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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여행자들이 피렌체의 '아카데미아 미술관(Galleria dell'Accademia)'을 찾는 가장 큰 이유는 당연히 저 위대한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때문입니다. 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두오모에서의 감동에 너무 깊이 젖어 있었던 탓일까요?

구글 맵을 통해 '두오모'에서 '아카데미아 미술관'으로 가는 길을 몇 번이나 미리 숙지했건만 도대체 미술관의 입구를 찾을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경험은 비단 '아카데미아 미술관'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이탈리아에는 구글링을 아무리 섬세하게 해도 이곳처럼 입구를 찾기 어려운 미술관이나 박물관이, 성당들이 많았죠.

옛 건축물들을 그대로 남겨둔 도시 구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아무래도 초보 여행자답게 지나치게 구글맵에만 의존했던 게 실수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입구를 찾지 못해 같은 장소를 몇 번이나 헤매고 다니면 좀 어떻습니까? 거리를 거니는 것만으로도 가슴 설레는, 이곳은 이탈리아, 피렌체인데 말입니다. 근처 타바키 주인에게 어설픈 영어와 손짓, 발짓을 다 동원해 물어보고 겨우 미술관 입구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아카데미아 미술관'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원래는 미술학교였습니다. 그러던 것이 18세기 후반에 당시 토스카나 지방을 다스리던 레오폴도 대공이 자신의 수집품들을 기증하면서 미술관으로 변모했습니다. '아카데미아 미술관'에서 가장 먼저 만날 수 있는 작품은 잠 볼로냐의 <사비니 여인들의 납치>입니다.

잠볼로냐 '사비니 여인들의 납치'(석고 모형), 피렌체 아카데미아 미술관. 대리석 원작을 만들기 전 미리 제작해보는 석고 모형이지만 그 자체로도 홀륭한 작품입니다.
▲ 사비니 여인들의 납치 잠볼로냐 '사비니 여인들의 납치'(석고 모형), 피렌체 아카데미아 미술관. 대리석 원작을 만들기 전 미리 제작해보는 석고 모형이지만 그 자체로도 홀륭한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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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랑드르 출신으로 평소 미켈란젤로를 동경해 왔던 잠볼로냐는 로마 여행 후 이곳 피렌체에서 미켈란젤로의 작품들을 접하게 됩니다. 그리고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받아 여러 작품을 남기게 되죠.

이 <사비니 여인들의 납치>는 피렌체 시절, 대리석 원작을 만들기 위해 제작한 석고 모형이긴 하지만(실물은 우피치 미술관에 있습니다) 드라마틱한 장면 묘사가 보는 이를 압도합니다.

로마 '보르게세 미술관'에서 봤던 베르니니의 조각, <페르세포네를 납치하는 하데스>와 비슷한 듯하지만 훨씬 더 거칠고 역동적으로 느껴집니다. 미술사적 측면에서 보자면 미켈란젤로와 베르니니 사이에 위치한 매너리즘 조각가로서 잠볼로냐의 특성이 잘 드러난 작품이라 하겠습니다.  

잠볼로냐를 뒤로 하고 사람들의 흐름을 따라 가자 어느새 넓은 복도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저 멀리 복도 끝, 넓고 밝은 공간에 바로 그가 우뚝 서 있습니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책을 비롯한 여러 매체를 통해서 수없이 봐왔던 <다비드>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거대합니다. 분명, 복도 끝에서 바라본 작품인데 관람객들의 머리 위에 거대한 거인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정말 눈물이 날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심호흡을 하고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그의 앞으로 다가갑니다.

예상보다 거대했던 <다비드>

미켈란젤로, '다비드', 피렌체 아카데미아 미술관. 원래 시뇨리아광장의 '베키오 궁전' 앞에 있던 것을 작품 훼손을 막기 위해 이곳 '아카데미아 미술관'으로 옮겨놓은 것입니다.
▲ 다비드 1 미켈란젤로, '다비드', 피렌체 아카데미아 미술관. 원래 시뇨리아광장의 '베키오 궁전' 앞에 있던 것을 작품 훼손을 막기 위해 이곳 '아카데미아 미술관'으로 옮겨놓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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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 '다비드', 피렌체 아카데미아 미술관. 더이상 설명이 필요없는 르네상스 조각의 상징입니다.
▲ 다비드 2 미켈란젤로 '다비드', 피렌체 아카데미아 미술관. 더이상 설명이 필요없는 르네상스 조각의 상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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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가 지향하는 이상적인 인간의 모습을 대표하는 <다비드>. 눈앞에 나타난 골리앗을 똑바로 응시하고 서서 돌팔매를 막 던지려는 순간을 묘사한 <다비드>는 특유의 콘트라포스토(contraposto) 자세로 풀어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균형미에 팽팽한 긴장감까지 더해져 신비로운 느낌마저 듭니다.

