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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납치 직후 한국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모습.
▲ 일본 납치 직후 한국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모습. 일본 납치 직후 한국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모습.
ⓒ 김대중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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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독재자들이 갖는 공통점의 하나는 정치적 라이벌을 제거한다는 것이다.

러시아혁명에 성공한 레닌은 트로츠키를 암살하고, 중국혁명에 성공한 모택동은 임표를 제거했다. 이승만은 김구와 조봉암을 암살 또는 사법살인하고, 김일성은 박헌영 등을 제거했다. 그런가 하면 박정희는 김대중과 장준하를 살해 또는 제거하고자 했다.

김대중 전 신민당 대통령후보는 박정희 대통령이 이른바 10월 유신을 선포하고 영구 독재통치를 시작하던 72년 10월 17일 당시 일본에 체류 중이었다. 그는 해외에 머물면서 유신통치를 반대하는 투쟁을 벌였다. 주로 미국에 머무르며 반정부 활동을 전개한 그는 일본 안의 유신반대투쟁을 지원하기 위해 73년 7월 10일 일본을 방문하여 도쿄에 머무르고 있었다.

김대중은 73년 8월 8일 오후 1시가 조금 지난 시각에 당시 통일당 총재이던 양일동이 묵고 있던 호텔 그랜드 팔레스 2212호실에서 양일동과 당시 통일당 국회의원 김경인을 만난 뒤 거처로 돌아가기 위해 김경인과 함께 방문을 나섰다.

그 순간 바로 옆 2210호실 및 건너편 2215호실에서 5명의 괴한이 뛰어나와 그중 3명은 김대중을 2210호실로 끌고들어갔고 나머지 2명은 김경인을 양일동이 있던 2212호실로 밀어 넣었다. 

김대중을 덮친 괴한 중 1명이 마취약에 적신 손수건으로 김대중의 코를 틀어막으며 2210호실로 끌고 들어갔고 괴한들은 그의 목을 짓누르며 두 손을 뒤로 꺾어 로프로 묶으면서 유창한 한국말로 "조용히 하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했다. 잠시 뒤 괴한들은 그를 끌고나와 엘리베이터에 태우고 호텔 지하실로 내려갔다. 
  
1973년 8월 일본 도쿄에서 납치되었다가 동교동 집 앞에서 풀려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자택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73년 납치 기자회견 당시 김대중 1973년 8월 일본 도쿄에서 납치되었다가 동교동 집 앞에서 풀려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자택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김대중도서관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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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한들이 떠난 뒤 2210호실에는 대형 배낭 2개, 숄더백 1개, 10여m 길이의 나일론 끈, 휴지, 녹슬어 쓸 수 없는 실탄 7발이 들어 있는 권총 탄창 1개, 묽은 농도의 마취제가 들어 있는 약병, 북한제 담배 '백두산' 2개피가 들어 있는 담배갑 등이 놓여져 있었다. 일본경찰은 이곳에서 범인이 남긴 지문을 채취했고 그것이 주일 한국대사관 1등서기관 김동운의 것임을 밝혀냈다.

김대중을 납치한 괴한들은 호텔 지하주차장을 통해 승용차편으로 어디론가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 차는 요코하마 주재 한국총영사관의 부영사 유영목의 것이었고, 당시 승용차 조수석에는 김동운이 타고 있었다.

납치범들은 오사카나 코베 근처로 추정되는 안가에서 김대중을 작업복으로 갈아입히고 얼굴을 포장용 테이프로 감은 다음 다시 차에 태워 1시간 가량 달려 바닷가에 이르렀다. 여기서 모터 보트에 태워 30~40분쯤 항해한 뒤 정박해 있던 대형 선박에 옮겨싣고 그곳에 있던 사람들에게 인계했다. 이 배는 중앙정보부의 공작선인 536톤짜리 용금호이다. 용금호는 그해 7월 29일 일본에 입항하여 그곳 외항에 정박해 있었다. 
  
73년 8월 당시 납치 생환 직후 김대중 전 대통령을 찾아 위로하는 고 정일형 박사. 김 전 대통령의 야윈 팔이 도쿄에서 납치되어 서울에서 풀려나기까지 3박4일 동안 얼마나 절박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 납치생환 직후의 김대중 73년 8월 당시 납치 생환 직후 김대중 전 대통령을 찾아 위로하는 고 정일형 박사. 김 전 대통령의 야윈 팔이 도쿄에서 납치되어 서울에서 풀려나기까지 3박4일 동안 얼마나 절박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 김대중도서관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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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을 넘겨받은 용금호에 있던 자들은 급히 출항한 뒤 김대중을 배밑 쪽 선실로 끌고가서 몸을 새롭게 묶기 시작했다. 손발을 꼼짝 못하게 묶고 눈에는 테이프를 여러 겹 붙인 다음 그 위에 다시 붕대를 감았다. 그리고 오른손목과 왼발목에 각각 수십 킬로그램이 되는 돌을 달았다. 마지막으로 등에 판자를 대고 몸과 함께 묶었다. 그들은 "던질 때 풀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묶어", "이불을 씌워 던지면 떠오르지 않는다"는 등의 말을 주고받았다.

