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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성년자 등을 협박해 성 착취물을 찍게 하고 이를 모바일 메신저 텔레그램에서 유포한 혐의로 구속영장이 신청된 20대 남성 A씨가 19일 오후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영장실질심사를 받은 뒤 법정에서 나오고 있다. A씨가 텔레그램에서 유료로 운영한 이른바 '박사방'이라는 음란 채널에는 미성년자 등 여러 여성을 상대로 한 성 착취 영상과 사진이 다수 올려졌다.
 미성년자 등을 협박해 성 착취물을 찍게 하고 이를 모바일 메신저 텔레그램에서 유포한 혐의로 구속영장이 신청된 조주빈씨가 19일 오후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영장실질심사를 받은 뒤 법정에서 나오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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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3월, N번방과 박사방은 한국 여성들의 분노를 터뜨린 뇌관이었다. 1년간 수많은 남성이 텔레그램에서 돈을 지불하고 은밀하게 '성착취'를 관전했다. 보안성이 높은 텔레그램은 이들의 추악한 욕구를 숨기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그 과정에서 미성년자 16명을 포함한 여성 74명의 삶이 유린당했다.
  
23일 SBS 8시 뉴스가 공개한 '박사방'의 운영자 조주빈(25)씨의 모습은 지극히 평범해 보였다. 한 대학의 학보사에서 편집국장까지 맡았던 조씨는 어디에서나 마주칠 수 있을 법한 20대 남성이었다. 그 누구도 조씨가 조직적인 성착취의 주범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없었을 것이다. 악이란 결코 뿔 달린 괴물의 모습을 하고 있지도, 특별한 형상을 띠고 있지도 않다.

최근 많은 친구의 소셜 네트워크 피드를 점거한 것이 'N번방'과 '박사방'이었다.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통해 지인들을 태그하면서 릴레이를 이어가는 이들도 볼 수 있었다. N번방과 박사방 관련자들에 대한 처벌 및 신상 공개를 요구하는 청와대 국민 청원 5건은 500만 명을 돌파했다. 이에 앞서 문재인 대통령은 N번방 회원 전원에 대한 조사를 지시했다.

무엇이 시민들을 이렇게 움직였을까. 동시대를 살아가는 시민으로서 느끼는 죄의식과 부채 의식이 그 기저에 있었을 것이다. N번방과 박사방처럼 여성을 착취하는 강간 문화(Rape Culture)는 예전부터 존재해왔다. (학술적 관점에서 '강간 문화'는 '여성에 대한 남성의 성적인 공격성, 그리고 폭력성을 장려하는 신념의 복잡한 집합체'로 규정된다.) 강간 문화는 가까운 곳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군에 복무하던 시절, 불법 성매매 경험을 자랑하는 이들을 두고도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라고 말하지 못했던 죄의식이 나에게는 여전히 남아 있다. 직장에서 발생하는 성희롱, '국산 야동'이라는 이름으로 소비되는 불법 촬영 동영상, 미투 운동이 밝혀낸 성범죄, 버닝썬 사태에 이르기까지 '강간 문화'는 상황과 시대에 따라 그 형태를 달리해 왔다. 그러나 사회적 공분에 비해 합당한 죄의 대가를 치르는 경우는 극히 적었다. 서지현 검사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N번방과 박사방, 박사와 갓갓은 예견된 범죄였다.

이것은 생존의 문제다
 
'26만 명이라는 숫자는 중복 합계에 불과하다!'
'모든 남자가 그렇지는 않다.'


이러한 사건이 벌어졌을 때, 자신의 억울함을 표현하는 남성들이 있다. 그 반대편에는 '내 옆을 지나가는 남성 중 누가 성착취에 가담했을지 믿을 수 없다'며 공포를 고백하는 여성들도 있다. 자신이 이미 '지인 능욕'의 대상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며 불안해하는 친구도 있었다. 물론 이 사건에 대해 분노의 목소리를 내는 남성들도 많이 있다. 그러나 실존하는 공포 앞에서 '나는 아닌데' 따위의 말은 무용하기 짝이 없다. 여성이 직면하는 공포는 '억울함' 정도와는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당사자가 아닌 이상, 그들의 공포를 무엇이라 규정할 수 없다.

