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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재판'이 진행될 수도 있는 법정 안팎의 내밀한 모습을 '시끌법정'에서 보여드립니다. [편집자말]
 '피해자다움' 따지는 법원에 의해 여성들의 목소리가 묻히고 있다.
 유독 성범죄 피해자를 향해 "당해도 되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하는 이들이 많다.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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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독일로 출장을 갔습니다. 일정을 마친 후 카페의 야외 테이블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는데, 갑자기 통역사가 손사래를 치더군요. 테이블에 놓인 제 휴대폰을 보며 "어서 주머니에 넣으세요"라면서요.
 
그분 말에 따르면, 한국처럼 공공장소에서 소지품을 허술하게(?) 놔둬도 되는 나라가 몇 없답니다. 웬만한 유럽 국가의 분위기는 다르다는 거죠. 별 생각 없이 테이블에 휴대폰을 올려두거나, 벤치에 가방을 놔두면 도난당할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하긴, 그 말을 듣고 나니 여러 지인의 '소매치기 여행담'과 '돈은 여러 가방에 나눠서 보관하고' 등이 적힌 패키지여행 주의사항이 떠오르더군요.
 
하지만 아무리 이런 분위기의 나라라고 해도 피해자를 '소매치기 당해도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테이블에 놓인 제 휴대폰을 누군가 훔쳐갔다고 가정해볼까요. 검거된 범죄자가 '저 사람이 마치 가져가란 듯이 테이블 위에 휴대폰을 올려뒀다'라고 변명한다면, 어느 나라의 판사든 그를 미친 사람으로 생각할 겁니다. 소매치기를 당해도 되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마찬가지로 살인을 당해도 되는 사람도, 폭행을 당해도 되는 사람도 없습니다. 법치주의 아래에서, 우린 기본적으로 이런 생각을 공유하며 살아갑니다.
 
"짧은 치마를 입고..."
 
그런데 유독 성범죄 피해자를 향해 '당해도 되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최근 취재 중인 재판에선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카메라가 내장된 시계를 일반 시계인 것처럼 속여 지인의 방에 설치했다가 1심에서 징역 10월을 선고(성폭력범죄의처벌등에관한특례법 위반, 카메라등이용촬영)받은 피고인의 2심 첫 재판이었습니다. 최후변론을 요구하는 판사 앞에서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이렇게 말했습니다.
 
"피해자에게 마음의 상처를 줬습니다. 또한 가족을 책임져야 할 부모로서 처와 자식들에게도 상처를 줬습니다. 피해자와 가족들에게 속죄하는 마음으로 평생 최선을 다해 살아갈 것입니다. 피해자의 피해 회복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염치없지만 용서를 빌고 싶습니다."
 
그런데 피고인이 1심의 형량이 너무 과하다며 제출한 항소이유서엔 아래와 같은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피해자에게 용서를 빌고 싶다"는 피고인의 말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입니다.
 
"피해자 또한 어떠한 의도였는지 모르겠지만 피고인 앞에서 서슴없이 옷을 갈아입거나 짧은 치마를 입고 다리를 벌리며 함께 앉는 등 피고인에게 어떠한 거리낌도 없이 행동을 하였습니다."
 
항소이유서를 작성한 변호인은 이처럼 피해자의 행실을 평가한 뒤 피고인과 피해자가 동업자였다는 점을 거론하며 두 사람의 '친분관계'를 강조했습니다. 카메라가 내장된 시계를 피해자의 방에 설치한 이유도 '동업재산 처분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입니다.
 
"피고인은 촬영 과정에서 피해자가 옷을 갈아입거나 속옷을 입고 생활하는 등의 장면이 촬영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기는 하였지만, 평소 피해자가 피고인 앞에서 서슴없이 옷을 갈아입고 속옷을 노출하였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될 것이라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불법촬영 피해자 A씨.
 불법촬영 피해자 A씨.
ⓒ 소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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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욕≠성범죄 욕망
 
이러한 항소이유서와 마주한 피해자는 억울함에 가슴을 칩니다. 기자와 만난 피해자는 "피고인 측이 주장하는 행동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내용이 항소이유서에 담겨 있다는 것 자체가 매우 불쾌하다"고 말했습니다. "왜 꼭 성범죄가 일어나면 '여자가 문란하네', '여자가 꽃뱀이네' 이런 식의 이야기가 오가는지 모르겠다"는 겁니다.
 
