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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재인 대통령이 28일 오전 인텍스 오사카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 공식환영식에서 의장국인 일본 아베 신조 총리와 악수한 뒤 이동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28일 오전 인텍스 오사카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 공식환영식에서 의장국인 일본 아베 신조 총리와 악수한 뒤 이동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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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징용에 대한 배상을 명령한 대한민국 대법원 판결에 대한 보복 조치로, 일본이 무역분쟁이라는 '몽둥이'를 꺼내들었다. 잘못한 사람이 되레 매를 들고 있는 형국이다.

일본 정부는 오는 4일부터 스마트폰·반도체·TV 핵심 소재인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고순도 불화수소, 리지스트를 한국과 거래할 때는 정부 허가를 받도록 했다. 한국은 수출 과정에서 허가를 면제해주는 '화이트리스트' 국가로 분류돼 있었는데, 여기서 빼겠다는 방침이다.

이 조치가 단행되면 수출 허가 신청에서 심사, 그리고 결론 도출까지 최장 90일 정도 소요된다고 한다. 한국 기업들이 해당 일본 제품을 구입하는 데 지장을 받도록 한 것이다.

이번 조치가 경제적 이유보다는 정치적 이유에 기인했다는 점은, 일본이 규제조치의 명분을 구체적으로 밝히지 못하는 데서도 표출된다. 경제산업성 홈페이지에 실린 7월 1일 치 발표문 '대한민국에 대한 수출관리 운용의 재검토에 관하여(大韓民國向け輸出管理の運用の見直しについて)'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경제산업성의 7월 1일자 발표문.
 경제산업성의 7월 1일자 발표문.
ⓒ 일본 경제산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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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출관리제도는 국제적 신뢰관계를 토대로 구축되는 것인데, 관계 성청(省廳)이 검토를 행한 결과 일·한 간의 신뢰관계가 현저히 손상됐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이런 속에서 대한민국과의 신뢰관계 하에서 수출관리를 처리하기 곤란해진 것에 더해, 대한민국과 관련된 수출관리를 둘러싸고 부적절한 사안이 발생하기도 해서, 수출관리를 적절히 실시하자는 차원에서 아래에 적힌 바와 같이 엄격한 제도의 운용을 시행하고자 한다."
    
일본은 이번 조치의 주된 이유로 '한일간 신뢰 손상'을 꼽았다. 구체적 이유를 대지 않은 것을 봐도, 강제징용 판결에 대한 보복 조치임을 알 수 있다. 중국과 미국 간의 무역분쟁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던 한국으로서는, 발등에 떨어진 또 다른 불에 긴급히 대처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일본의 보복 조치는, 자국과 거래하는 한국 대기업들이 강제징용·위안부피해자 등 식민지배 청산 문제에 대해 부정적인 목소리를 내도록 유도하기 위한 접근법이라 할 수 있다. 한국 여론을 분열시켜 정부의 후퇴를 관철시키려는 의도로 읽힌다.

1950년대 한국발 무역분쟁, 그 배경

이번 사안처럼 식민지배 혹은 과거사 문제를 저변에 둔 한일 무역분쟁은 이승만 정부 때인 1950년대에도 자주 있었다. 이 시기에는 무역관계 자체가 두 차례나 중단되기도 했다.

1950년대 한국은 전쟁 피해를 복구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무역분쟁이 발생했다고 하면, 분쟁을 일으킨 쪽이 일본일 것이라 여기기 쉽다. 한일 간의 경제적 격차가 훨씬 컸던 시절이니까. 하지만, 실제는 정반대였다. 분쟁을 일으킨 쪽은 경제적 약자인 한국이었다.

장하준 케임브리지대학 교수는 책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장하준·정승일·이종태의 쾌도난마 한국경제>에서 1950년대 한국 경제를 약간 단순화시켜 "만약 그랬다면, 우리는 아직도 여전히 1950년대처럼 생선 잡고 텅스텐 캐는 게 기간산업이었겠죠"라고 말했다.

박정희식 경제개발에도 긍정적 측면이 없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그런 경제개발이 없었다면 '생선 잡고 텅스텐 캐는' 1950년대 산업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거라는 게 그의 논지다. 약간 과장된 설명이기는 하지만, 그의 말처럼 1950년대 한국은 수출할 만한 물건이 별로 없었다. 텅스텐 같은 광물에 더해 쌀과 김 같은 해산물이 조금 있었을 뿐이다.

