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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김대중은 왜 '서민'이라고 하지 않았나'

어제(12월 3일) 오마이뉴스 기사 중 한 꼭지다. 이 기사 내용 중엔 '도시빈민', '중산층과 서민'의 모호함 속에 숨어버린 야당'이라는 말이 나온다. 나는 참으로 오랫동안 '서민'이란 단어 속에 '도시빈민'인 사실을 숨기고 싶어 했다.

지나간 시간이 아름다우면 '추억'이고, 아프면 '기억'이라 했던가! 1987년, 지금으로부터 28년 전, 나는 열 일곱이었고 추억보다  '기억'이 많은 시간들이었다. 당시 학교에선 학기 초만 되면 '가정환경조사'와, '가정방문'을 했었다. 없는 게 너무 많아서 '조사'할 게 도무지 없고, 집에는 정말 '방문' 하나도 번듯하지 못하던 때였다.

초등학교 때부터 매년 내 환경에 대한 조사를 받았는데 참으로 오래, 꾸준히, 일관적으로 가난했고 내내 I.M.F였다. 도대체가 있는 것보다는 없는 게 더 많아서, '없는 걸 잊고 싶은 현실'을 각성시켜주는 그 조사가 너무 싫었다. 그때는 자동차, 냉장고, 피아노, 컴퓨터 등이 지금의 임플란트, 해외여행처럼 '부'를 가늠하는 기준이었는지 거수 조사나 설문 조사에는 그런 자산의 유무 확인도 있었다.

한 반에 육십 명 이상 있던 학생들을 일일이 조사하는 게 힘들던 선생들은 '거수'로 간단히 조사하기도 해, 어린 마음을 아주 '간단히' 멍들게 했다.

설문지에는 부모의 생존 여부, 직업과 최종 학력, 집 소유 유무가 있었다. '편모'라는 항목에 체크를 하면서 이상하게 맘이 아팠고,'사글세'이던 주거 상태를 '전세'라고 거짓 기재를 했다. 여러 항목 중 마지막쯤에 자신의 경제 상태를 '상, 중, 하' 혹은 '부유층, 중류층, 빈민층'이라는 항목에 체크를 하게 돼 있었다.

'하'나 '빈민층'이라고 사실대로 못 적고 매번 '중'이나 '중류층'이라고 거짓 기재를 했는데 그런 거짓말을 하는 나 자신도 너무 싫었다. '하' 혹은 '빈민'이라는 단어는 내가 속한 외부 상태 말고도 보이지 않는 내면까지도 아주 저 밑바닥처럼 느껴지게 만들었다. 고백하건대 한번도 '중산층'이 돼보지 못했다.

빈민으로 오래 산 내가 서민이라 우기던 허위에서 벗어난 건 수십 년이 지난 뒤였다. '서민'이란 이름 얻기도 얼마나 힘든지, 빈민이 아닌 서민으로 살 수 있는 것만도 감지덕지 감사하게 되면서다. 대한민국 평균임금 '이상'을 받는 사람들에게 나는 '빈민'이고, 노숙자나 쪽방촌 사람들 눈의 나는 서민일 것이다. 서민과 빈민의 위태위태한 경계선에서 이 지루한 밥벌이를 그만두기라도 하면, 바로 빈민에 합류되겠지. '소액기부'에 종종 동참하고, '장기기증'신청을 한 것도, 선의의 동참이나 정서적 공감대 외에 빈민이 됐을 때의 심리적 보험 같은 것도 있다.

형이하학적 생존도 힘들었던 당시엔 수업시간에 배운 김춘수의 <꽃>이 싫었다. 꽃의 '화사함'을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환경이 그랬고, 시 속의 내용이 당시엔 연애시로 받아들여져서 너무 소녀적이고 유치했다.

그 시가 좋아진 건 나이가 들면서 존재론적 의미를 이해하고 나서다. 당시의 내게, 세상은 나영석 pd 식으로 얘기하면, '꽃보다 똥'이었다. '똥'이라 쓰니 생각나는 게 있다. 1987년 무렵엔 수세식 변기가 일상화되기 전이라 각 가정에 똥을 저장한 정화조가 있었다. 정기적으로 똥차가 와서 쌓인 똥을 치워주고 갔다.