잘 아시겠지만, 이탈리아어로 '정반대의 것'을 뜻하는 콘트라포스토는 한 쪽 다리로 몸을 지탱하고 다른 쪽 다리는 편안하게 놓는 구도입니다. 그러다 보니 몸 전체가 완만한 S자 형태의 곡선을 그리게 되고, 얼굴과 몸통, 허벅지 등 신체의 각 부분들은 조금씩 틀어지게 되죠.

정면을 바라보고 꼿꼿이 선, 정적인 모습의 아르카익 양식 이후 고전 그리스 시기에 만들어진 이 콘트라포스토 구도를 통해 인체 조각 형태의 다양한 실험이 가능해진 것은 물론입니다. 그리고,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다비드>는 르네상스 시기 부활한 콘트라포스토 양식의 정점이라 할 수 있죠.

'위대한 로렌초'의 후원으로 메디치 가문에서 지내던 미켈란젤로는 로렌초의 죽음 후 프랑스의 침입과 민중 봉기로 불안정해진 피렌체의 정치 상황을 피해 볼로냐를 거쳐 로마로 떠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저 유명한 <피에타>를 제작하게 됩니다. 그때가 그의 나이 24세 무렵입니다.

조각가로서의 큰 명성을 얻은 미켈란젤로가 피렌체를 다시 찾은 것은 1501년. 그동안 프랑스의 침입과 근본주의 수도사, 사보나롤라의 공포 통치에서 벗어난 피렌체는 민주적인 공화국 정부를 수립했죠(참고로 이 시기, 피렌체 공화국 정부의 가장 핵심적 인물이 바로 <군주론>의 저자 마키아벨리입니다).

공화국 정부는 미켈란젤로에게 '시뇨리아 광장'에 오래 전부터 놓여있던 거대한 대리석 덩어리를 주며 공화국의 승리와 자유 이념을 구현할 조각 작품을 주문합니다. 미켈란젤로는 피렌체의 두오모,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에 대리석을 옮겨다 놓고 작업장에 칸막이를 치고는 아무도 보지 못하게 한 상태로 작업을 진행합니다. 그리고 1504년, 미켈란젤로는 불과 29세라는 젊은 나이에 이 위대한 걸작 <다비드>를 피렌체 시민들 앞에 선보이게 됩니다.  

미켈란젤로 '다비드' (부분), 피렌체 아카데미아 미술관. 인체의 골격과 근육, 힘줄과 핏줄까지 섬세하게 묘사된, 르네상스 인간의 이상적 상징입니다.
▲ 다비드 3 미켈란젤로 '다비드' (부분), 피렌체 아카데미아 미술관. 인체의 골격과 근육, 힘줄과 핏줄까지 섬세하게 묘사된, 르네상스 인간의 이상적 상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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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무결'의 몸

성경에 묘사된 '다비드'가 어린 소년의 이미지라면, 미켈란젤로의 <다비드>는 완전무결한 청년의 모습입니다. 신체 각 부분의 골격과 근육은 해부학적으로 거의 완벽에 가까운 묘사입니다. 손등, 팔, 목덜미 등에 팽팽하게 부푼 핏줄과 힘줄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돼 있죠.

그런데 당시 피렌체 시민들의 눈에는 꼭 그렇게 보이진 않았나 봅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하체에 비해 상체가 훨씬 크고 두껍고, 머리와 손도 인체 비례에 맞지 않게 지나치게 크게 묘사돼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원래 두오모의 지붕에 올리려던 계획을 감안한 것으로 아래에서 올려다 보았을 때 더 두드러지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구약 성서의 영웅, 다비드가 5미터가 넘는 거대한 누드 상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망측하다는 평가도 받았습니다.

하지만 외침과 기독교 근본주의적 광풍이 한 번 휩쓸고 간 피렌체에, 그리스 고전 조각의 양식을 재해석해 내외부의 적을 맞아 싸울 만반의 준비를 갖춘 지적이면서도 용맹스러운 '다비드'의 모습은 그 자체로 피렌체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집니다. 그래서 원래 계획과 달리 피렌체의 정부 청사가 있던 '시뇨리아 광장'에 자리잡게 됐죠. 이후 작품 손상에 대한 우려 때문에 1873년 이곳 '아카데미아 미술관'으로 옮겨지긴 했지만 피렌체 르네상스의 상징으로 '다비드'의 위상은 여전합니다.

