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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베트남에서는 매년 집집마다 가족 단위로 '따이한 제사'를 지낸다. 한국군에 의해 죽었다고 해서 '따이한 제사'라고 한다. 베트남의 모든 위령비와 증오비에는 '남조선 군대' 앞에 '미제국주의자의 괴뢰'란 수식어가 붙는다. 우리가 외면한 '베트남 전쟁'의 상흔이다.

흔히 같은 사안을 두고 가해자는 쉽게 잊지만 피해자는 결코 잊지 못한다. 그렇게 우리는 알고 싶은 '베트남 전쟁'만 배워왔다. 무엇이 두려워 정면으로 마주하길 꺼려했을까. 이제 몰랐던 나머지 반쪽을 떠올리고 기억할 때다. 너무 늦었지만 말이다.

잊혀진 전쟁, 반쪽의 기억 <베트남 전쟁>
 잊혀진 전쟁, 반쪽의 기억 <베트남 전쟁>
ⓒ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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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국제대학원 박태균 교수는 <베트남 전쟁>을 썼다. 그는 책을 낸 동력이 두 가지라고 소개했다. 하나는 언젠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버린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한국군인들을 다시 끄집어내기 위해서다. 베트남 전쟁에서 큰 부분을 차지했던 이들에 대한 연구가 계속될 수 있는 바탕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또 하나는 베트남전쟁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바꿈으로써 한국은 다르다는 것을 전 세계에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한국 사회는 범죄 행위를 미화하고 숨기는 일본의 극우 세력들과는 다르단 사실을 말이다.

한국은 '잘 싸웠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에 한국은 네 차례에 걸쳐 32만5000여 명을 파병했다.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군의 활약은 '뛰어났'다. 남베트남의 입장에서 보면 한국군이 잘 싸웠다는 말이다.

하지만 반대로 베트콩의 입장에서는 '잔인하다'는 평가가 된다. 책에 따르면, 당시 주베트남 한국군 사령관 채명신 장군은 '한국군은 잘 싸우지만 적들에게 지나치게 잔인하다'는 소문을 걱정했다고 한다. 문제는 그 '적'이 확실치 않았다는 데 있다.

베트남 사람들 사이에서 한국군에 대한 평가도 다르다. "한국군은 미군보다 더 잘 싸웠다, 그래서 한국군과는 교전을 안 하려고 했다"는 증언이 있는가 하면 "한국군은 새로운 방식으로 민간인들을 학살했다, 미군들에게서 찾을 수 없는 방식이었다"는 지독한 폄하도 있다. - <베트남 전쟁>에서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짚어야 될 사실은, 이들이 가해자가 된 것은 국가에 의한 동원 때문이었단 점이다. 국가는 '국가이익'이라는 명분 아래 구성원들을 사지로 내몰았다. 50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의 트라우마로 악몽을 꾸는 참전자들이 있다고 한다. 저자는 국립현충원 정문 옆 휴게실에서 열렸던 서화 전시회에서 본 편지 하나를 떠올렸다.

어머니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돌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10여 명은 될 것입니다. 적은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팔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어머니, 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 어제 내복을 빨아 입었습니다. 물 내 나는 청결한 내복을 입으면서 저는 왜 수의를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제가 오늘 죽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살아서 가겠습니다. 꼭 살아서 가겠습니다. 어머니, 상추쌈이 먹고 싶습니다. 찬 옹달샘에서 이가 시리도록 냉수를 한없이 들이켜고 싶습니다. 아, 놈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다시 또 쓰겠습니다. 어머니 안녕 안녕, 아 안녕은 아닙니다. 다시 쓸 테니까요. - <베트남 전쟁>에서 재인용

이 편지를 쓴 이는 결국 전사했다고 한다. 베트남 전쟁에서도 약 5000명이 전사하고 1만2000여 명의 장병이 고엽제로 인한 질병 판정을 받았다. 이들은 왜 머나먼 이국에서 죽어야 했고, 지금도 전쟁의 후유증에 시달려야만 하는가.

국가는 왜 파병을 결정했는가

책은 '파병된 사병들이 자원해서 갔을까?'란 의문을 던졌다. 전방부대의 경우 지원자가 없어서 사단별로 지원자를 할당하기도 했다는 증언도 소개했다. 물론 그때도 "돈 있고 백 있는 사람들은 다 빠졌"단다.

