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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2008년 5월 9일 발병한 희소난치병, 데빅씨병, 좀 더 폭넓게 알려진 이름으로는 '다발성경화증'으로 목 아래가 마비되어 투병 중입니다. 평지도 드물고 대개는 내리막인 난치병의 코스. 제 아내도 예외 없이 가정도 무너진 채로 각종 합병증과 마비된 장기들을 안고 병상투병 6년째입니다. 모든 비슷한 분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투병을 응원하면서 이 글들을 올립니다. - 기자 말

2009년 9월 12일 제571회에 아내의 사연이 나갔다. 리포터로 탤런트 견미리님이 출연해주셨다. 이후 한 달 뒤부터 3개월간 집중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예상보다 치료가 길어져 지원된 금액보다 더 많은 치료비용이 들어갔다. 그래도 그때부터 재발되지 않도록 비보험, 고비용의 항암표적치료를 계속하기 시작했다. 기한 없는 재활치료와 함께.
▲ 첫 번째 희망의 손길 2009년 9월 12일 제571회에 아내의 사연이 나갔다. 리포터로 탤런트 견미리님이 출연해주셨다. 이후 한 달 뒤부터 3개월간 집중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예상보다 치료가 길어져 지원된 금액보다 더 많은 치료비용이 들어갔다. 그래도 그때부터 재발되지 않도록 비보험, 고비용의 항암표적치료를 계속하기 시작했다. 기한 없는 재활치료와 함께.
ⓒ KBS 방송화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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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사랑의 리퀘스트>에서 연락이 왔다. 우리 사연을 촬영하고 모금방송을 해주고 싶다고, 이곳 S병원 사회복지사와 상담 후 회답을 드렸더니 이틀간 방송 팀에서 와서 촬영을 해갔다. 하루는 충주까지 내려가서 아이들과 인터뷰를 하고, 하루는 병원으로 와서 병실 재활 운동하는 모습, 교수님 인터뷰까지 찍었다. 그리곤 바로 방송되었다. 2009년 9월 12일 저녁 6시에.

막내 딸아이가 많이 힘들어했다. 유난히 자존심이 강하고 친구들에게 사는 모습을 안 보이고 싶어 평소에도 친구들을 집으로 못 오게 할 정도니 더욱 안 찍고 싶어 했다. 촬영 전날 밤까지도 완강히 반대하던 아이는 우리 사정을 자세히 아시는 담임선생님의 설득에 결국 힘들게 동의를 해주었다. 리포터로 동행하신 탤런트 견미리님이 이렇게 말했다.

"아이가 말을 시켜도 잘 대답을 안 해서 애를 먹었어요."

참 죄송했다. 하지만 끝나고 나니 밝은 얼굴이 되어서 그나마 짐을 덜었다. 나중에 방송 때 견미리님은 개인적으로 컨테이너에서 보일러도 없이 지낸 딸아이를 위한 큰 금액을 따로 기부해주셨다. 꼭 보일러 설치하고 수도도 수리해주라고, 어쩔 수 없이 병원 생활비로 일부 사용하기도 했지만 정말 요긴했고 고마웠다.

병원을 떠도는 신종 유목민

곧 다른 병원으로 옮기려고 병원짐 정리를 하면서 그사이 늘어난 많은 것들을 남에게 주거나 버려야 했다. 차에 아내를 태우고 나면 실을 수 있는 공간이 별로 남지 않는다. 아내는 사지마비에 배변기능 마비까지, 그러다보니 에어매트리스에 기저귀, 넬라톤(소변을 배출시키기 위해 요도에 관을 넣어 주는 것) 도구들 등 꼭 필요한 간병용품을 우선 실어야 해서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짐 정리를 하다 보니 몇 달 전 둘째 아들과 시골집을 비우던 일이 떠올랐다. 병원비 마련이 첫째 이유이기도 했지만, 집을 비워두면서 생기는 문제, 겨울에 수도가 동파되거나 풀이 무성히 자라 흉가가 되는 문제도 있고, 방마다 쥐들이 난장판을 만들어 감당하기도 힘들어서 싼값에 급히 팔아야 했다.

20여 년을 달마다 사서 읽고 소중한 보물처럼 책꽂이에 모은 책들! 그 책만도 1톤 화물차량 적재함에 세 번 정도 실어서 다 치웠다. 처음엔 헌책방에 골라서 주려고 했지만 가려낼 시간조차 없어 포기하고 고물상에 모두 주어버렸다. 그중에서 정말 버릴 수 없는 몇 권을 빼고는.

