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초록색 사람이 뛰어가는 모습의 비상구 유도등은 일상 속에서 끊임없이 마주하게 되는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안전시설이다.

비상구 유도등은 화재나 지진 발생 시 연기 속에서 사람들을 비상구로 안내하고, 정전 시에도 1시간 이상 예비전원으로 작동하는 '생명의 빛'이다. 2003년 대구지하철 화재 참사 당시, 일부 생존자는 짙은 연기로 가득찬 어둠 속에서 비상구 유도등 불빛을 보고 나올 수 있었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재난 상황 속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안전시설인 비상구 유도등이 실제 비상상황에서 사람들에게 혼란을 줄 수 있다는 문제가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화살표 없는 비상구 유도등, 혼란 일으켜
  
별도의 화살표 없이 그림문자만 표시된 유도등이다. 비상문 바로 위에 설치되어 비상문의 위치를 나타내지만, 그림문자의 사람이 뛰어가는 방향을 대피 방향으로 오해받기도 한다.
 별도의 화살표 없이 그림문자만 표시된 유도등이다. 비상문 바로 위에 설치되어 비상문의 위치를 나타내지만, 그림문자의 사람이 뛰어가는 방향을 대피 방향으로 오해받기도 한다.
ⓒ 정재성

관련사진보기

  
비상구 문 바로 위에 설치되어서 비상구의 위치를 알리는 비상구 유도등(위 사진)은 화살표 없이 뛰어가는 사람 모습만 그려져 있는 형태이다. 

별도의 화살표가 없어서 일명 '무방향 유도등'이라고도 불리며 "이곳에 비상구가 있으니 전방으로 대피하세요"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무방향 유도등은 방향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비상구 문의 위치를 나타내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유도등의 그림문자 속 녹색 사람이 왼쪽으로 뛰어가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보니 재난 시 정전 등으로 시야가 전혀 확보되지 않을 경우, 유도등 속 사람이 뛰어가는 방향인 왼쪽을 대피 방향으로 오해하여 비상구를 바로 앞에 두고 왼쪽으로 대피할 수도 있다.

2013년 5월, SBS 뉴스는 관련 내용을 보도하며 국내 한 대학 연구팀과 진행한 실험 결과를 보여 주었다. 실험은 단순한 구조의 어두운 세트장에서 무방향 유도등을 보고 비상구를 찾는 실험이었다. 하지만 실험 참가자 67명 가운데 41명이 비상구를 제대로 찾지 못하는 결과가 나왔다. 절반 이상의 사람들이 무방향 유도등의 의미를 오인한 셈이다.

무방향 유도등을 사람이 뛰어가는 방향으로 대피해야 한다고 잘못 이해하는 것은 시민들 뿐만이 아니었다. 지난 2016년, 문화체육관광부는 정책브리핑 웹사이트에 비상구 유도등 그림문자의 사람이 뛰어가는 방향이 대피 방향이라는 잘못된 내용을 담은 카드뉴스를 게재하여 비판받은 적이 있다. 유도등 속 그림문자의 사람이 뛰어가는 방향은 대피방향과 무관함에도 오류를 범한 것이다.

비상구 유도등은 누구나 사전 지식 없이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하지만 그 의미를 정부 부처에서 내놓은 정책브리핑에서조차 오인한 것이다.

비상구 위 유도등에 화살표 표시한 유럽
  
유럽 국가들은 비상문 바로 위에 설치되는 비상구 유도등에는 아래쪽 화살표를 표시하여 유도등 아래 비상구를 정확히 가리키도록 규정하고 있다.
 유럽 국가들은 비상문 바로 위에 설치되는 비상구 유도등에는 아래쪽 화살표를 표시하여 유도등 아래 비상구를 정확히 가리키도록 규정하고 있다.
ⓒ 정재성

관련사진보기


과연 해결 방법은 없는 것일까? 유럽 국가들의 비상구 유도등을 보면,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여러 유럽 국가는 모든 비상구 유도등에 다양한 화살표를 함께 표시하여 혼란을 예방하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비상구 문 바로 위에 설치된 비상구 유도등에는 사람이 뛰어가는 모습의 그림문자와 함께 아래쪽 화살표를 넣어서 유도등 바로 아래의 문을 가리키도록 하고 있다. 독일에서도 아래쪽 화살표가 포함된 비상구 유도등을 쉽게볼 수 있다.

비상구 문 바로 위의 유도등이 화살표로 바로 아래의 문을 가리키고 있어서 긴급 상황에서 혼란이 발생할 가능성이 적고, 누구나 쉽게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이 외에도 직진이나 대각선 화살표 등 다양한 화살표를 비상구 유도등에 함께 표시하여 긴급 상황 시에 비상구로 대피할 수 있는 방향을 명확하게 안내하고 있다.

좌우 화살표 제품만 있는 국내 비상구 유도등
  
왼쪽이나 오른쪽 화살표는 있지만, 아래쪽 화살표가 있는 제품은 찾기 어렵다.
 왼쪽이나 오른쪽 화살표는 있지만, 아래쪽 화살표가 있는 제품은 찾기 어렵다.
ⓒ 정재성

관련사진보기



국내에서 생산 중인 유도등 중에도 화살표가 있는 제품은 많다. 하지만 왼쪽이나 오른쪽 화살표가 있는 제품만 존재하다 보니, 왼쪽이나 오른쪽에 비상구가 있는 경우에만 정확한 방향을 표시할 수 있다.
   
국내에서는 유럽 국가들과 같은 아래쪽 화살표가 있는 유도등은 찾을 수 없다. 결국 현 상황에서는 비상구 문 바로 위에는 화살표가 없는 무방향 유도등을 설치할 수밖에 없다.

비상구 유도등의 제품 인증과 제작에 관련된 법률인 '유도등의 형식승인 및 제품검사의 기술기준' 제9조 제1항은 비상구 식별이 용이하도록 유도등에 그림문자와 함께 화살표를 표시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필요 시 화살표를 함께 표시할 수 있다는 법령일 뿐, 모든 비상구 유도등에 화살표가 의무적으로 표시되어야 한다는 법령은 아니다. 결과적으로 화살표를 모든 비상구 유도등에 의무적으로 표시하도록 법령에 명시하지 않으면서 화살표 없는 비상구 유도등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화재 등 재난 시 연기와 정전으로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상황에서 비상구 유도등은 유일한 생명줄이 되어준다. 비상구 유도등은 누구에게나 별다른 사전지식 없이 직관적으로 그 의미가 인식될 수 있어야 하며,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그것은 '안전시설'이라고 불릴 수 없다.

안전에 관련된 법은 구체적으로 세세하게 규정하여 허점이 없도록 해야 한다. 하루빨리 관련 규정을 개정하고 국내에도 누구나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비상구 유도등이 도입되어야 한다.

태그:#비상구유도등, #화재안전, #무방향유도등, #소방안전, #안전불감증
댓글3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더 안전하고 인권이 존중되는 세상을 원하는 시민기자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