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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6월 9일 한겨레 신문 기사 내용 발췌. 당시 기사에는 "남쪽도 싫었고 북쪽도 싫었다. 어리론가 멀리 사라져 버리고만 싶었다. 그 순간 나는 완벽히 존재했고 존재하지 않았다"는 의미심장한 작품 대사를 실었다.
▲ 분단, 민중의식 담은 이념 만화 등장 1988년 6월 9일 한겨레 신문 기사 내용 발췌. 당시 기사에는 "남쪽도 싫었고 북쪽도 싫었다. 어리론가 멀리 사라져 버리고만 싶었다. 그 순간 나는 완벽히 존재했고 존재하지 않았다"는 의미심장한 작품 대사를 실었다.
ⓒ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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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기사 공모 '1980년대 경험담'을 보고 3일을 고민했다. 당시 중2병을 앓고 있는 기자의 눈은 오직 학교 안에만 갇혀 있었기 때문. 매일 같이 제도권 교육에 치이고, 그나마 시간이 날라 치면 사랑 타령만 하던 주근깨 소년에게 세상 밖 이슈는 올림픽이 전부였다. 그리고 일상사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건 홍콩 영화와 포커 게임의 추억들뿐.

이런 무지몽매한 경험밖에 없으니 어떤 기사를 쓸 수 있으랴. 억지춘향으로 옛날 기사를 무작정 들춰보니 허영만 작가의 <오! 한강>이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는 것에 주목했다. 그러고 보니 당시 만화방의 등장과 함께 허영만, 야설록 등 한국만화계의 전설이 등장한 시기였다. '아기공룡 둘리', '공포의 외인구단', '아마게돈', '카론의 새벽' 등 이미 전설이 된 유명 작품도 이때 등장했다.

안기부가 기획한 반공 만화 <오! 한강>, 대학생 필독서 된 사연

<한국만화사 산책>에 따르면 허영만 작가의 <오! 한강>은 한국전쟁과 남북분단이라는 시대상황에 대한 반공의 금기를 최초로 깬 작품이다. '레드 콤플렉스'가 절정에 달했던 시기인 1960년대에는 만화책 표지에 '빨강 원색'조차 쓸 수가 없었다. 그러다 1987년 민중항쟁 이후 민주화 요구가 터지면서 이 작품이 '반공 이데올로기 해빙의 전초' 역할을 한 셈이다.

이 작품에는 해방 이후부터 1987년 6월 항쟁까지의 파란만장했던 한국현대사가 그대로 녹아있다. 미군정시대, 한국전쟁 발발, 조봉암을 죽인 진보당 사건, 4.19와 5.16 군사쿠데타, 박정희 유신독재, 광주민주화항쟁, 5공화국, 인천사태, 건대항쟁, 6.10항쟁, 6.29선언 등의 굵직한 사건을 다뤘다. 의아한 것은 이 작품이 당시 정보기관인 국가안전기획부가 기획한 반공 만화였던 것이다.

당시 유명세를 탔던 허영만 작가에게 정보기관이 전화를 걸어 반공 만화를 부탁했다. 하지만 허 작가는 몇 번을 거절했다. 그러다 그는 위기를 기회로 만들겠다는 야심한 계획을 잡고 조건부로 작품 제안을 승낙했다. 그 조건은 끝날 때까지 아무런 간섭을 하지 말라는 것. 당시에는 문화공보부가 모든 오락 산업에 검열을 걸어 정권 입맛에 맞는 작품만 허용되던 시절이었다.

"<오! 한강>은 발표 당시부터 독자들에게 놀라운 충격을 주었다. 6공 정부가 들어서며 월북 작품이 비로소 해금되던 시기에 대중문화에서 단 한 번도 다뤄진 적 없는 해방공간과 한국전쟁을 정면에서, 그것도 공산주의자인 이강토의 시각에서 다루었던 것이다, 게다가 아버지의 역사에서 아들의 역사로 80년대 격동의 시간들을 그려내고 있다"(박인하 만화평론가)

허 작가는 작품을 쓰는 동안 줄곧 경찰의 회유와 협박, 검열 압박 등을 계속해서 받았다고 한 언론 인터뷰를 통해 고백했다. 한 번은 작품에서 인공기가 등장해 난리가 났고, 또 한 번은 전라도 사투리를 표준말로 처리해 혼쭐이 난적도 있었다고 그는 토로했다.

기회주의자, 나약한 지식인의 한계 등... 아직도 우리는 영웅을 꿈꾼다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탄생한 작품은 그야말로 대박이었다. 1988년 당시 대학생들 사이에서 필독서로 유행하는 등 역설적이게도 독재 타도 민주화 쟁취 등에 대한 갈망을 최고조에 이르게 하는 매개물이 되었던 것. 지금의 386세대들은 당시 <오! 한강>의 명대사를 하나씩은 외우고 다녀야 대학생 티가 난다고 할 정도였다고 한다.

작품에서 나오는 기회주의자 덕배, 지주와 하인의 간통을 목격하고 집단 린치를 당한 후 자살한 삼득, 술집 작부가 된 야스꼬, 회의주의자 김희중, 나약한 지식인인 김혜린과 한동수, 그리고 이들과의 복잡 미묘한 관계 속에서 주인공 이강토는 혁명을 꿈꾸는 예술가로 승화된다. 마치 허 작가의 전 작품인 <각시탈> 속의 민족 영웅인 강토를 지향하듯 말이다.

허영만의 <오! 한강> 작품을 보면서 주인공 이강토가 고민하는 그 중심에 바로 대한민국의 현재가 보이는 것은 왜일까. 1988년과 2015년 사이의 30년을 관통하는 시대적 분위기가 묘하게 '데자뷔' 되는 양상이다.

어쩌면 87년 민주화 이후 다시 역행하고 있는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를 말해주는 건 아닐까. 한국의 근현대사를 그저 추억이라고 부르고 보기엔 아직도 우리에겐 시대적 영웅의 탄생을 갈망하고 있는 건 아닐는지. 대한민국의 이데올로기 전쟁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다시는 희망을 갖지 않으리라. 다시는 미래에의 환상을 갖지 않으리라. 나는 영원히 침묵할 것이며 내 인생을 만들었던 모든 것에 복수하리라"
"정치에서 현실만 강조하는 것처럼 아둔한 인식도 없소, 정치는 현실과의 씨름이면서 역사와의 대결이오"
"정치이야기가 아니야 그냥 빗대어 이야기한 것 뿐이야, 이런 시대에는 그 사람의 정치관이 곧 인격일 수도 있으니까"
"도화지에 하나의 선을 그린다는 것은 혁명과도 같다!" <작품 명대사 중에서 발췌>

덧붙이는 글 | <1988 응답하라> 응모글



태그:#허영만, #오 한강, #안전기획부, #386세대, #레드콜픅렉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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