대 디젤기관차를 도입했지만, 큰 몸집에 비해 성능은 여전히 부족했다. 결국 새로운 방안이 필요했다.

공사를 서둘러야 할 이유도 생겼다. 1967년 3월 18일 <매일경제>의 보도에 따르면 철도 수송력의 악화로 인해 화물의 적체 현상이 심각해지고 있는 데다, 화차가 웃돈을 받고 거래되는 등 이에 따른 폐단도 생겨났다고 전해진다. 수송량은 증가하는데, 이를 모두 받치고 있던 철도 수송 능력의 부족이 가시화된 것이다.

당시 정부와 철도청에서는 복선화와 전철화를 두고 고민했다. 복선화를 하면 건설비가 높아지지만, 기존의 차량을 활용해 더욱 나은 수송량을 만들 수 있었다. 전철화는 건설비가 비교적 적게 들지만 전기철도에 맞는 인프라, 즉 발전소와 변전소, 그리고 전기기관차 등을 구축하는 비용이 필요하다.

결국 정부는 전철화로 가닥을 잡았다. 한국에서 전기로 가는 열차는 일제강점기 기간 10년 정도 다녔던 금강산 관광철도, 그리고 각 서울·부산 등에서 운행했던 전차 정도에 불과했던 시절이었다. '대동맥' 취급을 받는 경부선이 아닌 산악 지형을 꼬불꼬불 오가는 철도에 값비싼 전기 철도의 인프라를 만든 것이다. 당시 중앙선과 영동선, 태백선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디젤 기관차 세 배의 힘... '산업역군' 기관차의 등판
 
태백선, 중앙선, 그리고 영동선 일대는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을 그대로 돌파하는 지형 탓에 열차 운행에 어려움을 겪었다. 사진은 중앙선 죽령 인근.
 태백선, 중앙선, 그리고 영동선 일대는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을 그대로 돌파하는 지형 탓에 열차 운행에 어려움을 겪었다. 사진은 중앙선 죽령 인근.
ⓒ 박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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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1968년 중앙선과 태백선, 그리고 영동선에 대한 전철화 계획을 발표한다. 디젤기관차에 비해 전기기관차의 유지비가 저렴하고, 복선화 공사비용에 비해 세 배나 저렴한 전철화의 비용은 개발도상국이었던 대한민국에게는 매력적인 옵션이었다. 그렇게 1969년 세 노선에 대한 전철화 공사가 시작되었다. 

전철화 공사에 따른 비용이 문제였다. 당시로서는 높은 전철화 공사비를 투입하기 위해 정부는 영국, 프랑스, 독일, 그리고 벨기에 등 유럽공동차관단으로부터 5천 7백여만 달러 규모의 차관을 빌렸다. 그런데 이 차관의 액수 중 반이 넘는 액수가 전기기관차 도입에 따른 현물 차관이었다. 

산업선을 누빌 66량 규모의 전기기관차가 그렇게 수주되었다. 자연스럽게 차관을 빌린 국가의 전기기관차를 도입하는 것이 확정된 상황. 한국 땅을 밟을 전기기관차는 자연스럽게 프랑스의 알스톰이 도입하는 것으로 정해졌다. 알스톰은 프랑스와 벨기에에서 전기기관차를 나누어 생산했다.

그리고 1972년 3월 16일, 부산항에 입항한 프랑스 선적의 배에서 선이 굵은 기관차 여섯 대가 내려졌다. 처음으로 한국 땅을 밟은 전기기관차는 스펙부터가 남달랐다. 화물을 최대 1천 7백여 톤이나 끌 수 있었고, 힘은 5300마력 남짓에 달했다. 디젤기관차 세 대가 겨우 해내는 일을 유럽에서 온 전기기관차 한 대가 하는 셈이다.

전기기관차를 한국에서 운행케 하기 위한 만반의 노력도 이어졌다. 전기기관차가 견인할 화물열차는 필시 긴 길이를 가졌을 터였다. 그런 장대만한 열차가 원활히 운행하기 위해서는 마주오는 열차를 비껴갈 수 있는 교행역을 늘려야 하고, 기존 역의 교행 선로 역시 길이를 길게 늘여야 했다. 

그렇게 1973년 6월 20일, 청량리에서 제천까지의 중앙선 전철이 개통되었다. 박정희 대통령, 김신 교통부장관 등 당대 정권의 실세가 참가한 행사였지만, 이 개통행사의 진짜 내빈은 외채를 투입하는 곡절 끝에 한국 땅을 밟은 8001호 전기기관차였다. 이날 오전 11시 15분에는 정부 수립 이후 첫 번째 '전기기관차 견인 열차'가 내빈을 태우고 제천으로 향했다.
 
1973년 청량리역에서 열린 중앙선 전철 개통식. 이 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 김신 교통부장관과 어깨를 나란히 한 것은 8001호 전기기관차였다.
 1973년 청량리역에서 열린 중앙선 전철 개통식. 이 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 김신 교통부장관과 어깨를 나란히 한 것은 8001호 전기기관차였다.
ⓒ KTV 대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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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이날 개통식에서는 8000호대 전기기관차가 제천에서 서울까지 무려 서른 다섯 량의 화차를 끌고 올라가는 진풍경을 보이기도 했다. 석탄과 시멘트 등 산업화에 필요한 물자가 원활히 공급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차력쇼였던 셈이다. 특히 이 화물열차는 디젤기관차가 골골대며 올랐던 치악산 고갯마루도 한달음에 올랐다. 개통식에 참석한 이들은 이 모습을 보며 전기기관차의 힘을 실감하지 않았을까.