얼마 후 김대중은 눈이 번쩍하는 불빛을 느낌과 동시에 굉음을 들었다. 그 순간 선실에 있던 자들은 "비행기다!" 하면서 뛰쳐나갔고 배는 매우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비행기의 폭음소리도 되풀이 되었다. 이런 상태가 30분 이상 계속되었다.

이같은 과정을 거쳐 김대중은 어느 항구에 도착하여 앰뷸런스에 태워지고 수면제에 의해 잠이 들었다. 잠을 깬 순간 2층 양옥에 갇혀 있었다. 다시 어두워진 다음, 승용차에 태워져 몇 시간 후 서울 동교동 자택 근처에 내려졌다. 납치된 지 129시간 만인 8월 13일 저녁 10시 30분경 그는 집으로 끌려왔다. 

나중에 김대중의 증언에 따르면, 김대중이 해외에서 유신체제를 계속 비판하면서 73년 7월 6일 재미교포들의 반정부단체인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회의(약칭 한민통)를 결성, 초대 명예회장이 되고 일본에서도 8월 13일 도쿄 한민통의 결성을 준비하자 박정희 대통령이 그의 납치 살해를 중앙정보부에 지시했다는 것이다.
  
73년 8월 당시 납치에서 풀려난 김대중 전 대통령이 모처럼 가족들과 함께 휴식을 취하고 있다.
▲ 생환 직후의 망중한 73년 8월 당시 납치에서 풀려난 김대중 전 대통령이 모처럼 가족들과 함께 휴식을 취하고 있다.
ⓒ 김대중도서관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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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치사건이 발생하자 박정권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국정부의 개입설을 완강히 부인했다. 일본경시청이 사건현장에서 범인 1등서기관 김동운의 지문을 채취하는 등 움직일 수 없는 증거를 포착하고 사건관련자의 출두를 한국 정부에 요구해도, 이를 완강히 거부했다.

이에 따라 일본 내에서는 '국권침해'에 대한 비난여론이 대두하고 한일정기각료회의 연기, 대륙붕 석유탐사를 위한 한일교섭 취소, 경제협력 중단 등 오랫동안 밀월관계를 유지해오던 한일관계가 냉각상태에 빠져 들었다.

이후 미국의 배후 영향력 행사와 한일 간의 막후절충을 통해 관계정상화가 시도되어 △김동운 1등서기관의 해임 △김대중의 해외체류 중 언동에 대한 면책 △김종필 총리의 진사방일 등에 합의, 사건 발생 86일 만에 이 사건은 정치적으로 결말지어졌다.

이로써 무기연기되었던 한일각료회의가 다시 열리고 중단된 차관사업도 재개되었으나, △주권침해 △중앙정보부 관련설 △범인출두 △김대중의 원상회복 문제 등은 사건진상규명과 더불어 영구미제로 남겨지게 되었다.
  
백무현 화백의 <만화 김대중> 2권 중 '김대중 납치사건' 부분.
 백무현 화백의 <만화 김대중> 2권 중 "김대중 납치사건" 부분.
ⓒ 안홍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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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후 박대통령은 미국의 칼럼니스트 잭 앤더슨에게 "나는 하느님에게 맹세코 납치사건과 관계가 없다. 사건은 아마 중앙정보부의 소행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사건 당시의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은 훗날 "73년 봄 박정희가 나를 불러 김대중을 죽이라고 지시했다. 나는 곤혹스러운 나머지 실행을 미루고 있었는데 박정희는 김종필과도 이야기되었다면서 다시 명령을 내렸다. 김대중을 납치한 것도 나지만 살려준 것도 나다"라고 밝혀, 어느 정도 진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사건은 본질이 최고 권력자의 정적제거 음모임이 드러났다. 

미국 정부와 의회가 인정한(<프레이저 보고서> 김대중 납치사건 관련자는 다음과 같다. 

납치ㆍ살해 음모 지휘자들

중앙정보부장 - 이후락
중앙정보부차장 - 김치열
중앙정보부차장보 - 이철희
주일 한국대사관 공사(납치행위 제1책임자) - 김기완

실행 그룹

단장(중정에서 파견) - 윤진원(해병대령)
주일 한국대사관 참사관 - 윤영로
주일 한국대사관 1등 서기관 - 김동운
주일 요코하마 영사관 영사 - 유영복
주일 한국대사관 참사관 - 홍성채
비밀 공작원 - 윤춘국
주일 한국대사관 서기관 - 백철현

김대중은 후일 대통령에 당선되어 박정희기념관을 짓도록 지원하고, 박정희의 딸 박근혜는 대통령 후보가 되어 퇴임한 김대중을 찾아 '아버지의 박해'에 대해 사과하였다.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현대사 100년의 혈사와 통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김대중, #김대중_납치살해시도, #이후락, #박정희, #김종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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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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