성범죄에 있어서 피해자를 탓하는 문화는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닙니다. 최근 공분을 산 '텔레그램 대화방 성착취 사건(이른바 n번방 사건)'을 두고도 '피해자 탓'을 이야기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SNS에서 '일탈계' 운영하던 이들 중 여러 명이 성착취 피해자로 확인됐는데, 곳곳에서 '피해자들도 당할 만했다'는 식의 반응이 나오고 있는 겁니다.
 
일탈계는 익명의 운영자가 자신의 몸을 찍어 SNS에 올리는 '일탈 계정'을 의미합니다. 조주빈 등 n번방 사건의 핵심 피의자들은 이들에게 접근해 신상정보를 알아낸 뒤, 이후 '주변에 알리겠다'고 협박해 성착취를 일삼았습니다.
 
테이블에 휴대폰을 올려둔 제가 소매치기를 당해도 싼 사람이 아니듯, 일탈계를 운영한 피해자들 역시 성범죄를 당해도 싼 사람이 아닙니다. 하지만 전자는 당연한 것처럼 생각해도, 후자는 그렇지 않게 생각하는 이들이 많아 보입니다. 이에 일침을 가하는 한 현직 판사의 말입니다.
 
"성범죄는 실수도 아니고, 성욕의 발현도 아닙니다. 성욕이 성범죄 욕망과 동일시 돼서도 안 됩니다. 성범죄는 타인을 억압하는 폭력입니다. 때문에 피해자로 인해 성범죄가 일어날 수 있다는 인식은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됩니다."
 
정조의 망령
 
형법 32장의 명칭은 '강간과 추행의 죄'입니다. 그런데 25년 전만 해도 지금과 달랐습니다. 1995년 개정되기 전까지 형법 32장의 명칭은 '정조에 관한 죄'였습니다. 국어사전에 나온 정조의 뜻은 '여자의 곧은 절개'입니다.
 
죄의 명칭은 바뀌었지만 여전히 우리는 '정조의 문화'에 갇혀 있는 듯합니다. 현행법상 강간죄가 성립하려면 '폭행 또는 협박'이 전제돼야 하는데, 이를 판단하기 위해 '피해자가 얼마나 강하게 저항했는지'를 고려하곤 합니다. '정조를 깨뜨리는 것'을 처벌해왔기 때문에 여성이 '곧은 절개'를 증명해야 피해자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겁니다. 이는 성범죄를 당해도 되는 사람과 당해선 안 되는 사람을 구분하는 행위입니다.
 
한국성폭력상담소의 상담 내역을 보면 "경찰이 '27살이나 된, 직장 잘 다니던 여자가 어떻게 강간을 당하냐, 꼬신 거 아니냐'라고 조롱했어요", "검사가 진술서를 써오라고 해서 검찰에 갔더니 '속옷을 입었습니까, 안 입었습니까' 이런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했어요" 등의 내용이 수두룩합니다. 법원도 이에 뒤지지 않습니다. 2018년 백혜련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공개한 어느 판사의 발언은 사뭇 놀랍습니다. 심지어 그는 성폭력전담재판부 판사였습니다.
 
"개인적으로 여성이 술을 마시고 성관계를 맺는 게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본다." - 2016년 8월 18일 서울서부지방법원 판사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장은 자신의 논문 <성폭력 2차 피해를 통해 본 피해자 권리>(2012)에서 이러한 분위기를 "'정조에 관한 죄'의 망령"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실제로 안희정 전 충남지사 성폭력 사건의 1심 재판부가 피해자에게 '정조'를 거론한 것이 폭로돼 문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두 법안, 그리고 상식
 
 부산고등법원 팡원재판부가 '계부에 의한 성폭력 사건'의 가해자에 대해 일부 무죄로 형을 낮춰주는 선고를 한 가운데, 경남여성복지상담소.시설협의회를 비롯한 여성단체들은 비가 내리는 속에 2일 오전 창원지방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항소심 강감 무죄 판결 규탄, 엄중 처벌"을 촉구했다.
 경남여성복지상담소·시설협의회 등 45개 여성단체가 지난해 9월 2일 오전 창원지방법원 앞에서 계부에 의한 성폭력 사건 항소심 강간 일부 무죄 판결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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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4월 대법원에선 의미 있는 판결이 나왔습니다. 대법원 판결문에 처음 '성인지 감수성'이란 말이 담긴 것입니다. 학생을 성희롱했다는 이유로 해임된 대학교수가 이에 반발해 소송을 냈는데, 대법원 2부(주심 권순일 대법관)는 "법원이 성희롱 관련 소송의 심리를 할 때는 성차별 문제를 이해하고 양성평등을 실현할 수 있도록 성인지 감수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라며 2심 판결을 뒤집었습니다.
 
