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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 정치인들의 삭발 릴레이가 이어지고 있다. 바른미래당 소속이었다가 지금은 무소속인 이언주 의원, 자유한국당 소속인 박인숙 의원에 이어 16일에는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삭발식을 거행했다.

불교 스님들은 수행 목적 때문에 머리를 깎았지만, 옛날에는 삭발이 이와 전혀 다른 의미를 풍겼다. 삭발이 특수 천민이나 범죄자와 연결될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한국사에서는, 전쟁 포로로 끌려와 향·소·부곡 같은 천민 구역에 배치된 사람들이 삭발을 했던 사례들이 발견된다.

진시황의 진나라에서는 머리카락을 제거하는 곤형(髡刑)이란 형벌이 있었다. 유희경(403~444)이 집필한 일화집 <세설신어>에는 후한(後漢, 한나라의 계승 국가)의 어진 관리인 진식(陳寔, 104~186년)이 부당한 곤형을 받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평판이 좋은 관리가 강제 삭발을 당했으니, 그 자체만으로도 상당한 타격이 됐을 것이다.

그런데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하고 조선왕조의 내정에 간섭한 뒤인 1895년부터는 삭발이 한국인들에게 색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바로 이 '색다른 의미'로 인해 <님의 침묵>의 시인인 만해 한용운이 불의의 죽임을 당할 뻔했던 일도 있다.

1879년 충청도 홍성군에서 출생한 한용운은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에 맞서 일어난 1895년 을미의병운동에 참여했다. 당시로서는 청년 나이인 16세였던 그는 홍성관아 창고를 습격해 1천 냥을 갖고 나오는 데도 가담했다. 군자금을 만들 목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의병운동은 실패했고, 그는 떠도는 신세가 됐다. 이때부터 그는 사찰에서 생활하며 득도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러던 그가 견문을 넓힐 목적으로 계획한 일이 있다. 바로 세계여행이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유럽으로 갔다가 미국을 방문한 뒤 돌아오는 세계일주였다. 이때 그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겪은 체험 하나가 잘 알려져 있다. 불의의 죽임을 당할 뻔했던 바로 그 일이다.

만해 한용운을 곤란하게 만든 '삭발'
 
 한용운이 살았던 심우장에서 찍은 사진. 심우장은 서울 성북구 성북동에 있다.
 한용운이 살았던 심우장에서 찍은 사진. 심우장은 서울 성북구 성북동에 있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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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1906년, 그의 나이 27세였다. 배 타러 원산 가던 그는 우연히 만난 두 명의 승려와 동행하게 됐다. 이들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그는 그곳 한인촌을 찾아갔다. 숙식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길거리에서 그는 이상한 기운을 감지했다. 드문드문 눈에 띄이는 한국인들이 그의 일행을 쳐다보며 수군대는 모습이 자꾸 발견됐던 것이다. 여관에 들어갈 때도 마찬가지였다.

불길한 예감은 결국 현실이 되고 말았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였다. 그는 느닷없이 봉변을 당하고 말았다. 동포 청장년 10여 명이 신발도 벗지 않고 무기를 손에 든 채 스님들의 방에 난입한 것이다.

무장한 한국인들이 그 방에 침입한 이유는 1935년 3월 8일부터 13일까지 그가 <조선일보>에 기고한 '북대륙의 하룻밤'이란 회고담에서 찾을 수 있다. 전 독립기념관장 김삼웅이 쓴 <만해 한용운 평전>의 부록에 실린 이 회고담은 아래와 같다. 어조사 몇 개를 알기 쉽게 바꾸었다.
 
그 찰나 나는 그들에게 변명을 하되 기축(氣縮, 기가 질림)하지 않는 것이 요체라고 생각하였으므로, 그들을 본체만체하고 다리를 접개인 채로 턱을 괴고 앉았다.
그들 중의 장년 한 사람이 나의 앞에 쪼그리고 앉더니
"너희는 다 무엇이냐?"
하고 눈을 부라리면서 묻는다.
"우리는 중이요" 하고 나는 괴었던 턱을 떼고 말하였다.
"중은 무슨 중이야. 일진회원이지?"
"아니오. 우리의 의관이라든지 행장을 보아도 알 것입니다."
"정탐하기 위하여 변장을 하고 온 것이지. 그러면 우리가 모를 줄 아나?"
"아닙니다. 본국 사원(寺院)으로 조사를 해도 알 것이오."
 
결국 한용운은 현지인들의 오해를 푸는 데 성공했다. 처음에 현지인들은 한용운 일행을 친일단체인 일진회 회원들로 착각했다. 그래서 다짜고짜 죽여 없애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사건을 계기로 한용운의 세계일주 계획은 없던 일이 되고 말았다. 그는 발길을 돌려 한국으로 돌아왔다. 만약 그가 그런 변을 당하지 않고 무사히 세계일주를 마쳤다면, 오늘날 우리는 전혀 색다른 한용운의 시 세계를 경험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유라시아대륙을 횡단하고 대서양을 횡단해 미국까지 둘러봤다면, 그의 시 세계는 훨씬 더 풍요로워졌을지도 모른다.

