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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치니의 도시 루까는 그냥 산책하기에도 좋은 아름다운 곳이다.
▲ 루까의 성벽위 산책길 푸치니의 도시 루까는 그냥 산책하기에도 좋은 아름다운 곳이다.
ⓒ 장윤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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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에서 약 한 시간 반 정도. 푸치니의 고향으로 유명한 루까는 비가 그치고 비로소 얼굴을 내민 햇살 속에 명랑하고도 즐거워 보였다. 오늘은 일요일이라 주변에서 축구 시합이 있는지 유명 축구 클럽 유벤투스의 깃발을 들고 경적을 울리며 시내를 질주하는 자동차가 도로에 꽉 차 있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보존이 잘 되어 있다는 성벽으로도 이름난 도시인 루까. 그러나 이 도시는 무엇보다도 이탈리아의 예술, 그 중에서도 이탈리아인들이 선천적이라고까지 말하는 음악을 상징하는 도시이다. 나비부인, 투란도트, 라보엠…. 그러니 오늘 이곳으로 오면서는 자연스럽게 음악을 듣게 되고 음악을 생각하게 된다.

푸치니의 고향 루까는 푸치니에 관한 것으로 거의 뒤덮여 있다 시피하고, 전 세계에서 오페라를 공부하고 사랑하는 이들이 많이 찾아오는 곳이다. 유럽에서 손꼽히는 음악의 나라답게, 이탈리에서는 푸치니뿐만 아니라 베르디도 전 국민적인 사랑을 받고 있으며 밀바 같은 칸초네 가수들도 전 세계에 진출해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공연하 바 있는 '뉴 트롤즈' 같은 프로그레시브 그룹들도 높은 수준을 보여준다.

오페라의 수록곡들이나 가곡들은 우리가 고등학교 때 합창대회를 하거나 음악 시험을 볼 때면 빠지지 않고 나오는 레퍼토리 중의 하나였다. 이렇게 음악가들이 국민적인 사랑을 받고 그 고향에 기념관이 세워지고 끊임없는 방문을 받는 것이 부럽기도 하다. 우리나라에는 이런 대접을 받을 만한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 누구의 음악이 한 도시의 관광자원이 되고 세대를 건너 불리워질 수 있을까.

윤이상? 안익태? 아니면 조수미? 신영옥? 장영주? 아니다. 이 쟁쟁한 음악가들을 제치고 어렵지 않게 떠오르는 이름은 클래식이 아닌, 대중음악의 영웅이요 전설의 이름이다. 조용필, 그 사람밖에는 아무도 떠오르지 않는다. 푸치니와 베르디가 한 트럭으로 와도 바꾸지 않을 이름이다.

루까에서 조용필을 생각하다

1980년대 조용필의 음악은 그의 팬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알 만큼 크게 히트했었으나, 막상 그 당시 나는 조용필의 음악을 많이 듣지 않았다. 오히려 서구의 대중음악에 완전히 빠져 있었다. 1970년대와 1980년대를 관통하던 하드록이나 프로그레시브, 재즈, 그리고 틈틈이 들었던 제3세계의 뛰어난 음악가들의 음악 말이다.

지금도 좀 그렇지만, 나는 당시에 음악의 '수준'을 엄청 따지면서 듣는 편이었고 그런 현학적이고 자기 도취적인 담론을 즐겼었다. 오빠들과 둘러앉아 해적판으로나 나돌던 유명한 음반들을 듣고 평가하고, <전영혁의 음악세계> 같은 라디오 프로그램에 하루가 멀다하고 엽서를 보내던 그런 시절이었다. 당시 나와 같은 음악을 즐기던 사람들은 은근히 한국의 대중음악을 무시하기까지 했던 편협함이 있었다.

그럴 수도 있었던 것이 내가 좋아하던 음악들이 대부분 밴드 음악이었고 우리나라는 밴드 음악이 활성화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1970~1980년대 서구의 밴드 음악들은 정말 뛰어난 수준이었다. 놀라운 연주 실력과 편곡 능력, 그리고 실험적인 음악들로 가득 찬 밴드들이 널려 있었다. 아무리 음악의 다양성이 좋고 개인적 취양이 중요하다지만, 나는 아직도 '음악적인 면'에서는 지금의 음악가들이 그때에 못 미친다고 생각한다. 다양성을 존중한다고 해서 클래스가 없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조용필, 클래스를 보여주다

루까의 성벽 옆 도로는 주말 축구를 즐기는 이탈리아인들이 점령했다.
▲ 루까에서 만난 축구광들. 루까의 성벽 옆 도로는 주말 축구를 즐기는 이탈리아인들이 점령했다.
ⓒ 장윤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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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나도 대학에 들어가면서는 이전보다 음악을 잘 안 챙겨듣게 되었다. 오빠들과 경쟁적으로 모았던 수많은 LP들에 뽀얗게 먼지가 쌓여가던 즈음, 1992년에야 나는 조용필의 음악과 다시 조우하게 되었다.

