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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그 음식점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종로 2가 보신각 건너편 골목길에 돼지갈비집이 있었다. 값도 저렴하고 양도 많아 빈약한 주머니의 청년 학도들이 자주 찾는 곳이었다.

전두환 정권 말기. 청년 학도들이 군사독재 퇴진을 외치며 몸을 던질 때,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는 학생들은 광화문과 종로에 모여 행동을 함께 했다. 더러는 잡혀가서 조사 받고 훈방되기도 했지만 또 구속되어 감옥 생활로 이어지는 사람들도 없지 않았다.

다행히 전경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젊은이들이 모여 몇 점의 갈비를 안주 삼아 막걸리만 축내던 곳이 그 음식점이었다. 우리와 같은 대학생 아들을 두었을 법한 나이의 주인 아주머니는 사정을 잘 안다는 듯 말없이 막걸리 병을 날라다 주었다.

안주를 시켜야 그나마 매상이 오르는 것인데 한 번 시킨 갈비는 뼈까지 다 갉아 안주 삼을 정도이니 인상을 쓸 만도 한데 그런 빛은 전혀 없었다. 막걸리 기운에 호기를 부리며 전두환 정권이 곧 끝날 것을 선포한 것도 순 우리끼리만 통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 때,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서울 지부 성격인 서울 민통련(뒤에 서울민중연합으로 개칭)에서 실무자로 일하고 있었다. 재야 단체의 사무실은 6개월이 되지 않아 옮겨 다녀야 하던 시절, 서울 민통련은 서대문에서 중림동으로 또 홍제동으로 전전하며 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건물주와 사실대로 계약을 하면 응해 줄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이었다. 우리는 둘러대며 일단 계약을 하고 일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일이라는 게 독재 타도가 주 업무이다 보니 바로 들통이 나 계약 해지 통보를 받아야만 했다.

만만한 게 출판사요 또 오퍼 무역상이란 명목을 대고 계약을 했지만 그것은 그렇게 오래 가지 못했다. 출판사는 그런대로 둘러 댈 핑계거리가 있었다. 자료집이나 시위용 유인물 등을 산더미같이 쌓아놓고 우리가 만들 책의 재료라고 하면 처음엔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갔다.

그런데 오퍼상은 말도 안 되는 핑계였다. 외국으로부터 오더를 받아 송장을 작성하고 거기 합당한 물건을 보내는 일이 오퍼상인데, 운동권 사무실에서 그런 구석은 눈을 씻고 찾을래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홍제동 옛 화장터 가는 길 맞은 편 대로변에 위치해 있는 3층 건물 중 3층을 통째로 빌렸다. 그 때 용도를 우리는 학원으로 했다. 계획한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민통련 본부에서 하다가 중단된 시민 교양 강좌 민족학교를 우리 서울 민통련이 받아 할 생각이었다.

공간도 그렇게 꾸몄다. 사무실이 있고 세면실 겸 주방이 있고 숙직실이 있었으며 보다 넓은 공간을 강당으로 꾸며 놓고 있었다. 재야 단체의 교양 강좌란 오는 사람의 수를 전혀 예측할 수 없다.

백기완, 장기표 등 운동권에서 내로라하는 분들이 강사로 들어 있는 날은 아침부터 전경이 입구를 막아 출입 자체를 막았으니까 강사조차도 들어갈 수 없었다. 그래서 강당은 장판을 바닥에 깔아 많이 오면 많이 오는 대로, 또 적게 와도 그냥 바닥에 앉아 들으니까 강의를 그런대로 진행할 수 있는 형식이었다.

이곳에서 3년 넘게 서울 민통련이란 둥지를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주인 아주머니의 배려 때문이었다. 그는 화교로 서울에서 기반을 잡은 사람이었다. 우리말을 잘 하고 알아듣는 화교였는데, 경찰이 와서 3층 서울 민통련의 동정을 물어 볼 때면 한국말을 잘 못해 알아들을 수 없다며 손사래를 치는 것으로 방어를 해 주었다.