학창 시절의 미술책을 통해서는 물론이고, 서적을 통해서나 인터넷과 각종 영상물을 통해서 우리는 쉽게 <다비드>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비드>는 때로는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작품으로 다가옵니다.

그런데, 역시 진품이 주는 감동은 그 어떤 선명한 영상 자료로도 대신할 수 없다는 걸 이번에도 느낍니다. 나는 무엇보다 저 거대한 대리석상의 작은 한 부분, 한 부분에도 미켈란젤로의 땀과 숨결이 스며있다는 사실에 전율합니다.

그런데, 비단 <다비드>뿐이겠습니까? 이탈리아에 온 지 이제 겨우 7일 지났을 뿐인데, 그동안 만났던 수많은 예술 작품들 하나하나에서 얼마나 많은 감동을 느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감동은 무뎌지지 않고 오히려 새롭게 피어납니다. 한 작품 한 작품 만날 때마다 온 몸에서 감동을 느끼는 새로운 세포들이 생겨나는 느낌입니다. 그렇게 말 그대로 '벅찬 감동'을 안고, <다비드> 주위를 돌다가 겨우 발길을 옮깁니다.

사실 <다비드>가 전시된 곳에는 <다비드> 외에도 미켈란젤로의 작품들이 여러 점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공통점은 하나 같이 미완성의 형태로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성 마태오 상>을 비롯하여 네 점의 <죄수 상>, 그리고 <팔레스트리나의 피에타>까지 모두 미완성 작품입니다.

그것도 어느 정도 형상을 갖춘 상태가 아니라 이제 막 대리석에서 형상을 찾아낸 듯한 상태의 미완성입니다. 미켈란젤로 같이 위대한 작가가 도대체 왜 이런 미완성 작품들을 남겨뒀을까요? 물론 계약에 의해서 작품 제작이 이뤄지던 당시의 관행상, 작품 제작 중 계약 관계에 문제가 생기거나 하면 미완성의 형태로 작품이 남는 것은 종종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미켈란젤로의 이 미완성 작품들에는 그런 이유와는 확실하게 구별되는 특별함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미켈란젤로의 예술 정신입니다.

이 작품이 미완성이라고요?

미켈란젤로 '성 마태오 상', 피렌체 아카데미아 미술관. 미켈란젤로의 최초의 미완성 작품입니다. 조각예술에 관한 미켈란젤로의 고민을 알수 있는 작품입니다.
▲ 성 마태오 상초 미켈란젤로 '성 마태오 상', 피렌체 아카데미아 미술관. 미켈란젤로의 최초의 미완성 작품입니다. 조각예술에 관한 미켈란젤로의 고민을 알수 있는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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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시절부터 신플라톤주의의 세례를 흠뻑 받은 미켈란젤로에게 조각이란 불필요한 부분을 제거하는 과정이요, 물질 속에 속박돼 있던 형상(혹은 관념)을 찾아가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래서 미켈란젤로에게 완성된 작품인가 미완성된 작품인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죠. 완성된 형상을 통하지 않고도 주제를 표현할 수 있다는 생각. 그것은 르네상스 고전주의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새로운 미학 개념의 탄생입니다. 실제 내 눈앞에 서 있는 미켈란젤로의 미완성 작품들은 그런 점에서 오히려 현대 추상 미술에 더 가까워 보입니다.

미켈란젤로 '성 마태오 상'(부분), 피렌체 아카데미아 미술관. 미켈란젤로가 남긴 수많은 조각도의 흔적이 보입니다.
▲ 성 마태오 상(부분) 미켈란젤로 '성 마태오 상'(부분), 피렌체 아카데미아 미술관. 미켈란젤로가 남긴 수많은 조각도의 흔적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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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미켈란젤로의 첫 번째 미완성 작품, <성 마태오 상>을 봅니다. 자신을 둘러 싸고 있는 돌덩이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치고 있는 성 마태오. 왼손에 든 책은 분명 자신이 쓴 복음서일 것입니다. 자세히 보면 작품 전체가 미켈란젤로가 남긴 조각도 자국들로 가득합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 자국들에 손을 대고 미켈란젤로의 숨결을 느끼고 싶은 충동이 일어납니다.