사고로 완파되었지만... 재생해야만 했던 '아픈 과거'

8000호대 전기기관차는 한국 철도의 새로운 얼굴이 되었다. 1974년에는 태백선의 전철화가, 1975년에는 영동선의 전철화가 완료되며 운행 구간도 늘어났다. 특히 1976년에는 알스톰 사의 라이선스를 바탕으로 대우중공업이 전기기관차 국내 생산을 시작하며 한국 철도사의 자랑스러운 한 페이지를 장식하기도 했다. 

아픈 과거도 있었다. 태백선 전철화 직후인 1975년에는 화물열차가 정선군 소산천철교 위에서 탈선해 13m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탈선 사고가 일어났다. 이 사고로 기관사 3명이 사망하고, 8000호대 전기기관차 두 대가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파괴되는 대형 사고가 벌어졌다.

하물며 안에서 사람이 죽은 데다, 차량의 하부를 지지하는 언더프레임까지 손상된 터라 어지간하면 이 차량은 폐차하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외채를 써 어렵게 도입한 새 기관차였기에 철도청은 이 열차를 완벽히 재생시켜야 했다. 대파된 기관차를 이전에 가까운 모습으로 다시 만들어야 한다는, 이전에 없었던 어려운 과제였다.

하지만 3년 간의 노력 끝에 서울공작창에서 1979년 1월 기관차를 재생하는 데 성공했다. 국내에서 생산되는 부품 등을 활용해 새 기관차처럼 만든 노력이 묻어났다. 한국의 철도 정비단에서 처음으로 기관차 재생을 성공한 사례로 남게 되었다. 이렇게 재생된 기관차는 2014년까지 긴 세월을 운행한 뒤 퇴역했다.

이렇듯 어느 철도 차량보다도 소중했던 이 전기기관차, 그런 '만능 쓰임새'에 걸맞게 8000호대 전기기관차는 1990년대까지 무려 94량이 도입되어 운행했다. 충북선 등 다른 노선의 전철화가 완료되면서 8000호대 전기기관차 본래의 임무였던 화물은 물론 새마을호나 무궁화호 등 여객열차를 견인하는 역할도 수행했다.

8000호대 전기기관차가 한국 교통에 끼친 영향은 컸다. 청량리-제천 구간의 전철화만으로도 연간 380만 톤 규모의 화물을 추가로 운송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그 화물이 현대 한국을 지탱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재료인 '회색 쌀' 시멘트, 그리고 '검은 쌀' 석탄이라는 데에서, 한국의 경제 발전 한 축을 지탱한 '철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전기철도 기반 된 차량... 다음 철도의 날에는 문화재 지정되길
 
8000호대 전기기관차는 한국 철도의 발전기를 상징하는 유물이다.
 8000호대 전기기관차는 한국 철도의 발전기를 상징하는 유물이다.
ⓒ 박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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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역군'으로 불렸던 8000호대 전기기관차의 도입 이후에도 전기기관차에 대한 수요는 점점 늘었다. 철도청은 여객을 수송하기 위한 기관차인 8100호대와 8200호대를 국내 생산한 데 이어, 국내 생산 전기기관차인 8500호대 역시 도입해 현재까지 운행하고 있다. 

특히 8000호대 전기기관차가 '전기철도'의 길을 연 덕분에 영동선과 태백선에서는 전기로 운행하는 무궁화호, 국산 우등 전기동차가 1980년 운행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최초로 운행된 우등 전기동차는 현재 전국을 누비는 ITX-새마을, 그리고 지금 중앙선 일대를 누비는 KTX-이음으로 이어지는 한국 철도 역사의 계보로 이어진다.

현재 8000호대 전기기관차는 대부분의 편성이 열차의 수명을 초과해 폐차되었다. 현재는 8091호부터 8094호까지, 1990년 마지막으로 도입한 4개 차량이 8000호대의 '고향'인 영동선 일대를 누비고 있다.

6월 28일, 한반도의 첫 철도 기관인 철도국이 세워진 지 129번째 해를 맞이하는 날인 '철도의 날'을 맞아 8000호대 전기기관차의 이야기를 돌아보았다. KTX는 커녕 증기기관차마저 기적을 멈춘 지 얼마 되지 않던 때, 특유의 송풍구 소리로 한국의 굽이진 산야를 누비었던 '만능 열차'로서의 의미가 무엇보다 크다.

단 하나 아쉬운 점이 있다면 한국철도공사의 철도기념물로 보존되고 있는 8001호의 지위다. 대한민국 역사상 첫 번째 전기기관차로서 갖는 의의에도 불구하고 아직 문화재 등으로 지정되지 않은 것이 아쉽다. 법적 구속력이 없는 철도기념물이기에 보존에 대한 문제가 언제 불거질지 모른다.

그간 철도의 날은 연례적인 행사만 이어진 경우가 많았다. 내년 철도의 날은 그 역사에 걸맞게 철도의 역사에 대해 더욱 조명하고, 관련된 유산의 보존이 이루어지는 계기가 되는 날이 되길 바란다.

태그:#철도 역사, #전기기관차, #산업철도, #8000호대 전기기관차, #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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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교통 기사를 쓰는 '자칭 교통 칼럼니스트', 그러면서 컬링 같은 종목의 스포츠 기사도 쓰고,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도 쓰는 사람. 그리고 '라디오 고정 게스트'로 나서고 싶은 시민기자. - 부동산 개발을 위해 글 쓰는 사람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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