그때 똥 치우던 아저씨들 말이 생각난다. 자기들끼리 푸념처럼, 자조적으로 하던 얘기였다.

"내 참 더러브서... 우리가 똥이란 더러운 것을 치우고 있긴 하지만 우릴 얼마나 더러운 인간 보듯이 하냔 말이야. 지가 싼 똥 치워 주는데도 돈 줄 때 보면 한 손으론 코 막고, 나머지 한 손은 우리 손이 닿기라도 할까봐 손톱으로 겨우 돈 끝만 살짝 집어서 건네주잖아. 그러다 그 돈이 바람에 날아가서 돈 주우러 쫓아갈 때의 그 비참함이라니...."

나도 김수영처럼 '작은 일'에 곧잘 분개를 하는데, 공중 화장실에서 똥 누고 물 안 내리고 가는 인간들은 바로 그런 인간들이라 생각한다. ​저 당시 작가와 제목이 기억 안 나는 시 중에 '동포여! 하는 소리에 매력을 느끼다가 다시 한 번 귀기울여 들어 보니 똥퍼어 하는 소리라...​는 걸 읽었는데, 그 시와 저 대화가 겹쳐서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있었다. 꽃 얘기도 아닌 똥 얘기를 이렇게나 오래도록 선명하게 기억하는 걸 보면 내게 세상은 꽃보다 똥에 가까운 같다.

당시 내 가난의 도피처는 책과 음악이었는데 음악은 책보다 돈이 많이 들었다. 책이야 도서관에서 빌릴 수 있었지만 노래는 도서관에 없었고, 내가 좋아하는 음악들은 친구들이 모르거나 안 좋아하는 것들이라 빌려 들을 수도 없었다.

장기 집권하던 조용필에 대적하여 소화기 대신 마이크로 '불' 끄러 나온 승마바지 입은 남자 셋과, ㄱ자 춤을 기막히게 추던 얍시리한 청년이 또래 아해들한테 인기를 얻었다. 반 아이들은 그 집의 '가정부'라도 되고 싶다며 난리였는데 난 그저 심드렁하기만 했었다. 내가 혹한 가수들은 한결같이 죽음과 눈물을 머금고 있어서 이미 죽었거나 머지않아 죽을 놈들이었다.

한때는 '내가 좋아해서 다 죽나?'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죽고 나면 생전보다 더 유명해지곤 해서 '죽어야만 한 번 쳐다봐 주는 이 죽을 놈의 세상...'이라며 죽은 그들을 서러워했다. '허밍'만 해도 한(恨)이 철철 넘치는 김정호, 술병으로 목이 다 쉰 김현식, 악 쓰는데 왠지 슬픈 전인권, 웃고 있는데 슬픈 김광석, 국악가요로 심금을 울리던 김영동의 노래와 대금 연주, 그리고 김수철과 김창완.

그리고 정태춘...

무슨 심야 음악프로에서 '촛불'과 '시인의 마을'을 듣는데 '시인이 부르는 노래' 같았다. 얼마 뒤 정태춘은 더이상 '시'같은 노래는 부끄러워 안 부르겠다며 '서사' 속으로 들어갔다.
그 중의 백미는 몇 년 뒤 나온 '우리들의 죽음'이란 노래였다.

민예총,전교조
▲ 1990년'다시 서는 봄'공연 민예총,전교조
ⓒ 이종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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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춘이 '음반사전심의 철폐' 운동의 일환으로 공연전에, 의도적으로 불법복사제작한 테이프를 판매했었다.
▲ 1989년 '송아지 송아지 누렁 송아지'공연 정태춘이 '음반사전심의 철폐' 운동의 일환으로 공연전에, 의도적으로 불법복사제작한 테이프를 판매했었다.
ⓒ 이종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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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벌이 영세 서민 부부가 방문을 잠그고 일을 나간 사이, 지하셋방에서 불이나 방 안에서 놀던 어린 자녀들이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질식해 숨졌다"는 낭송으로 시작되는 노래를 줄줄 흐르는 눈물과 충격 속에서 들었다.

그것은 중학 졸업식날 집에 가는 길목에서 책 할부 판매원한테 홀려 산 야메 '한국 명시'집 속에서 박노해와 백무산의 시를 처음 읽었을 때의 충격 같은 거였다. 아! 이런 노래도 있구나. 맨날맨날 나는 알지도 느끼지도 못하는 재벌집 얘기나 남녀상열지사만 지껄여대는 그런 노래, 가수 말고 내 얘기, 우리집 얘기 같은 이런 노래 말이다.

