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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봉제산업의 역사와 사람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이음피움 봉제역사관.
 국내 봉제산업의 역사와 사람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이음피움 봉제역사관.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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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강암이 많아 돌산이라 불렸던 서울 낙산 자락의 언덕동네 창신동은 그래서 돌산마을이라는 정감가는 별칭이 있다. 돌산마을 창신동은 몇 년 전 뉴타운 재개발 대상에 포함되어 마을 자체가 사라질 뻔했으나, 삶의 터가 된 정든 동네에서 계속 살고 싶어 하는 주민들의 반대로 재개발은 취소됐다. 이후 서울시는 동네의 노후화된 곳을 재정비하고 새로운 문화와 공간을 조성하는 '마을 재생'으로 정책 방향을 바꿨다.

이 동네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전위예술가 백남준 한옥기념관, 창신소통공작소, 공구도서관, 창신시민텃밭 등이 마을 재생 사업들이다. 올해 4월 건립된 '이음피움 봉제 역사관'도 그 가운데 하나다.

창신동엔 '봉제 거리'라고 이름 지은 길이 있을 정도로 봉제일을 하는 소규모 공장들이 많다. 다세대주택들이 들어선 동네 골목 구석구석에 수백 개나 된다고 하니 봉제 산업 1번지라고 부를 만하다. 창신동 봉제마을은 2013년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되었다.

1961년 평화시장이 문을 연 후 동대문 일대에는 의류산업단지를 이루는 상가들이 생겨났다. 단지의상가와 함께 있었던 봉제공장들은 1970년대부터 동대문과 가깝고 임대료가 저렴한 창신동으로 자연스럽게 모여들었다. 당시 '시다'라고 불리며 조수로 일을 시작했던 봉제사들은 이제 어엿한 사장님이 돼 여전히 창신동을 지키고 있다.

서로를 잇고, 소통과 공감이 피어나는 곳

서울시 미래유산이 된 창신동 봉제 골목
 서울시 미래유산이 된 창신동 봉제 골목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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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산 자락 동네 창신동 봉제 골목 끝에 자리한 봉제 역사관.
 낙산 자락 동네 창신동 봉제 골목 끝에 자리한 봉제 역사관.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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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제 공장들이 밀집한 창신동 골목에 자리한 '이음피움 봉제역사관(종로구 창신4가길 26 (창신동))'은  지하 1층~지상 4층 규모로 국내 최초로 봉제의 역사를 다룬 공간이다. '봉제'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와 역사, 노동의 가치, 봉제일을 했던 혹은 하고 있는 사람들의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원단을 가득 실은 오토바이가 쉼 없이 오고가고, 드르륵 드르륵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재봉틀 소리, '칙~' 소리를 내며 하얀 김을 뿜는 스팀다리미, 봉제공장이 들어선 다세대 주택 건물 유리창에 붙은 '당고개·스냅·마이깡·시야게·걸거리··' 여러 국어가 섞인 전문용어가 시선을 잡아끈다. 이음피움 봉제 역사관으로 가는 골목길을 지나다보면 흔히 마주칠 수 있는 풍경이다.

'이음피움'이라는 이름은 실과 바늘이 천을 이어서 옷을 탄생시키듯 서로를 잇는다는 의미의 '이음'과 꽃이 피어나듯 소통과 공감이 피어난다는 뜻의 '피움'을 합해 만들었다. 이곳은 '잘생겼다! 서울20'에도 선정됐다. '잘생겼다! 서울20'은 옛것을 허물고 새로 짓는 것이 아닌 기억과 가치를 되살린 20곳을 엄선해 선정한 서울 명소 20곳이다.

봉제 역사관 4층 카페에서 보이는 창신동과 (바위) 절개지.
 봉제 역사관 4층 카페에서 보이는 창신동과 (바위) 절개지.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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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층 바느질 카페에서 패턴 작업 놀이를 하는 아이들.
 4층 바느질 카페에서 패턴 작업 놀이를 하는 아이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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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제 역사관은 지하 - 안내/봉제작업실, 1층 - 봉제자료실, 2층 단추가게/봉제역사관, 3층 봉제 장인 기념관, 4층 바느질 카페로 구성되어 있다. 봉제 역사관에 들어서면 맨 먼저 야외 전망대가 있는 4층으로 올라가길 추천한다. 테라스와 셀프카페로 구성된 4층 바느질 카페는 창신동의 전경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공간이다. 진한 향이 좋은 커피와 함께 창신동 풍경이 아스라이 펼쳐진다.