한용운의 세계일주 계획을 망가트리고 한국 문학의 발전을 저해한 일진회는 요즘으로 치면 뉴라이트 단체나 마찬가지였다. 한용운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그 일을 당하기 2년 전인 1904년 이용구와 송병준에 의해 창립된 이 단체는 동학이나 독립협회 출신들이 주축이 된 조직이었다.

동학과 독립협회는 가장 진보적인 단체들이었다. 동학은 민중혁명을 일으켰고 독립협회는 입헌국가 수립운동을 벌였다. 그런 곳에 몸담았다가 보수 우익으로 전향한 사람들이 만든 게 일진회다. 좌파 운동권에서 전향한 뒤 자유한국당이나 바른미래당 등에 뛰어든 대한민국의 뉴라이트들과 비슷한 행로를 걸었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을 올바로 직시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우호적 태도를 견지하는 면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1907년 일본 왕세자(황태자)의 방한을 축하할 목적으로 일진회가 한양 남대문 앞에 세운 대형 아치. 기둥 양쪽에 일진회란 명칭이 적혀 있다.
 1907년 일본 왕세자(황태자)의 방한을 축하할 목적으로 일진회가 한양 남대문 앞에 세운 대형 아치. 기둥 양쪽에 일진회란 명칭이 적혀 있다.
ⓒ 위키백과(퍼블릭 도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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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운은 문학 작품으로만 보면 서정적인 소년이었을 것 같은 사람이었다. <눈물>이란 시에서는 "아니어요, 님의 주신 눈물은 진주 눈물이요, 나는 나의 그림자가 나의 몸을 떠날 때까지 님을 위하여 진주 눈물을 흘리겄습니다"라고 노래했다.

하지만 그의 외형은 전혀 달랐다. 구한말 남성의 평균 키인 161센티미터보다 훨씬 작은 152나 153였던 그는, 키는 작지만 맷집 좋은 권투선수를 연상케 하는 외모의 소유자였다. 그런 외모 만큼이나 싸움도 무척 잘했다. 스님이 된 뒤에도 주먹질을 해서 지역 사회를 시끄럽게 만든 적이 있을 정도다. 그런 스님의 손에 들린 종이조각에 <눈물> 같은 시가 적혀 있으리라고는 누구도 예상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블라디보스토크 한국인들이 그를 일진회원으로 오인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싸움을 잘할 것 같아서 그를 경계했던 것은 아니다.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 내의 만해기념관에서 찍은 <님의 침묵>.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 내의 만해기념관에서 찍은 <님의 침묵>.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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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일진회 회원들은 단체로 삭발을 했다. 이런 이들이 곳곳을 활보하고 다니다 보니 민심이 극도로 어수선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1907년 8월 10일자 <대한매일신보>에 따르면, 삭발한 행인이 지나가면 현지인들이 일진회원으로 간주하고 위협을 가하는 일들이 많았다.

단체 삭발한 일진회에 대한 민중의 증오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로 인해 "삭발한 사람이 봉패(逢敗)한 자가 적지 않다더라"라고 <대한매일신보>는 보도했다. 삭발하고 다니다가 민중의 공격을 받고 낭패에 봉착하는 일진회원들이 한둘이 아니었던 것이다.

일진회가 단체로 삭발을 한 것은 일본의 강요로 강행된 단발령과 관계가 깊다. 단발령은 경우에 따라 삭발령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장영선·박옥련의 공동논문 '단발령 이후 일본의 두발 형태가 한국 남성 두발 형태에 끼친 영향'에 이런 사례가 적혀 있다.
 
"1906년에는 당시의 내무대신 이지용이 각 도에 군수 삭발령을 내려 군수·주사 등 관리들에게 삭발하도록 지시하였다."
-한국일본근대학회가 2012년 발행한 <일본근대학연구> 제38집.
 
일진회는 일본이 강요한 단발령에 적극 찬동한다는 취지에서 아예 삭발을 하고 다녔다. 수행 목적을 위한 스님들의 삭발과 달리, 일진회의 삭발은 혐오감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삭발한 사람이 나타나면 일진회원으로 간주하고 위협을 가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던 것이다. 한용운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죽임을 당할 뻔했던 것도 그의 몸집 때문이 아니라 삭발 때문이었던 것이다.

당시 일진회의 삭발은 시대 흐름을 거스르는 것이었다. 일본과 서양열강의 침략으로부터 자주독립을 지키는 것이 당시의 시대정신이었다. 일진회는 그런 시대 분위기에 정면으로 맞서 친일보수의 길을 걷겠다는 의지의 표시로 단체 삭발을 감행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이 혐오감을 느끼고 공격을 가하곤 했던 것이다.

보수 진영의 삭발을 두고도 우려와 비판의 목소리가 나온다. 외형상으로는 조국 법무부장관의 가족 스캔들을 명분으로 하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라는 주장이다. 검찰이 개혁되고 정치가 개혁된 뒤에는 자신들의 존립기반을 유지하기 힘드니 이에 제동을 걸기 위한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그들의 삭발은 개혁을 지향하는 시대 흐름에 정면으로 역행하는 것이다.

그들의 삭발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국민들은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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