그렇게 자가 의식화가 된 나는 학급회의 시간에 '학급비 운영의 내역'이 궁금하다는 질문을 했고, 이한열 열사 사망 시 '검은 리본'을 달고 등교했으며, 아이들한테 거둔 돈으로 동성로에 나가 시위하는 언니, 오빠들한테 마스크와 요구르트를 사 주었다.

공납금 독촉을 하며 공개 호명과 망신을 주는 담임에게 "돈이 있으면 알아서 낼 것이다. 외상값 독촉하듯 너무 그러시지 마라. 선생이 할 일은 아닌 것 같다"고 담담히 말했다. 담담하지 못했던 담임은 매로써 응징했고, 손이나 뺨이 떨어져 나가도 ' 내 울거나 빌지 않겠다'는 어린 독기에 더 분한 매질을 했다.

80년대가 막을 내린 1990년에 그'빚쟁이' 같았던 학교를 졸업했는데, 나는 담임의 졸업식 축사를 보고 싶지 않다는 결석의 뜻을 전하며, 앨범은 다른 인편에 전달을 부탁드린다 했다. 선생은 '교편생활 십수 년 만에 저런 아는 처음이다'며 몸서리를 쳤다고 한다. 살면서 나는 그 선생의 몸서리와는 비교도 안되는 몸서리를 수타 겪었다.

그 노래를 처음 들은 날로부터 '강산이 한 번 바뀐' 세월이 지나고 나서 '무상급식', '무상보육'이란 단어를 접하며 다시 그 노래를 떠올렸다. 우리 엄마가 만약에 아침에 나가서 저녁에 오는 일을 했다면, 나는 저 아이들처럼 불속의 재가 됐을지 모른다(난 아주 오랫동안 단칸방에서 세 식구가 붙어 살면서 '내 집'보다 '내 방'이 사춘기 때의 더 시급한 꿈이었는데, '편의점'처럼 24시간 대기하고 있는 엄마가 싫었다).

우리 엄마는 우리를 방 안에 놔두고 밖에 열쇠를 채울 수 없어서 늘 집에서 돈 안되는 일만 했던 거구나. 저 때 무상급식이 있었더라면, 저 때 무상 보육이 있었더라면 저 아이들 엄마는 문 잠그지 않아도 되고, 그랬으면 아이들은 문 밖으로는 나올 수 있었을 텐데. 정태춘은 자신이 보는 세상은 그대로인데, '마이 좋아졌다 아이가, 고마해라'하는 사람들한테 절망해서 노래를 고마하게 됐다.

그런 노래는 TV에 잘 안 나오고 라디오에서도 밤에나 잘 지키고 있어야 들을 수 있는 귀하디 귀한 노래였다. 헌 카세트 테이프를 모아서 원래 들어있던 소리들을 다 지우고 다시 감은 뒤 디제이의 멘트 중 좋아하는 노래 제목이 나오면 재빨리 '녹음'했다. 그러나 앞뒤가 약간씩 잘리거나 디제이 목소리가 섞인 노래가 성에 차지 않았다. 나는 '원곡'이 온전히 들어있는 음질 좋은 그 노래들이 너무 갖고 싶었는데 그때 우리 집은 너무 가난했다. 피리나 물감도 겨우 사 갈 정도였으니, 엄마에게 '가수'의 노래를 사 달라고 하는 건 '불효'란 걸 일찌감치 깨달았다.

내 담임은 아니었으나 나를 아끼던 선생님께 방학 동안 일할 알바 자리를 부탁했다. 학교 매점 일도 했고, 어느 전문대 교수실에서 급사를 하기도 했다. '최저임금'도 안되는 월급을 받은 돈으로 <핫뮤직><스크린>같던 음악, 영화잡지와 카세트테이프, LP 판을 샀다. 쥐꼬리도 웃고 갈 월급날이면 그 잡지들과 음반들을 품에 안고서 드물게 행복한 마음으로 귀가했다.