그런 상태로 어떻게 무역분쟁을 일으킬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수 있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나름대로 강력한 분쟁 수단을 찾아냈다. 한국이 수출할 게 별로 없었으므로 한국의 무역적자가 누적될 수밖에 없었다. 이 점을 활용해서 무역분쟁을 일으킨 것.

당시의 한일무역은 청산계정 방식으로 운영됐다. 일일이 현금결제를 하지 않고 대차관계를 장부에 기록해놨다가 정기적으로 차액을 현금결제하는 방식이었다. 일종의 외상거래였던 것이다. 한국 정부가 활용한 무역분쟁 수단 중 하나는 이 점을 활용하는 것이었다.

한국 정부는 변제할 금액이 많다는 점과 외상으로 거래하고 있다는 점을 활용했다. 외상 결제를 지연시키는 방법으로 일본에 타격을 주고자 한 것이다. 차철욱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 연구교수의 논문 '1950년대 한일무역 중단의 정치적 성격'은 이렇게 설명한다.
 
"1950년대 한일무역은 기본적으로 청산계정이라는 외상결제 방식이었고, 일정액 이상의 미결제 부분이 존재하였다. 이러한 미결제는 1953년을 지나면서 급속히 증가했는데, 이는 1952년 이후 강하게 작용하는 이승만의 반일정책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었다. (중략) 수입액의 미결제 누적의 형식은 1954년 원조자금에 의한 대일 구매의 중지, 1955년 1차 무역중단, 1959년 2차 무역중단으로 이어진다." - 효원사학회가 2006년 발행한 <역사와 세계> 제30권
 
외상결제를 지연시키는 방법에서 출발해, 원조자금에 의한 대일 구매를 중지하는 방법과 아예 무역 자체를 중단하는 방법으로 무역분쟁 수단이 발달했다는 설명이다.

'원조자금에 의한 대일 구매 중지'라는 것은 미국에서 원조받은 자금으로 일본 상품을 수입하는 것을 제한하는 조치다. 미국 정부는 한국에 원조자금을 제공하면서, 그 자금으로 일본 상품을 구매할 것을 요구했다. 대한(對韓) 경제원조를 일본의 경제성장으로 연결하는 전략인 것이다.

미국은 일본을 강력한 동아시아 대리인으로 만들어 북한·소련·중국 같은 공산권을 견제하겠다는 발상에서 이런 방식을 한국에 요구했다. 따라서 원조자금으로 일본 상품을 수입하는 데 제한을 둔 조치는 일본에 대한 무역제재인 동시에, 미국의 일본 중시 정책에 대한 반발이기도 했다.

중단된 무역은 한일 쌍방피해를 부르고
 
 지난 1일 오후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딜라이트 샵 모습.
 지난 1일 오후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딜라이트 샵 모습.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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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무역분쟁으로 일본만 불이익을 입은 것은 아니다. 무역이 중단되면서 한국 기업들도 적지 않은 타격을 입었다. 이런 문제점이 있는데도 한국 정부가 무역분쟁을 벌인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주된 이유는 식민지배 문제에 대한 일본의 소극적 태도에 있었다. "1954년 이후 취해진 한국 정부의 대일 무역중단 조치는 표면적으로 일본에 경제적 타격을 주어 구보다(久保田) 발언에 사과를 받아내려는 목적이 있었다"라고 위 논문은 설명한다.

1951년 제1차 한일회담 때 일본은 이른바 '역(逆)청구'를 했다. 식민지배 문제와 관련해 일본도 청구할 게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식민지배 시절 일본인이 한국에서 보유했던 재산에 대해 일본이 청구권을 갖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한국의 손해배상청구를 제약하고자 그런 황당한 요구를 내놨던 것이다.

1953년 제3차 한일회담 때는 일본 수석대표인 구보다 간이치로가 "일본은 36년간 한국에 많은 이익을 주었다"라면서 "만약 일본이 (한국에) 진출하지 않았다면, 중국이나 러시아에 점령돼 더욱 비참한 상태에 놓였을 것"이라는 망언을 내뱉었다. 이것이 '구보다 발언' 혹은 '구보다 망언'이다.