불이 번쩍하더니 입에서 피가 펑펑

불이 번쩍하더니 입에서 피가 펑펑 쏟아지기 시작했다. 휴지를 입에 가득 물고 근처 치과를 찾았다.
 불이 번쩍하더니 입에서 피가 펑펑 쏟아지기 시작했다. 휴지를 입에 가득 물고 근처 치과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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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변기에 빠진 이빨' 이야기를 하면서 이렇게 서울 민통련 이야기를 장황하게 하느냐 하면 배경 설명을 할 필요성 때문에서다. 사무실이 들어가 있는 홍제동 3층 건물은 지은 지가 오래 되었다. 따라서 1층에서 3층까지 꺾임 없는 민자 계단이 가파르기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가파를 뿐만 아니라 몹시 좁아서 사람들이 양쪽으로 오르내리면 딱 맞을 폭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잡고 올라갈 수 있게 만든 손잡이도 없었다. 다리가 불편한 내가 오르내리기는 정말 어렵고 힘든 건물이었다. 오죽했으면 등산을 하는 각오로 임했다고 하였을까. 늘 조마조마했다. 여차하면 사고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 그런 날이 오고야 말았다. 그 가파른 계단을 청소할 때였다. 3층에서 2층으로 내려가면서 밀대로 계단을 청소하다가 미끄러지고 말았다. 머리를 보호해야 한다는 본능으로 앞쪽으로 돌려 손으로 계단을 잡는다는 것이 이빨 부분을 모서리에 부딪치고 말았다.

불이 번쩍하더니 입에서 피가 펑펑 쏟아지기 시작했다. 휴지를 입에 가득 물고 근처 치과를 찾았다. 위 이빨 중간 부분 두 개가 뿌리만 남고 부러져 나갔다고 했다. 젊은 사람이 참으로 황당한 일을 당하게 된 것이다. 그 치과에 다니며 얼마간 치료를 받았다. 그리고 부러진 이빨을 해 넣어야 했다.

하지만 운동권 단체 실무자로 상근하는 입장에서 돈이 있을 리 만무했다. 두 개의 치아를 해 넣는 데는 적지 않은 돈이 필요했다. 본 이빨과 너무 확연히 차이 나는 누런색의 가치(假齒)를 붙이고 근 1년을 지내야만 했다.

우연한 기회에 한 후배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치대를 나와 그 당시 육군 의무병으로 복무하고 있었다. 나의 사정을 잘 아는 그가 치과를 하는 그의 친구를 소개해 주었다. 돈을 받지 않고 이빨을 해 달라고 특별 부탁을 해 주었다. 홍대 입구 높은 건물 5층에 치과를 하는 그 후배의 친구는 친형을 대하듯 정성스럽게 치료를 해 주었고 본 치아와 거의 구별이 안 될 정도로 예쁜 이빨 두 개를 가지런히 제 자리에 붙여 주었다.

웃을 때나 말을 할 때 이젠 손으로 입을 가리지 않아도 되었다. 그런데 이빨 모형을 떠 조금 남아있는 뿌리에 갖다 붙인 것이기 때문에 언제 떨어질지 모를 위험성이 있었다. 딱딱하고 질긴 음식을 피하라고 의사가 신신당부를 했기 때문에 그것이 늘 뇌리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 말이 마음의 짐이 되어 소화까지 잘 안 될 정도였다.

그런데 어느 날 딱딱한 음식도 아니었던 것 같은데, 해 넣은 이빨이 떨어지고 말았다. 지금만 같아도 치과로 달려가 떨어진 이빨을 다시 붙였을 터인데 그 때는 매사에 여유가 없어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떨어진 이빨을 틀니처럼 끼고 덜렁덜렁거리는 상태로 생활을 했으니,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처량하고 미련한 이로 보였겠는가.

변기에 대고 토하는데... 이빨 두 개가 사라졌다

이런 치아 상태에서 다시 이야기는 종로 2가 그 갈비집으로 돌아간다. 우리의 시국 성토는 그 강도를 더해 갔다. 노태우가 집권하고도 변한 것이 없다고 목청을 높였다. 노동 탄압과 학원 사찰 등 군사 독재의 잔재는 여전하다며 정부를 비판했다. 남북관계도 냉각 국면이 풀리는 것 같더니 제자리걸음이라고 아쉬움을 표시했다. 젊은이들의 분신 정국을 끝내기 위해서는 문민 정권이 빨리 들어서는 길밖에 없다고도 했다.

막걸리가 몇 순배 돌고 안주도 동이 날 즈음 속이 울렁거려 화장실을 찾았다. 아니나 다를까 빈 속에 들이켠 막걸리가 속에서 이상증세를 보인 것이다. 걸터앉아 편히 용변을 보는 좌변기가 많지 않던 시절, 그 음식점의 화장실은 쪼그리고 앉아서 볼일을 보는 변기였다.

술을 곁들여 파는 음식점의 화장실 상태는 더럽기가 한량없었다. 나는 그곳에 대고 속에 있는 것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미처 다 씹히지 않은 돼지고기며 밥알에 김치 조각 등 그날 먹은 것들이 고스란히 토해져 나왔다.