처음으로 온전히 '나만의, 내 것'이 된 소유물로, 내 힘으로 구해서 얻은, 요샛말로 '내가 나에게 주는 선물'이었다. 그때의 형편으론 그 알바비로 공납금을 내거나 집 생활비로 내놔야 했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내  '의식화'는 '대학'이나 '공장'같은  '조직'이 아닌, 노래와 책 속에서 가난과 함께 버무려진 '개인적'인 것이었다. 대학은 공연 구경이나 산책 장소로만 몇번 다녔고, '노조'가 있을 만큼 명함 번듯한 밥벌이를 한 적이 없어서 '교육'으로 의식화될 일도 없었다.

그런데 '의식화'가 뭐 별건가? 나쁜 걸 나쁘다고 느끼는 거고, 잘못된 걸 잘못됐다 느끼는 거고, 억울한 걸 억울하다 느끼는 거다.  우리 집은 살면서 억울한 게 많았다. 남자도 없고, 학력도 없고, 돈도, 줄도 없는 4무​의 집이었으니까.

그렇게 억울함 속에 오래 있다 보니 '내가 덜 억울해질 주장을 하는 곳이 어디인가?'를 보게 되었다. 나를 보면 '문화'가 이론교육보다 생각에 더 큰 영향을 미쳤는데, 그래서 현 정부가 '국정교과서'로 자신들한테 불리한 사실들을 축소, 삭제, 은폐하려는데 심혈을 기울일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과 반대되는 당이나 계급을 지지하는 것은 그 '억울함'을 '참는 것이 미덕'이라는 잘못된 세뇌와 그 억울함의 방향이 빼앗는 자들이 아닌, 없는 것들끼리의 멸시로 만드는 언론에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예전에 밥 벌던 곳의 수장은 고졸에다 전라도 출신이었다. ​경상도, sky가 주축인 기업에서 ​그 불리한 스펙으로 그 정도까지 간 것은 대단한 일이다. '현장업무'를 강조하는 업무 특성에, 본인의 노력, 능력이 특출났기 때문일 것이다. 지역, 학력으로 내색하지 못한 차별과 설움이 많았을 거라는 인간적 연민과 호탕한 성격, 실력에 대한 존경심 같은 게 한 번에 사그라지는 일이 있었다.

그의 마눌이 하루는 중학생 아들이 데리고 온 친구를 보고 하는 말이, "공부 못하고, 못 사는 (영세민 출신 같은) 아이들과는 어울리지 마라"였다는데, 그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옮기는 태도 때문이었다. 차별의 최전선에서 산 자로서 누구보다 그런 것에 더 각별하게 반응하고 교육의 지침으로 삼아야 할 사람이 결국 차별에 동참했다는 실망이었다. ​

'의식화(혹은 세뇌)'되는 계기, 과정 중에는 후천적 습득과 교육 말고 '모태 세뇌'가 있는데 위의 사례가 그런 경우다. ​뱃속에서부터 가난=열등, 전라도= 빨갱이 등의 말을 듣고 자라고, 세월호 같은 사건에 '놀러 가다 사고로 죽었는데 웬 생떼?' 같은 말을 듣고 자란다면 이유 없는 혐오, 비상식, 이기적 도덕관 등이 유전, 전이될 건 뻔하다. ​

오늘의 헬조선은 뻔뻔한 권력자와 어리석은 유권자의 합작품이다. 야당의 분탕질 계파싸움을 보면서, 요새 즐겨 보는 육룡이 나르샤에서 홍인방이 이방원한테 하던 말이 생각나더라.

"잘 생각해 보거라. 너의 설렘이 니가 만들려는 그 나라 때문인지, 아니면 니놈이 그 나라를 갖고 싶은 건지, 어느 순간 알게 되겠지. 그걸 알게 되는 순간 니 안의 벌레는 속삭이게 될 거야."

​벌레 같은 놈들을 없애겠다고 표를 구걸하던 그들이 몇 장의 표에 곧 벌레가 되어 '삼천포'로 빠지는 게  다반사였다. 그리고 내 글도 늘 삼천포로 빠진다. 참 삼천포는 '사천포'가 되었다지! 늘 이런 안 좋은 말에 그 아름다운 지명을 쓰는 게 죄송했는데, 덜 미안해해도 되나.

덧붙이는 글 | 응답하라1988응모글



태그:#1988, 가정환경조사서, #정태춘, #서민과 빈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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