"(훈련 중) 매일 도망자가 나왔다. 돈 있고 백 있는 사람들은 다 빠졌다. 어쩌다가 고졸 있고, 전문대 다니는 사람도 (우리 소대에) 없었다. 한 소대에 고등학교 졸업자가 1명 정도 있었다. 자발적으로 지원한 사람들은 베트남을 가면 돈을 벌어 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갔다." - <베트남 전쟁>에서 재인용

그렇다면 이들을 사지로 몬 국가는 왜 파병을 결정했을까. 책에 따르면 1963년 전후로 미국에서는 주한미군과 함께 단계적으로 한국군 25만 명을 감축하는 방안이 논의됐고, 1965년 백악관에 제출된 보고서에서는 한국군 10만 명의 감축이 권고됐다.

박정희 정부에게 감군은 큰 부담이 됐다. 군축은 가뜩이나 좁은 군대 내의 승진 기회를 더 어렵게 만들 수 있었고 이로 인해 박정희 정부의 가장 중요한 지지기반이 동요할 가능성이 있었다. 이 시점에서 한국 정부가 또다시 한국군의 해외 파병이라는 카드를 내놓았다. - <베트남 전쟁>에서

책은 베트남 전쟁이 한국의 일부 기업들에게 성장의 기회가 됐다고도 언급했다. 베트남에 진출한 국내 건설사들이 1966년 한 해에만 계약한 공사가 무려 480만 달러나 됐다. 미국에 대한 수출도 증가했다. 전투병을 파병한 직후부터 일본을 제치고 미국이 제1수출국이 됐다. 1972년에는 대미 수출액이 전체 수출액의 50퍼센트에 육박했다.

베트남 전쟁을 거치며 한국의 10대 재벌 순위가 바뀌었다. 저자는 "해체된 대우와 쌍용을 제외하고는 이때 형성된 10대 재벌 순위가 아직도 그 골격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베트남 전쟁이 한국 경제와 국방의 성장에 지대한 공로를 미쳤다는 주장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 성장과 발전이 전쟁에 직접 참여한 사람들에게도 돌아갔는가?

미안합니다, 베트남

책은 베트남 전쟁이 확전된 가장 큰 원인으로 미국의 정책적·전략적 오류를 들었다. 미국의 정보 판단에 의지해 전쟁을 치르고 있던 한국군의 오판은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이 와중에 '민간인 학살 사건'이 발생했다.

미국은 '밀라이 학살'이 알려지면서 민간인 학살을 자인했다. 하지만 한국군은 민간인 학살에 대해 전면 부인하고 있다. 북한군 소행이라고 떠밀거나 베트콩을 사살했을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당연히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문제는 국내에 보도되지 않았다. 그러나 외신은 달랐다. 1970년 1월 10일 <뉴욕타임스>는 "한국군이 수백 명의 베트남 민간인을 살해했다"고 전했다. 1972년 7월 31일 <AP통신>도 "맹호사단이 아이 7명을 포함한 29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다"고 보도했다.

또한 2000년 구수정 박사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80여 건에 달하고 약 9000명의 민간인이 학살된 것으로 집계됐다. 저자는 이를 "반드시 풀어야 할 인륜의 문제이며 시대적인 문제"라고 지적했다.

일본의 역사 인식을 이야기하든, 미군의 노근리 민간인 학살 사건을 이야기하든 모든 문제는 베트남에서의 과거사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이 모든 사건에 우리는 피해자이며 동시에 가해자였기 때문이다. - <베트남 전쟁>에서

지난 4월 4일, 베트남 전쟁 민간인 피해자들과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한국에서 만났다. 전쟁과 국가에 의해 크나큰 피해를 입었단 동병상련이 이들을 포옹하게 만들었다. 이들은 20세기 제국주의와 냉전이 만들어낸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국가에 의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다.

흔히 우리는 일본을 향해 메르켈 독일 총리가 폴란드인들에게 말한 "당신들이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계속 사죄하겠다, 나치의 범죄는 무한책임이다"란 문구를 들이댄다. 스스로 돌아보자. 잣대가 공평할 때 주장은 힘을 얻는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명진스님이 지난 7월 베트남에서 민간인 학살 생존자를 만나 큰 절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관련기사: 맹호부대 '참전군인' 명진 스님의 눈물).

너무도 늦어 죄스런 마음으로 나도 동참한다. 미안합니다, 베트남 그리고 전쟁터로 내몰린 모든 가여운 사람들.

덧붙이는 글 | <베트남 전쟁> (박태균 지음 / 한겨레출판 펴냄 / 2015.08 / 1만6000원)



베트남 전쟁 - 잊혀진 전쟁, 반쪽의 기억

박태균 지음, 한겨레출판(2015)


태그:#베트남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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