맞은편, <팔레스트리나의 피에타>에서는 분명 완성되지 않은 얼굴인데도 인물들의 표정에서 비통함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표정을 묘사하지 않았는데도 인물들의 표정과 심정을 알 수 있었던, 박수근의 그림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더는 몸을 지탱할 수 없는, 휘어질 대로 휘어진, 예수의 앙상한 다리. 그것은 신이 아닌 한 여인의 아들로서 예수를 상징하는 것 같습니다. 아직 바티칸 '성 베드로 성당'의 <피에타>와 밀라노 '스포르체스코 성'에 있는 <론다니니의 피에타>를 만나진 못했지만 이 <팔레스트리나의 피에타>를 통해서도 미켈란젤로가 표현하고자 했던 고통과 번뇌가 뼈저리게 느껴집니다.        

미켈란젤로 '팔레스트리나의 피에타', 피렌체 아카데미아 미술관. 미켈란젤로가 남긴 4점의 피에타 중 하나로 이미 추상 예술로 넘어간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미완성 작품입니다.
▲ 팔레스트리나의 피에타 미켈란젤로 '팔레스트리나의 피에타', 피렌체 아카데미아 미술관. 미켈란젤로가 남긴 4점의 피에타 중 하나로 이미 추상 예술로 넘어간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미완성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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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다비드>와 그 앞에 나란히 서 있는 미완성 작품들. 결국, 이것들은 감상자의 입장에서만 미완성이었지 미켈란젤로 자신에게는 그 자체로 완성된 작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미켈란젤로의 작품들을 뒤로 하고 '아카데미아 미술관' 구석구석을 탐험하듯 돌아다닙니다. 기를란다요, 필리피노 리피, 페루지노, 카루치 등의 놓칠 수 없는 명화들도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2층 전시실에는 19세기 초반의 조각가, 로렌초 바르톨리니의 석고 모형들을 전시한 특별전이 열리고 있는데, 그중 가장 눈길이 가는 작품은 <아르노강의 님프>입니다. 작품 자체도 물론 아름다웠지만, 석고 모형과 대리석 작품을 서로 외면하는 듯한 위치에 함께 전시해놔서 보는 이로 하여금 색다른 감동을 안겨 줍니다.

여기저기서 '눈 호강' 했습니다

로렌초 바르톨리니 '아르노강의 님프', 피렌체 아카데미아 미술관. 로렌초 바르톨리니의 석고 모형과 대리석 작품을 서로 외면하는 듯이 함께 디스플레이 해 놓아서 색다른 감동을 느끼게 합니다.
▲ 아르노강의 님프 1 로렌초 바르톨리니 '아르노강의 님프', 피렌체 아카데미아 미술관. 로렌초 바르톨리니의 석고 모형과 대리석 작품을 서로 외면하는 듯이 함께 디스플레이 해 놓아서 색다른 감동을 느끼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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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초 바르톨리니 '아르노강의 님프'(부분), 피렌체 아카데미아 미술관
▲ 아르노강의 님프 2 로렌초 바르톨리니 '아르노강의 님프'(부분), 피렌체 아카데미아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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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카데미아 미술관'에는 의외의 눈 호강을 할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 그곳은 근대적 바이올린의 원형을 완성한 스트라디바리우스의 바이올린들을 만날 수 있는 전시실입니다.

언뜻 미술관과는 어울리지 않는 전시라는 생각도 들지만, 귀로만 들었던(그것도 음반을 통해서) 스트라디바리우스의 악기들을 실제 눈앞에서 만나니 그 자체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조각품처럼 느껴집니다.

특이하게 '아카데이마 미술관'에 근대 바이올린의 원형을 완성했다고 평가받는 스트라디바리우스의 바이올린들을 전시한 공간이 있었습니다.
▲ 스트라디바리우스의 바이올린 특이하게 '아카데이마 미술관'에 근대 바이올린의 원형을 완성했다고 평가받는 스트라디바리우스의 바이올린들을 전시한 공간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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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라디바리우스 전시실 후 <다비드>를 한 번 더 만나고 '아카데미아 미술관'을 나섭니다. 발걸음은 이제 '산 마르코 수도원'으로 향합니다. 예술로 승화된 프라 안젤리코의 숭고한 정신을 만날 차례입니다.

(* 6-3으로 이어집니다.)

○ 편집ㅣ김지현 기자



태그:#아카데미아미술관, #미켈란젤로, #다비드, #피렌체, #이탈리아미술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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