1992년은 대통령 선거의 해였다. 그 때 내 주변에서는 이른바 '전민항쟁'이라는 단어가 유행이었다. 이제는 자세히 생각나지 않지만, 그때도 1987년 같은 대규모 항쟁이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 바짝 긴장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3당 합당에 이은 대선의 패배는 허무감을 안겨주었고, 전민항쟁도 일어나지 않았다. 대선 때까지 몹시 긴장 상태에 있던 나는 갑자기 방향을 잃은 듯했다. 학교도 졸업했고,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운동을 계속하던 선배들도 갈려 나갔다. 그나마 현실을 직시하고 잘 적응한 선배들은 어떻게든 취직도 하고 국회의원 보좌관이 되거나 심지어 사법고시까지 패스하기도 했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이름없는 단체들에서 최저 생계비도 안 되는 돈으로 버티어가고 있었다. 학원이나 학습지 교사 등 사교육 시장에 뛰어들어 생계를 꾸려나가는 사람들도 많았다. 아무 준비 없이 현실로 나오니 불안함과 약간의 배신감, 그리고 기성 사회를 너무 몰랐다는 좌절감이 밀려오던 시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백수로 집안의 눈총을 한 몸에 받을 때였다. 연말의 가요 시상식을 보고 있었다. 분명하게 생각이 난다. 조용필이 초대가수로 나와서 14집에 있는 <슬픈 베아트리체>를 불렀다. 순간 정신이 확 깨는 느낌이었고, 오랜만에 노래로 인한 무한한 감동을 느낄 수 있었다. 다른 가수들과는 차원이 다른 음악이었다.

당장 14집 테이프를 사서 테이프가 다 늘어지도록 들었다. <고독한 러너>나 <추억에도 없는 이별> 혹은 내가 지금도 베스트로 꼽는 숨은 명작인 <슬픈 오늘도 기쁜 내일도> 같은 명곡들이 수두룩했다. 트로트 풍의 <이별의 인사>마저도 중국에서 모셔왔다는 전통 현악기의 대가가 연주하는 연주 덕분에 감칠맛이 살아 있었다.

그때부터 틈틈이, 조용필의 음반을 역순으로 들어나갔다. 명반으로 꼽히며 우리나라에서는 드문 컨셉트 앨범인 13집에서부터 예전의 음악들은 들어보니 익히 알고 있었던 곡들이었지만 새삼스레 감동적이었다. '꿈'이라는 주제로 이루어진 13집과 인생의 단맛 쓴맛을 모두 보고 농익인 경륜을 쏟아내는 듯한 14집은 당시 갈 길을 몰라 헤메던 내게 얼마나 큰 위안이 되었는지 모른다.

조용필 하면 1980년대가 전성기라고는 하지만, 1990년대의 음반들도 정말 뛰어난 솜씨를 보여주는 명곡들로 채워져 있다. 이번 19집 앨범처럼, 조용필은 매 음반마다 빈틈없는 편곡과 연주, 아름다운 가사와 절제된 보컬로 한 차원 높은 음악 세계를 펼쳐 보여주었다. 그토록 오랫동안 음악을 하면서 언제나 일정 수준 이상의 음악을 들려준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1980년대의 음악도 마찬가지다. 나는 아직도 <고추잠자리>나 <자존심> 그리고 <못 찾겠다 꾀꼬리> 같은 곡들은 한국의 '프로그레시브'로 불러도 손색이 없다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조용필은 음악을 너무나 멋지게 만들어냈다. <친구여>나 <슬픈 베아트리체>가 클래식 곡들보다 못할 이유가 없고, <추억 속의 재회> 같은 곡을 들으면 그 완벽함에 전율이 일 정도다.

그 누가 이런 실험적인 음악을 하는가? 하더라도 그 누가 그런 실험들을 그토록 대중적으로 풀어내는가? 지금 들어도 전혀 시대에 뒤처지지 않는, 아니 오히려 아직도 시대를 앞서가는 듯한 영감을 주는 곡들이다. 서양의 밴드 음악들에 편중되었던 내 귀를 반성하게 하는 곡들이다.