술을 곁들여 파는 음식점의 화장실 상태는 더럽기가 한량없었다. 변기에서 이빨을 찾은 나는 세면대에서 수십 번을 씻고 또 씻었다.
 술을 곁들여 파는 음식점의 화장실 상태는 더럽기가 한량없었다. 변기에서 이빨을 찾은 나는 세면대에서 수십 번을 씻고 또 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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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는 손가락을 목젖까지 집어넣고 토해야만 했다. 그만큼 속이 불편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손가락을 넣다 빼다를 반복하다보니 갑자기 위 중간 이빨 두 개가 사라진 것이다. 아뿔싸! 해 넣은 이빨이 제자리에 없는 것을 보면 분명 변기에 빠졌을 것이다. 나는 순간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변기에 빠졌을 이 이빨 찾기를 포기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찾아내어 제 자리에 끼어 넣을 것인가. 여느 때 같았으면 아무리 급해도 변기에 빠져 버린 이빨을 찾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일이 나로 하여금 그것을 찾게 만들었다. 이튿날, 종로 5가 기독교회관 로비에서 남북청년학생회담 성사를 위한 시민기자회견이 잡혀 있었다. 시민단체를 대표해 내가 성명서를 낭독하기로 되어 있었다.

나는 변기를 뒤지기 시작했다. 더러운 것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내림 물이 닿지 않은 변기 윗부분에 붙어 있는 대변 흔적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내가 토해낸 음식인데 뭐 어떠랴 하는 자위의 생각을 하며 몇 분을 뒤진 끝에 음식물 속에 섞여 있는 나의 이빨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때의 기쁨이란! 나는 찾은 이빨을 세면대에서 씻고 또 씻었다. 마음속으로 헤아린 숫자가 20은 될 정도로.

다시 제 자리에 끼운 변기의 그 이빨은 원래의 모습을 회복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 속 입안은 더러운 냄새로 진동을 했다. 또 다른 뒤틀림이 속에서 일어났다. 나는 헛구역질을 해 대며 몇 번이나 화장실을 더 찾아야 했다.

'구사일생'한 이빨, 20년 넘게 쓰고 있습니다

1988년 6월 ?8일 6.10 남북학생회담 성사 시민지원 결의대회에서 필자가 성명서를 발표하고 있다. 변기에 빠진 이빨을 찾지 못했다면 이 때 나의 모습이 매우 우스꽝스러웠을 것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 6.10 남북학생 회담 시민 지지 성명서 낭독 1988년 6월 ?8일 6.10 남북학생회담 성사 시민지원 결의대회에서 필자가 성명서를 발표하고 있다. 변기에 빠진 이빨을 찾지 못했다면 이 때 나의 모습이 매우 우스꽝스러웠을 것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 이명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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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화장실 행을 뒤로 하고 음식점으로 돌아가니 대화도 거의 파장의 분위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한 친구가 결론 비슷하게 지금까지의 이야기들을 정리해 주었다. 직선제 개현이 실현되어 노태우 정권이 들어섰지만 그는 전두환 군사 독재의 아류에 지나지 않는다, 제대로 된 문민정부를 세우기 위해 더 투쟁해야 한다, 단일화 실패로 정권을 군인들에게 넘겨준 양 김씨에 대한 운동권의 기대를 접어야 할 때가 되었다 등등.

이튿날 나는 기자회견 때 성명서 발표를 그 어느 때보다도 잘 해냈다. 앞 이빨 빠진 상태에서 저 성명서를 낭독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 때 변기에서 찾아낸 이빨을 끼우고 성명서를 낭독한 것을 아는 사람은 나뿐이다. 이 비밀은 지금도 그대로 묻혀 있다.

변기에서 구사일생 생환되어 온 나의 이빨을 20년도 훨씬 더 지난 지금까지 훈장처럼 달고 다니고 있다. 그 때 그 일을 생각하면 가끔 속이 울렁대는 것을 피할 수 없지만 여유 없는 나의 삶이 그것을 잊게 만들어 다행스럽다.

더러운 이야기지만 그렇게만 볼 수 없는 내겐 더러움 속에 핀 꽃 같은 이야기라고나 해야 할지.

덧붙이는 글 | '더러운 이야기' 응모 글



태그:#변기에서 찾은 나의 이빨, #6월 항쟁, #서울민통련, #종로2가 갈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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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 향기 그윽한 김천 외곽 봉산면에서 농촌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세상과 분리된 교회가 아닌 아웃과 아픔 기쁨을 함께 하는 목회를 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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