총각 때부터 애지중지 월급을 쏟아부으며 한 장 한 장 사모은 LP 레코드판들! 무게가 만만치 않아 책 상자가 무겁다던 사람도 레코드묶음을 들면 입을 다물었다. 400장 정도를 버렸다. 내 삶의 오랜 부분들이 떼어져 나갔다. 나머지 살림도구들은 책과 음반에 비하면 아깝지도 않고 남을 이유가 더 없었다. 살림이 다시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아내가 살림을 하게 될지는 더 모르는 판국이니.

그릇들, 온갖 생활용품들을 무더기로 100리터짜리 봉투에 담아 내놓는데 거의 이삿짐 수준이다. 작은 가구까지 그렇게 한 집을 몽땅 정리하는 데 근 한 달을 씨름했다. 낮에는 일하고 밤으로만 하느라. 남은 건 사계절 필요한 옷가지 몇 개, 책 몇 권, 시디 몇 개, 자동차 트렁크에 들어갈 정도? 내 손으로 수십 년을 쌓은 가정을 내 손으로 허무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50년 인생에 남은 게 아이들 셋과 승용차 트렁크에 짐 몇 개라니

허무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다. 너무 가난해져서 슬픈 게 아니라 이제까지 아등바등 붙들고 끌어 모으며 살았는데, 정작 버리지 못할 만큼 소중한 것이 별로 없더라는 사실 때문이다. 그런데도 아내가 아프기 전에는 가난해서 힘든 것처럼 그렇게 불평하고 살았다는 게 어이가 없었다. 큰아이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 집 다 정리하고 보니 승용차 트렁크에 들어갈 만큼이더라. 뒷좌석에 너희들 셋 태우고 옆에 엄마 태우고. 간단해지네. 의미가 있다고 매달리던 일들 중에는 안 해도 별 문제가 없는 것도 있고, 어떤 사람은 공들이고 믿었어도 정작 힘들 때 아무 도움도 안 되기도 한다. 허무하게도."

9월 12일, <사랑의 리퀘스트> 방송이 나가고 사흘 후, 간신히 예약된 수원의 한 재활병원으로 옮겼다. 하지만 우릴 반기는 것은 보살핌이 아니라 처음부터 거부당하는 황당함이었다. 환자 7명을 한 사람이 24시간 교대도 없이 돌본다면서, 집사람은 상태가 너무 심해서 감당을 못한다고 중국동포 간병인이 울상을 지었다. 대소변, 식사문제… 방치 될 아내모습이 끔찍하게 상상되었다. 할 수 없이 비싼 돈을 주고 개인 간병인을 딱 일주일만 불렀다. 아내가 아픈 지 1년 반 만에 처음으로.

2009년 추석 무렵, 아내는 누구와 통화를 하는지 노래를 듣는지 기분이 좀 풀린 표정이다. 바로 옆 커튼 넘어 침대가 추석 날, 음식이 목에 걸려 질식해서 생명의 위험이 오갔던 환자의 자리다.
 2009년 추석 무렵, 아내는 누구와 통화를 하는지 노래를 듣는지 기분이 좀 풀린 표정이다. 바로 옆 커튼 넘어 침대가 추석 날, 음식이 목에 걸려 질식해서 생명의 위험이 오갔던 환자의 자리다.
ⓒ 김재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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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그동안 못한 직장일이나 좀 열심히 해야겠다고 일하던 중 전화가 왔다. 수원 재활병원 의사선생님 말씀이 아내의 간수치가 정상수치보다 3~4배 높다고 급하게 병원으로 오란다. 일 접고 씻고, 부랴부랴 수원으로 도착하니 의사는 이미 퇴원하고 없었다. 강남 S병원 간호사실로 열심히 의사를 찾는 전화를 했으나 의사는 대답을 안 해준다. 그때부터 슬슬 일이 꼬이고 조급한 마음에 그 병원이 미워지기 시작했다. 나중엔 완전히 등을 돌리게 되는 속상한 일이 생겼다.

아내는 구토도 하고 얼굴색이 창백해져 전화를 다시 했다. 결국은 간호사가 급하면 응급실로 오라는 말을 마지못해 한다. 수원 재활병원 퇴원처리. 응급실로 올라갔다. 그러나 응급실에서 신경과와 통화하더니 기가 막힌 말을 한다. 의사가 오라고 하지 않았다고, 응급실에 받을 수 없으니 나가달라며 시트 두 장을 바깥 시멘트 바닥에 깔아준다. 거기에 눕혔다 가라는 일방적인 통보와 함께.