뒤집힌 2심 판결 곳곳에선 '피해자 탓'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성희롱 사례 중 하나였던 백허그가) 수업 중에 일어났다고 상상하기 어렵고 피해자가 익명 강의평가에서도 관련 언급을 하지 않았다", "(볼에 입맞춤을 당했다는 피해자의 경우) 다른 피해자가 권유하거나 부탁하지 않았더라면 과연 한참 전의 행위를 비난하거나 신고하려는 의사가 있었을지 의심스럽다" 등이 그것입니다.
 
6개월 후인 2018년 10월에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친구의 아내를 강간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피고인이 1, 2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는데, 대법원에서 이를 뒤집은 겁니다.
 
1심은 "(모텔 주차장 CCTV 모습이) 강간 피해자의 모습이라고 보기에 지나치게 자연스럽다"고, 2심은 "(피고인이 머리를 때리고 침대로 집어던졌다는) 피해자의 진술에 일관된 측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피해자 항거가 불가능하게 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돼 간음에 이른 것인지 의문이 든다"고 판결했습니다. 이 역시 '피해자 탓'에 방점을 둔 판단입니다.
 
하지만 대법원 1부(주심 박정화 대법관)는 "성폭행 피해자가 처해 있는 특별한 사정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음으로써 성폭행 사건을 심리할 때 요구되는 성인지 감수성을 결여했다는 의심이 든다"라며 하급심 판결을 뒤집었습니다(안타깝게도 1, 2심 판결 후 피해자 부부가 억울함을 호소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후였습니다). 
 
 no means no
 no means no
ⓒ fli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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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를 탓하는 정조의 망령을 걷어버리기 위해 그 동안 곳곳에서 여러 논의가 진행돼왔습니다. 그 중 '비동의간음죄'와 '강간피해자보호법' 제정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그 동안 몇몇 국회의원에 의해 발의됐으나 결국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한 법안들입니다.   

비동의간음죄는 '피해자의 저항을 성폭력 판단의 기준으로 삼으면 안 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습니다. 이는 거부 의사에도 성관계를 할 경우 처벌하는 '노 민스 노 룰(No Means No Rule)', 더 나아가 명백한 동의 없이 성관계를 할 경우 처벌하는 '예스 민스 예스 룰(Yes Means Yes Rule)'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미국·영국·독일 등에선 이미 비동의간음죄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2018년 유엔(UN) 여성차별철폐위원회는 "강간죄 구성 요건을 폭행·협박이 아닌 동의 여부로 판단하라"고 한국 정부에 권고한 바 있습니다.
 
미국에서 시행 중인 강간피해자보호법(Rape Shield Law)은 피해자의 이력 등 사건과 무관한 내용을 수사·재판 과정에서 수집·신문할 수 없도록 엄격히 제한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선 강제력이 약한 대검예규, 형사소송규칙, 변호사윤리장전 등에 관련 내용이 담겨 있지만, 이를 강제할 법은 따로 없는 상황입니다.
 
비동의간음죄와 강간피해자보호법은 '성범죄를 당해도 되는 사람은 없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생각에서 출발합니다. 아니 상식이란 말을 붙이기에도 민망한, 너무도 당연한 생각이 두 법안에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법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돌이켜보면 역사는 '상식의 쟁취'를 반복하는 일이었습니다. 우린 언제쯤 정조의 망령을 쫓아내고 상식을 쟁취할 수 있을까요.

[시끌법정④] 판사의 의미심장한 한마디 http://omn.kr/1mswa
[시끌법정③] '자살할 필요 있냐'는 댓글 http://omn.kr/1msw5
[시끌법정②] 죄명도 후덜덜 범죄단체 재판 http://omn.kr/1mswf 
[시끌법정①] 음주운전 재판서 생긴 일 http://omn.kr/1msw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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