창신동의 랜드마크 같은 존재 '(바위)절개지'도 한 눈에 보인다. 1910년 일제는 화강암으로 이뤄진 낙산의 허리를 잘라내면서 돌을 캐는 채석장으로 만들었다. 이곳에서 떼어낸 돌덩이들은 일제 강점기 때 서울역과 시청, 조선총독부 등을 짓는 데 사용됐다. 이후 60년대 채석장 주변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하면서 현재의 보기 드문 풍경이 생겨났다.

높다란 절벽 위로 아슬아슬하게 붙어있는 집들과 주변 언덕동네들이 이채로우면서도 애틋하다. 4층에선 봉제 과정 중 하나인 패턴 작업 체험도 할 수 있다. 청바지, 미니스커트, 나팔바지, 힙합바지, 몸빼바지 키트 중 2개를 골라 옷의 패턴을 익히는 놀이형 체험 프로그램이다.

여성들의 지난한 노동으로 일군 국내 봉제 산업의 역사

실제로 작동하는 옛 재봉틀.
 실제로 작동하는 옛 재봉틀.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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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제 장인 기념관.
 봉제 장인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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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층으로 내려가면 봉제역사관의 해설사 도슨트(박물관이나 미술관 등에서 관람객들에게 전시물을 설명하는 안내인)가 여행자를 맞는다. 봉제 경험이 있거나 동네에 오래 거주한 주민들로 봉제 이야기, 동네 이야기 등을 친근하게 얘기해 주신다.

알고보니 봉제일은 철저한 분업이다. 크게는 패턴, 재단, 재봉의 주 공정과 단추, 다림질 등 마무리 공정으로 구분한다. 창신동 봉제 공장들도 저마다 분업화되어 있는데 옷 하나 만들려면 오토바이 퀵이 15번 오가야 한단다.

'봉제 마스터 기념관'은 30~40년간 현직에 종사하며 자신만의 전문성을 구축한 봉제 장인들을 봉제 마스터로 선정, 이들이 만든 제품과 현장에서 겪은 다양한 스토리를 전시하는 공간이다. 봉제업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도구인 봉제장인들의 가위도 전시되고 실제 작업현장 사진과 인터뷰 영상도 볼 수 있다.

특히 장인들이 저마다 사용하던 가위 사진에 눈길이 머물렀다. 장인들의 손에 머물렀던 가위들은 손잡이에 천이 덧대어져 있거나, 닳아있는 등 사람처럼 제각기 다른 모습이라 무척 인상적이었다. 수십 년을 사용한 낡은 도구들에는 지난한 노동과 시간이 배어있었다.

봉제공이 생생하게 들려주는 구술 기록.
 봉제공이 생생하게 들려주는 구술 기록.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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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0년대 동대문 평화시장내 봉제공장.
 6,70년대 동대문 평화시장내 봉제공장.
ⓒ 봉제역사관내 사진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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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 봉제역사관으로 내려가면 벽면을 빼곡히 채운 300여 개 액자가 무척 이채롭다. 액자속에는 창신동 이야기, 봉제골목과 그 속에서 일하는 사람들 사진 등이 담겨 있다. 재밌게도 액자 프레임은 천을 재단할 때 사용하는 '패턴 자' 형태다. 사진과 영상물 하나하나가 눈길을 끌었다. 60년대 평화시장의 옷 가게와 봉제공들이 옷을 제작하는 작업실 사진이 특히 그랬다. 사진속 '다락' 구조는 비인간적 노동환경을 가장 잘 드러내는 곳이다.
동선을 최소화하기 위해 건물 한 층을 반으로 나누어 아래층에서 옷감을 재단하여 위층 다락으로 오리면 시다와 봉제공이 재봉틀로 옷감을 이어 옷을 만들었다. 작업실은 봉제공들이 먹고 자는 생활공간이기도 했다. 좁은 공간에서 겨울이면 난로를 피우고 쪽잠을 자고, 여름이면 사방이 막힌 공간에서 찜통더위를 이겨가면서 일을 했다.