상처를 내는 건 순간이지만 아무는 데는 오래 걸린다

오라고 해서 온 게 아니냐고 항의를 했더니 그건 신경과 간호사가 한 이야기니까 소용없단다. 의사는 내려와 보지도 않고, 응급실 의사들은 자기 소관 아니라고 하고. 오갈 데 없이 길로 나가게 생긴 꼴이 하도 속상하고 화나서 기어이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응급실 입구 시멘트 바닥에 환자를 눕혀놓고 돌아서버린 의사들이 미워서 악을 쓰고 울고 말았다. 말하다보니 분해서 또 언성이 높아지고, 소리지르다보니 서러움이 복받쳐 또 눈물이 쏟아지고….

응급실 사람들이 다 구경 난 듯 보고 듣는 상황이었지만 너무 속상해 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입원 퇴원을 몇 번이나 한 등록환자이고 중증 사지마비 환자인데도 상관없이 바삐 팽개치는 게 무슨 한국 최고 병원이란 말인가. 나중에야 미안하다고 응급실 인턴 두어 명이 사과했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속으로는 '길에서 죽을망정 다시는 이 병원을 오지 않아야지' 하는 각오를 하면서. 그날의 맺힌 서운함과 상처는 몇 년이 지나도록 잊히지 않았고, 누군가 그 병원 이름만 말해도 좋지 않은 감정이 여전히 떠올랐다.

그 소동 후 한국다발성경화증환우회 간사님 소개로 늦은 밤 간신히 용인의 한 재활병원에 도착했다. 두 사람이 다 점심 저녁을 굶고 녹초가 되어 늘어졌다. 세 군데 병원 문턱을 넘나든 길고 지친 하루.

낮선 처녀를 껴안고 힘쓴(?) 응급상황

그런데 며칠 있다 보니 힘들게 환자를 돌보면서 고생을 하는 가족이 나만 있는 건 아니었다. 병실 바로 옆 침대에 37살 먹은 처녀가 3년째 누워 있었다. 뇌수술을 세 번이나 했는데 목에 호스를 꽂고 그곳을 통해 먹고 가래를 빼내다가, 최근 호스를 빼고 목을 봉했다고 한다. 그 뒤로 계속 먹을 때마다 숨이 막히고 가래가 쌓여 수시로 비상이 걸리는 걸 곁에서 보았다.

추석날이었다. 명절을 쇠러 갔는지 사람들이 많이 빠졌다. 특히나 남자 직원들은 더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간호사가 숨 넘어 가는 듯 급하게 도움을 요청했다. 가보니, 그 처녀 환자가 숨이 막혀 얼굴이 하얗게 변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 처자의 아버지와 간호사가 3명인가 빙 둘러서 발을 동동 구르며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나는 엉겁결에 간호사의 지시에 따라 그 처자의 등 뒤에서 팔로 가슴 아래를 손깍지를 끼고 정말 온 힘을 다해 위로 몇 번을 세게 쓸어 올렸다.

그리 심각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참 민망하고 엄두가 안 날 일이었다. 아무리 환자지만 처녀의 젖가슴 아래를 깍지를 끼고 위로 힘주며 쓸어 올린다는 게. 그러나 사태가 워낙 심각했다. 아무 생각할 겨를 없이 반복해서 등 뒤에서 당겨 올리는데 마침내 억억거리다 다행히 입으로 음식물을 토하였다. 알고 보니 아버지가 추석 음식을 먹이는데 채 내려가기도 전에 계속 넣어주다가 식도에 쌓여 막혀버린 것이었다. 사람이 그리 간단한 일로 죽을 수도 있다는 실감을 섬뜩하게 했다.

그 처자를 간호하는 아버지는 칠순이 넘었다. 그런데 환자인 딸은 침대에서 내려오지도 못하고 먹기만 하다 보니 몸무게가 보통이 아니었다. 작은 병원이라 목욕봉사 오는 팀도 없고, 그 아버지가 침대에서 옷을 벗긴 채 기저귀를 갈거나 몸을 씻겨주곤 했다. 제대로 커튼을 닫지 못해 커튼 사이로 민망한 장면을 보게 되는 적도 여러 번 있었다. 대소변을 치우고 목욕시키고 밥 먹이다가도 수시로 이런 소리를 탄식조로 했다.

"야야, 차라리 죽어라, 이러다 내가 먼저 죽겠다!"

칠순 넘은 자신이 떠나면 막내딸이 어떻게 될지가 큰 짐이었나 보다. 그에 비하면 나는 아내와 비슷하게 살 수 있으니 엄청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 걸까? 잘 모르겠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2009년 9월부터 2009년 10월 사이에 병원을 전전한 이야기입니다.



태그:#희귀난치병, #투병,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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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내 인생의 핸들이 내 손을 떠났다. 아내의 희귀난치병으로, 아하, 이게 가족이구나. 그저 주어지는 길을 따라간다. 그럼에도 내 꿈은 사람사는세상을 보고 싶은 것, 희망, 나눔, 정의, 뭐 그런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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