진보적인 그러나 대중적인... 그리고 '한국'적인

아마도 나의 세대에서부터, 웬만하면 피아노 학원을 다들 다녔을 것이다. 지금도 다수의 아이들은 남녀불문하고 피아노 학원을 다닌다. 바이올린이나 첼로를 배우는 아이들도 있다. 작년 입시에서는 실용음악과가 화제가 되었다. 학과마다 몇 백 대 1이 넘는 경쟁률을 보이며 최고의 인기학과로 등극한 것이다.

아마도 한류의 영향이나 각종 리얼리티 순위 경쟁 프로그램에서 보여준 스타 탄생의 후광이 아닐까 한다. 그런데도 음악 교육은 몇몇 소수를 제외하고는 초등학교 때로 끝난다. 음악을 더 배우고 싶어도 입시 때문에 그만두게 되며, 고등학교에서는 아예 음악 시간이 없어지는 경우도 허다하다고 하지 않는가.

음악은 가장 대중적인 사랑을 받고 있고 또 대중들에게 노출 빈도도 높은 예술장르이다. 상대적으로 미술은 음악만큼 대중적이지도 않고 접근성도 떨어지며 돈도 많이 든다. 그러나 대중음악의 표면적인 확장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변을 둘러싼 음악세계는 아직도 뭔가 빈곤하게 느껴진다. 아이돌 음악은 그 화려함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비주얼이 중심이고 음악적으로는 성숙하지 못하다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지나친 성 상품화도 거슬린다.

아이돌 음악의 주 소비층인 10대들조차도 걸그룹이나 보이그룹이 음악적으로는 크게 볼 것이 없다고 무시하곤 한다. 소위 '가창력'이 있다는 가수들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개성 있고 감동적인 음악보다는 누가 어디까지 고음을 내지를 수 있는가 하는 쓸데없는 소모전이 만연하고, 듣기 편한 음악만이 난무한다. 그렇게 음악이 소비되는 구조가 단단히 만들어져 있다.

자연속에서 음악과 삶과 죽음을 생각해보는 시간.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을 들었다.
▲ 스위스 숙소 옆의 마을 공동묘지 자연속에서 음악과 삶과 죽음을 생각해보는 시간.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을 들었다.
ⓒ 장윤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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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에서는 클래식 음악의 엄숙주의와 권위주의가 여전한 듯하다. 음악이 좋아서 전공하려고 하면 부모들은 일단 긴장한다. 클래식 음악 전공에는 엄청난 돈이 들어가서 서민들은 감히 꿈꿀 수 없는 영역이 된 지 오래다.

실용음악과는 높은 인기에도 불구하고 부모들의 기피와 걱정의 대상이다. 예전처럼 '딴따라' 취급을 하지는 않지만, 대중음악 전공이라는 것은 헤아릴 수 없는 불안함을 안겨준다. 많은 부모들이 음악을 좋아하는 아이들에게 그냥 취미로만 하라고 권한다. 아직도 예술 분야는 우리에게 위험한 미래를 가져다주는 '고위험군' 직업일 뿐일까.

음악을 비롯한 모든 면에서, 그저 조용필처럼만 했으면 좋겠다. 진보적이지만 대중적이고, 그러면서도 대단히 한국적인 그 무엇말이다. 오랫동안 자신의 영역에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면서, 정도를 걸으면서, 조금씩 조금씩 완성도를 높여 나가면 우리의 삶도 더 나아지지 않을까. 이미 <조용필처럼>이라는 노래도 나와 있는데, 그 심정이 내 심정이다.

음악이 주는 행복

루까를 지나, 베네치아를 거쳐 스위스로 넘어왔다. 비가 흩뿌린다. 술 마시기에 좋은 날씨다. 알프스의 영봉들이 가까이 있는 인터라켄 부근의 라우터브루넨이라는 작은 마을에 자리를 잡았다. 빗발 속에 멀리 거대한 산봉우리들이 들어오고, 크고 작은 폭포들이 쏟아져 내리는 비경이 보인다. 마트에서 술을 사다 마시며 와이파이를 켜고 다시 조용필과 그 외에 우리가 사랑했던 음악들을 차례로 불러내 본다.

자연의 장엄함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한 잔의 술을 마시며 거장의 음악을 듣는 이 순간이 바로 인생의 행복이다. 예술이 주는 최고의 순간을 만끽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거칠고 황량할 것인가. 이국의 먼 땅에서 위대한 음악을 들으며 순간의 행복에 도취된다. 조용필이 있어 행복하고 그의 음악에 감사하고 또 앞으로도 이런 순간을 잊지 않고 찾으리라. 오늘의 여행기는 그저 조용필에 대한 헌사, 그것으로 채우고 싶다.

덧붙이는 글 | '헬로~ 조용필!' 공모 응모 글입니다.



태그:#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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