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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마을에 아이들이 자라고 있다. 이 자명한 사실. 아이들이 고통받고 있다. 이 완강한 사실. 평화는 아이들이 앓지 않는 것이다. '강정 평화마음 동화'는 구럼비라는 우주 놀이터를 아이들에게 돌려주기 위해 사실을 바탕으로 쓴 손바닥 동화이다. 그 마을에 아이들이 자라고 있음을 자주 잊은 일을 용서받기 바라는 글쓰기이다. - 기자 말

강정 평화마음 동화
 강정 평화마음 동화
ⓒ 이동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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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딜 가시는 걸까?'

엄마 손에 들린 검은 비닐봉지는 속이 안 보였다. 어라? 양초 한 개와 귤 세 개가 담긴 게  느껴졌다. 이게 뭐지? 느껴서 알아내다니! 신기할 새도 없이 엄마와 나는 움직였다. 의례회관 지나 순식간에 냇길이소 가는 오솔길로 접어들었다. 걸은 게 아니라 슝슝 옮겨가는 거다. 숲속 오솔길을 걷고 있는데 덤불 너머 냇가가 환하게 보인다. 참게들이 바위에서 물로, 물에서 바위로 오르락내리락.

엄마는 어디로 가셨지? 어느새 나만 혼자 냇길이소 아래 배락마진소 쪽으로 가는 바위에 서있었다. 어디서 왔는지 붉은발말똥게들도 바위로 올라왔다. 처음엔 두세 마리였다가 바글바글 내 종아리를 타고 올라오는 조그만 게, 큰 게…. 붉은발말똥게는 등껍질에 웃는 얼굴 무늬가 귀여운데, 나에게 오는 게들은 등껍질이 깨지고 다리가 뜯겨나간 부상자들이 많았다.   

'안 돼. 붉은발말똥게는 구럼비에 살아야 하는데 왜 여기 있는 거야? 여기 있으면 다 죽는다구. 데려다 줘야 해. 데려다 줘야 해.'
'어떡하지? 구럼비 가는 길은 펜스로 다 막혐쪄. 포구 앞 마농밭 철조망 쪽에 놓아주면 될까? 엄마 엄마 어떡해, 게들이 너무 많아요.'

붉은발말똥게들을 누가 주었는지 모를 바구니에 담는 중인데, 갑자기 어느 너른 마당에 사람들이 수북수북 앉아 있고 나도 맨 앞 감물 옷 입은 할망 앞에 앉아 있었다. 사람들 모두 동백꽃을 들었다. 내 뒤에 있는 사람들 속에 민성이 아방, 하르방 신부님도 계시고 평화책방 선생님도 계신다고 느꼈다.

감물 옷 입은 할망을 가만 보니 애월 사시는 외할머니였다. 할머니는 모르는 사람 같은 표정으로 내 손에서 동백꽃 가지를 가져다 허리춤에 꽂았다. 그러자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할망 앞에 자기 꽃을 내려놓고 서로 앞에 앉으려고 아우성을 쳤다. 눈앞이 왁왁하니 겁이 나서 달아나려고 일어서는데, 사람들이 다 사라지고 앞에 있던 할망이 커다란 동백나무로 변하는 게 아닌가. 커다란 나무에 꽃이 빨갛게 피어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발이 붙어 달아날 수도 없다. 

"상규야 이거 봐라. 구럼비가 많이 남아 있다!"

눈을 뜨니 등이 축축했다. 꿈이었다 꿈. 선풍기를 켠 채 마루에서 잠이 들었었다. 감자 찌는 냄새가 났다. 벌떡 일어나 부엌으로 갔더니 엄마가 열무김치를 식탁에 놓고 계셨다. 

"깼어? 이리 앉앙 감자 먹으라."

감자를 먹으며 엄마와 꿈 이야기를 했다. 꿈을 모두 말로 설명하기는 어려웠지만 붉은발말똥게와 동백꽃을 본 건 또렷이 기억이 났다.

"꽃점 치는 걸 봤어? 신기하네. 꽃점 치는 거 본 적도 없는 애가 어찌 그런 꿈을 꿨을까. 우리 상규 제주 강생이가 맞긴 맞구나야."
"꽃점이라는 게 진짜 있어요?"
"그래. 엄마 어릴 때 대신맞이 굿 끝나면 심방이 동백 가지 하나씩 뽑게 해서 그걸로 꽃점을 쳐줬지. 굿 할 때 상에 동백꽃 많이 꺾어 담아 놓잖아."
"그런데 엄마, 그 할망이 외할머니였어."

엄마는 먹던 감자를 내려놓고 물을 마셨다. 엄마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졌다.

"엄마 왜 울어?"
"응, 할머니가 많이 편찮으신디, 우리 상규 조들어졍(걱정돼서) 꿈에 오신 거 닮은게."

엄마는 양초 하나와 귤 세 개를 챙기셨다. 꿈과 다른 것은 기다랗게 찢은 흰 천과 붉은 천 조각에 외할머니와 내 이름을 써서 담은 것이다. 붉은 색은 남쪽 강정, 흰 색은 서쪽 애월을 나타내는 색이랬다.

엄마와 함께 냇길이소당으로 출발했다. 우리 마을에는 당이 많다. 산신백관을 모시는 큰당과 서당, 해녀와 어부를 위한 할망당과 새별당, 마을에서 좀 떨어진 냇길이소당과 여드렛당이다. 할망들이 바당밭 갈 때 들르던 할망당은 기지 공사장이 되었다. 중덕 바당(바다)도 몽땅 공사장이 되어 물질이나 낚음질을 못 한다. 땅밭도 잃고 바당밭도 잃어서 슬픈 마을이다. 