무리하게 공간을 나눈 탓에 다락의 높이는 터무니없이 낮아 노동자들은 마치 기어 다니다시피 이동해야 했다. 평화시장의 젊은 재단사 전태일은 이러한 봉제공장의 실태를 고발하고자 1970년 11월 13일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며 분신했다.

이를 계기로 노동자들의 최소한의 권리를 보장받고자 같은 해 청계피복 노조가 설립되고 조금씩 평화시장의 노동환경이 개선됐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업주들이 단속을 피해 인근 창신동으로 이주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 봉제 역사관 자료  가운데  

봉제 역사관.
 봉제 역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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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제역사관의 많은 사진과 영상물들은 산업화와 국내 경제성장에 일조했지만 주목받지 못한 '여성의 노동'에 주목하고 있다. 1970년대 동대문 평화시장을 중심으로 생긴 수백 개의 가게와 작업장으로 전국에서 온 어린 소녀들이 몰려들었다. '시다'라는 이름으로 학비와 가족 부양을 위해 고된 일을 하며 재봉기술을 배웠다.

70년대부터 80년대 중반까지 섬유, 봉제 산업은 우리나라 경제를 견인했다. 이러한 고도성장을 이끄는 중심엔 여공들이 있었다. 1977년 기준 섬유의류봉제 업종 부문의 여성노동자 비율은 70%에 달할 정도로 여성노동자들은 한국의 산업화 과정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현재의 봉제 산업은 당시 봉제 일을 했던 50~60대 여성 그리고 이주 여성들의 일자리로 이어지고 있다. 1960년대 여공들의 사회 참여 시작이었던 봉제 산업은 지금도 많은 여성들의 자활로 이어지고 있다.

일반 시민들도 이용할 수 있는 지하1층 봉제 작업실.
 일반 시민들도 이용할 수 있는 지하1층 봉제 작업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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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방문객이 봉제 작업실에서 만든 가방.
 어느 방문객이 봉제 작업실에서 만든 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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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세대가 살아온 고된 삶의 기억은 점점 잊혀간다. 도시와 동네의 기억도 자꾸 사라져간다. 내 부모에서 보듯 그 기억들은 당신들의 삶 자체일 수도 있다. 그 기억들이 하찮은 게 아님을 깨닫게 해주는 곳이다. 이음피움 봉제 역사관은 버려지고 잊힌 것을 다시 살려내 보여주고 있다.

1층 봉제자료실은 월간 <봉제기술> 등 봉제 관련 서적과 봉제인들의 이야기를 영상으로 기록한 '봉제인 구술 아카이브'를 볼 수 있는 공간이다. 지하 1층 봉제작업실에는 공업용 재봉틀과 가정용 재봉틀 외에도 마감 처리용 인터로크(interlock), 오버로크(overlock) 등의 장비가 구비되어 있다.

사용교육을 이수한 후 하루 최대 3시간까지 이용할 수 있다. 봉제 역사관 누리집에서 교육 프로그램을 신청하면 봉제 전문가들이 직접 가르쳐준다. '강아지옷 만들기'(초급), '아기옷 만들기'(중급), '나만의 바지 만들기'(고급) 등이 있다. 수강료는 무료이며 소정의 재료비만 내면 된다.

[여행정보]
* 누리집 : http://iumpium.com
* 교통편 : 서울 전철 동대문역(1, 4호선) 1번 출구에서 도보 15분
* 운영시간 : 오전9시~오후6시 (관람료 무료, 월요일 휴관)

덧붙이는 글 | 지난 7월 28일에 다녀 왔습니다. 제 블로그에도 송고했습니다.



태그:#봉제역사관, #이음피움, #창신동, #전태일, #봉제골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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