텔레그램 성착취 공동대책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100여 개에 이르는 방 회원 수를 단순 합산했을 경우 그 합계가 26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중복의 경우를 언급하면서 '실제 인원은 26만 명이 아니다'라고 강조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OTT 서비스처럼 텔레그램 계정을 나누어 이용했을 경우를 고려하면, 우리는 정확한 가담자의 숫자를 아직 알 수 없다. 3만 명일 수도 있고, 10만 명일 수도 있고, 26만 명을 상회할 수도 있다. 그러나 숫자가 줄어든다고 해서 실질적 공포의 총량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그 공포의 내용이 무엇인지 살필 필요가 있다.

"Cuz my friends are still 아직도 Be killed, stalked, abused"
- 제이 클레프의 'mama, see' 중


최근 한국 흑인음악계에서 큰 주목을 받는 가수 제이 클레프는 'mama, see'(2019)라는 곡을 통해 여성으로서 느끼는 지점들을 다뤘다. 그는 "내 친구들은 여전히 죽임당하고, 스토킹 당하고, 학대당하고 있다"고 노래했다. 그리고 젠더 폭력에 대한 뉴스들을 두고 "우리네 차례가 아니었을 뿐인 소식들"이라고 말한다. 이 가사처럼, 여성들은 이 사건을 피부로 와닿게 느끼고 있다. 텔레그램에서 벌어진 비극이 생존과 공포의 문제라고 외치고 있다.

괴로워도 목소리 내야 할 이유
   
 23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열린 '텔레그램 n번방 방지법'(개정 성폭력처벌법) 규탄 기자회견에서 참석자들이 디지털 성범죄 근절과 강력 처벌을 촉구하고 있다.
 23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열린 "텔레그램 n번방 방지법"(개정 성폭력처벌법) 규탄 기자회견에서 참석자들이 디지털 성범죄 근절과 강력 처벌을 촉구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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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옹성처럼 서 있는 거악은 우리를 무력하게 만든다. 그런데도 우리는 글을 쓰고 말한다. 시민들이 소리높여 이야기하는 것은 단순하고 명료하다. 여성의 존엄을 짓밟는 세상을 해체하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보자는 것이다. 여러 사람이 목소리를 내면서, 한없이 더딘 역사의 진보를 더 빠르게 만들어보자는 것이다.

최근 한 뮤지션은 '젠더 갈등 조장을 해선 안 된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그러나 얕은 양비론으로는 진보를 이룰 수 없다. 구조적 맥락을 충실히 고민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성 착취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N번방과 박사방에서 자행된 성착취는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인간의 상식 범위를 아득히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정신적으로 지칠 수 있다. 그러나 그 충격에도 고개를 돌리는 사람이 많지 않기를 바란다.

포토라인 앞에 선 조주빈씨는 '악마의 삶을 멈추게 해 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언사를 언론 매체에 담는 것 자체가 낭비라고 생각한다. 경찰은 조씨를 포토라인에 세우더라도, 그에게 마이크를 주지는 말았어야 했다. 우리는 가해자의 목소리를 들을 하등의 이유가 없다. 그의 입에서 창출해낼 수 있는 가치란 아무것도 없다. 그의 서사도, 그의 사연도 필요하지 않다. 가해자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그것은 법정에서 해야 할 것이다. 언론은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담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

뉴스를 통해 공개된 조씨는 많은 이들에게 '악의 얼굴'로 기억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조씨 뿐만 아니라 텔레그램에 숨어든 모든 가해자를 기억해야 한다. 더 나아가 구조화된 강간 문화, 보편화된 여성혐오에 맞서야 한다. 이 사안에 목소리를 내고 관심을 환기하는 투쟁가들과 '선량한 지지자'들이 많을수록 가해자들은 벼랑 끝에 내몰리게 된다. 그들이 여성과 아동을 유린해온 만큼의 공포감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역사의 반환점 위에 서 있다. 그 과정에서 갈등 또한 필요하다면 마다하지 말아야 하겠다. 'N번방과 박사방', 그 이전과 이후는 분명히 달라야 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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