이런 식으로 일본이 식민지배를 사과하기는커녕 되레 은근히 자극을 가하는 속에서 반일감정이 한층 더 악화되고, 이 분위기 속에서 한국 정부가 외상대금을 안 주거나 무역을 중단하는 등의 방법으로 무역분쟁을 일으켰던 것이다.

하지만 꼭 역사문제 때문에만 분쟁을 일으킨 건 아니다. 대한 원조자금으로 일본 경제를 부흥시키려는 미국의 요구에 대한 반발의 성격도 있었다. 북한·중국과 무역거래를 개설하려 하는 일본에 대한 견제의 의미도 있었다.

또 일본의 불공정 무역 행태에 대한 항의 표시의 성격도 띠었다. 한국에만 비싼 값으로 물건을 팔거나, 한국이 필요로 하는 상품을 확보하지 못하게 막는 일본의 행태에 대한 경고의 의미도 있었다.

한국이 무역분쟁을 일으키기 전부터, 그러니까 한국이 전쟁의 늪에 빠져 있을 때부터 일본은 그런 식으로 한국을 괴롭혔다. 휴전협정 13일 뒤 발행된 1953년 8월 9일 치 <동아일보>를 보자.
 
 1953년 8월 9일자 <동아일보>.
 1953년 8월 9일자 <동아일보>.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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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일본 정부에서는 한국의 대일 수출품인 무연탄을 비롯한 흑연·고령토·해태·은행초·선어 등에 대하여 일방적으로 그 수입을 억제하는 한편, 어업용 수송선·소형선박은 한국전쟁 수행상 절대로 필요한데도 일본 정부는 세계 각국에 수출을 허가하면서도 한국에 대하여만 수출을 금지하고 있는가 하면, 한국의 주요 수입품인 비료·소맥분·인견사 등의 가격에 대하여 일본 정부는 세계 각국에 수출하는 가격보다 훨씬 비싼 '체크 프라이스(check price)'를 정하여 대한(對韓) 수출에만 적용하고 있다."
  
역사 문제가 아니더라도 한국 정부가 불만을 품을 만한 이유가 많았던 것이다. 전쟁 중인 한국을 상대로 부당한 무역차별까지 부과했으니, 한국 정부 입장에서는 무역보복을 고려할 만한 명분이 있었던 것이다.

역사문제에 불성실한 일본 태도... 1950년대나 지금이나

한편, 이승만 정부가 무역분쟁을 벌인 데는 정치적 혹은 금전적 목적도 있었다. 국민들의 반일 감정을 활용해 지지 기반을 굳히려는 목적도 있었고, 친정부적인 무역상사한테만 무역 제한을 풀어주고 정치자금을 조성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이런 측면들이 있기는 했지만, 당시에는 식민지배 문제에 대한 일본의 뻔뻔하고 황당한 태도에 더해 미국의 한일 차별과 일본의 불공정 무역관행 등이 한국발 무역분쟁에 상당한 명분을 실어줬다.

이처럼 1950년대에는 역사문제에 대한 불성실한 태도를 이유로 한국이 무역분쟁을 일으켰다. 그래서 그것은 상당한 명분이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일본도 실상은 역사문제를 이유로 무역분쟁을 일으키고 있다.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데도 한국 정부가 제지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무역분쟁을 걸고 있다.

명분 없는 무역분쟁이라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때 사용하라고 적반하장(賊反荷杖)이란 사자성어가 생긴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가미네 야스마사 주한 일본대사가 일본 정부가 발표한 반도체 소재 등 3가지 품목에 대한 수출규제 강화와 관련해 불려 서울 종로구 도렴동 외교부 청사로 들어가고 있다. 야스마사 대사는 취재진을 피해 지하 4층 주차장을 이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외교부로 들어갔다.
 나가미네 야스마사 주한 일본대사가 일본 정부가 발표한 반도체 소재 등 3가지 품목에 대한 수출규제 강화와 관련해 불려 서울 종로구 도렴동 외교부 청사로 들어가고 있다. 야스마사 대사는 취재진을 피해 지하 4층 주차장을 이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외교부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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