그러나 며칠 전에 나는 엄청 기쁜 사진을 보았다. 콧수염 감독님이 영화 촬영하면서 카메라헬기로 찍은 구럼비 사진이다. 아빠가 막 보여주셨다.

"상규야 이거 봐라. 구럼비가 많이 남아 있다! 여기 초록색 울타리 속이 할망물이랜."

살아남은 구럼비가 있었다. 할망당 가까이 있던 '할망물' 샘이 살아 있었다. 구럼비가 폭파되던 날 나는 할망물 속에 파릉파릉 오가던 새뱅이가 너무 불쌍했다.

'새뱅이들 다 죽었을 거야.'

그렇게 생각했는데 안 죽었다! 그 사진을 보고 나는 새뱅이처럼 파릉파릉 마루에서 마당으로 마당에서 마루로 뛰어 다녔다.

'담팔수 하르방, 우리 집만은 절대 빼앗기지 않게 해줍서'

"엄마, 마을에 큰당도 있는데 왜 냇길이소당까지 가요?"
"왜? 걷기가 힘들어부난?"
"아니. 그냥 궁금해서 그렇지."
"냇길이소당은 산신백관 둘째 부인을 모시는 당이야."
"그건 나도 알아. 첫째 부인은 서당에 있어."
"애월 할머니는 외할아버지에게 둘째 부인이야. 그래서 엄마는 냇길이소 일뤠할망이 외할머니를 더 잘 돌봐줄 것 같애."
"엄마, 일요일에 아빠랑 같이 애월에 놀러가요."
"상규야, 외할머니 이제 애월에 안 계셔. 몸이 너무 아파서, 외삼촌 집 가까운 제주 시내 요양원에 가셨어."

엄마는 또 우셨다. 햇빛이 무지 뜨거운데 엄마가 우니까 나도 눈물이 났다. 물론 꾹 참았다. 갈색 털에 회색 무늬 섞인 새가 구실잣밤나무 가지에서 후두두 날아갔다.

"엄마, 일뤠가 무슨 뜻이꽈?"
"날짜 세는 닷새 엿새 이레에 그 이레주."
"아, 그 이레가 일뤠꽈?"
"그래. 냇길이소당 옆에 여드렛당은, 이레 여드레할 때 그 여드레라."
"당 이름을 왜 일뤠 여드레로 지었을까?"
"일뤳당은 7일, 17일, 27일이 제삿날이고, 여드렛당은 8일, 18일, 28일이 제삿날이거든."
"우리 어멍은 참말로 박사이웁주 하하."
"맞다 맞아 하하."

엄마가 내 머리칼을 휘휘 헝클이며 웃었다. 길에서 배롱나무 짧은 꽃가지를 몇 개 땄다. 일뤠 할망에게 바칠 꽃이었다. 애월 외할머니 댁 마당에는 협죽도가 있었다. 분홍색 꽃잎이 맑게 웃는 꽃이다. 할머니는 협죽도에 독이 있다고 절대 꺾지 말라고 하셨다.

"독 있는 꽃을 왜 심었어요?"
"곱딱해서(고와서) 숨겄지. 우리 강생이 보고정허면(보고싶으면) 이 꽃 보젠."
  
신당에 오면 목이 쏙 움츠러든다. 울퉁불퉁한 밑둥과 뿌리로 검은 바위를 콱 움켜쥔 담팔수 하르방이 신당 주인이다. 나이가 500살도 넘었다. 그 앞에 가면 초록색 안테나처럼 나뭇가지들이 쑤욱 내려다보며 말한다.

'나는 네 생각을 다 안다~.'

소리는 안 들리지만 느낌으로 알 수 있다. 물론 희고 붉은 천들이 축축 걸려있어 살짝 무섭긴 하다. 그러나 이곳이 구럼비나 할망당처럼 사라져버린다면? 나는 분명 담팔수 하르방과 희고 붉은 천들이 하영(많이) 그리울 거다.

엄마가 켠 양초가 하늘하늘 타오르는 동안 나는 혼자 점치기를 해봤다. 엄마랑 내 앞으로 좋은 일이 오고 있나, 나쁜 일이 오고 있나. 손가락을 접었다 폈다 헤아려봤다.  

'좋은 일, 나쁜 일, 좋은 일, 나쁜 일….'

나쁜 일부터 시작하면 마지막이 좋은 일, 좋은 일부터 시작하면 마지막이 나쁜 일이다. 나는 좋은 일만 계속 오길 바라기 때문에, 헤아리는 걸 그만 두고 엄마처럼 소원을 빌었다. 

'일뤠할망, 외할머니 병 낫게 해줍서. 외할머니 병 낫게 해줍서.'
'담팔수 하르방, 우리는 이제 밭이 없수다. 우리 집만은 절대 빼앗기지 않게 해줍서. 밭은 내가 어른 되어 열심히 일해 또 살 수 있게 해줍서. 나는 어른 되어도 강정에서 살고 싶수다.'


태그:#강정 담팔수, #냇길이소당, #구럼비, #꽃점, #새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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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한국작가회의. 2000 한국일보로 등단. 시집 <이발소그림처럼> 공동저서 <그대, 강정>.장편동화 <너랑 나랑 평화랑>. 2011 거창평화인권문학상

** 월간 작은책에 이동슈의 삼삼한 삶 연재중. 정신장애인 당사자 인터넷신문 '마인드포스트'에 만평 연재중. 레알로망캐리커처(찐멋인물풍자화),현장크로키. 캐릭터,만화만평,만화교육 중. *문화노동경제에 관심. 또한 현장속 살아있는 창작활동을 위해 '부르면 달려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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