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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사촌언니 농장에 볼 일이 있어서 배추를 수확하는 언니를 쫓아갔다. 돌아오는 길에 차 트렁크 가득 배추를 실은 언니는 "너도 몇 개 가져가서 먹어라. 약 하나도 안치고 얼마나 맛있는지 몰라" 하며 배추 네 포기에 파 대여섯 뿌리가 든 비닐봉지를 건넸다. 이걸로 뭘 하나 생각하며 일단 받는 나를 보며 언니가 웃으며 말했다.

"너 잘 생각하고 받아. 이거 애물단지 되는 수가 있거든. 니가 뭐 김치야 담겠니. 슬쩍 데쳤다 국이라도 끓여 먹어라."

들을 때는 몰랐는데 돌아오는 차에서 생각하니 은근히 약이 올랐다. 자신은 전업주부고 알뜰 살림꾼이니까 김치고 국이고 척척 하겠지만 직장 다니는 니가 제대로 하는 게 있냐 뭐 이런 뜻이잖아?

김치 담그기 다섯 번, '나는 안 되는구나'

맛은 모르겠지만 겉모습은 그럴 듯 합니다.
▲ 그럴듯하게 마무리 된 첫 번째 김치 맛은 모르겠지만 겉모습은 그럴 듯 합니다.
ⓒ 최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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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는 김치 담기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다. 결혼 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자신만만하게 김치를 담그겠다고 사온 배추 네 포기를 절이기부터 실패해서 담가 보지도 못하고 버렸다.  다음 번에는 어찌어찌해서 절이긴 했는데 양념 맛이 너무 이상해서 아무도 먹지 않았고(어떻게 김치가 쓴 맛이 날 수 있는지?), 좀 쉬운 걸 해보겠다고 총각김치를 담갔는데 무가 너무 아려서 역시 실패.

그렇게 총 다섯 번의 시도 끝에 내린 결론이 '아, 김치는 너무 어렵다. 내 실력으로는 안 되겠어'였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여기저기서 얻어다 먹는 김치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지만 사실 얻어먹는 김치는 편하고 맛있고 경제적이다. 약간의 뻔뻔스러움과 비굴함에 큼직한 딤채만 갖추면 만사가 해결되는데.

하여튼 받아온 배추를 일단 다용도실에 던져 놓고 주말이 될 때까지 매일 저녁 약속이 있어 까맣게 까먹어 버렸다. 토요일 아침 세탁기를 돌리려는 내 눈에 배추가 담긴 파란 비닐봉지가 들어왔다.

'오마이갓 쟤들 어쩌면 좋냐?'

들여다 보니 다행히 날이 추워서 배추는 아직 안녕히 계신 것 같다. 일단 파를 꺼내어 다듬어 놓고 배추 겉잎을 따서 데치기 시작했다. 신문지에 네 통의 배추를 싸서 다시 다용도실 벽장에 넣었다. 배추를 데쳐서 행구는 데만도 한 시간 반이나 걸렸다. 그러면서 머릿속으로 남들은 사십포기 김장도 한다는데 그깟 네 포기 한번 담가봐? 말아? 계속 망설이다가 담그려고 해도 지금은 재료가 없으니 월요일까지 생각해 보자로 결론.

뭔가 자신없는 일을 할 때 항상 시작하는 방법. 인터넷으로 김치담그는 법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블로그도 있지만 역시 82cook.com이 제일 충실하다. 배추 절이기랑 양념, 순서가 사진을 곁들여서 자세히 적혀있다. 호오라. 이 정도면 나도 김치담글 수 있겠는 걸. 친절한 인터넷 정보를 여기저기 검색하며 배추 달랑 네 포기 담글 거면서 별의별 김치 검색을 다 한다.

어떤 집은 육수를 끓여서 붓기도 하네. 누구는 고춧가루를 매운 것과 보통 것 반반씩 넣고, 새우젓과 액젓에 마늘, 생강을 넣어 갈아서 쓰는 사람도 있구나. 내친 김에 김치명인 강순의 사이트에 들어가서 더덕김치까지 다 구경하고 나니 무려 세 시간이 지나갔다. 나 참 그 사이에 김치 담가도 됐겠네. 하여튼 월요일에 김치 담그기로 하자.

배추 꼴랑 네 포기 담그는데, 이틀을 소진하다

월요일 퇴근 시간에 회사 앞 통인시장에 갔다. 다들 김장준비로 북새통인 야채가게에서 달랑 무 두 개, 갓 한 단, 쪽파 반 단을 달라고 하려니 좀 쑥스러워서 당장 필요 없는 계란 한판과 당근까지 샀다. 빛깔 고운 고춧가루도 만 원 어치 사고 오는 길에 생각해 보니 앗차! 김치를 절이려면 통이 있어야지. 우리집에 있는 가장 큰 냄비도 배추 네 포기는 어림없지. 결국 나중을 생각해서 열 포기는 족히 절일 수 있는 파란색 플라스틱 바구니까지 샀다. 배추 5천 원 어치 얻어서 김치 담근다고 장을 보고 나니 4만 원이 날아갔다. 이러니까 얻어 먹는 게 남는 거라니까.

저녁을 먹고 나니 벌써 아홉시. 절이는 시간이 여섯 시간이니까 지금 잘못 시작하면 세 시쯤 깨야할 수도 있다. 열두 시쯤 절이기 시작해야지. 우선 속 넣을 것을 만들자. 가장 간단한 것부터 시작. 냉동실에 돌아다니는 찹쌀가루를 물에 풀어 찹쌀풀 끓이기를 시작했다. 얼마나 넣어야 하지?

인터넷 레시피들은 전부 배추 열 포기, 사십 포기 단위가 이 정도니 그 반도 안 되는 양에는 얼마가 적당한 건가? 조금만 끓여서 넣었다 표시나는 정도로 하는 것이 안전하겠다. 다음은 야채 씻고 다듬기. 좁은 씽크대 안에서 씻고 다듬으려니 온통 물이 튀어 난리다. 신문지 몇 장을 바닥에 깔고 계속. 무얼 하면 어수선하게 널어놓는 주특기 탓에 벌써 부엌은 온통 야채와 비닐봉투, 그릇, 양념이 널려서 무슨 김장이라도 하는 것 같다.

지난 번 마트 사은품으로 받은 채칼이 있었지. 채칼로 무를 써니 신통하게 금방 무채가 나온다. 한 개를 썰었는데 양이 엄청나다. 무가 큰 건가? 김치에 들어가는 모든 재료는 사실 계량의 문제가 있다. 배추 두 포기에 무 한 개라면 배추도 큰 거, 작은 거 차이가 크고 무도 그렇다. 쪽파 한 단도 파는 가게마다 다르다. 크기는 그렇다 치고 속을 만드는 내용물의 비율도 레시피 별로 편차가 크다.

요즘 말로 커도 너-무 크다. 같은 배추 네 포기에 누구는 고춧가루가 네 컵이고 누구는 열 컵이다. 젓갈도 새우젓과 액젓을 반반 넣으라는 사람, 일대 이로 넣으라는 사람. 비율만 그런 것이 아니다. 순서도 가지각색이다. 먼저 무를 붉게 고춧가루에 버무리는 가하면, 고춧가루를 액젓에 담가 하루 삭히는 방법도 있다.

김치를 담는 일은 개량되지도 않고 순서도 명확치 않으며 거기다 재료도 들쭉날쭉이다. 한마디로 기준 삼을 것이 없다. 그렇지만 담고 나면 성공 여부가 김치만큼 명확한 것도 없다. 된장을 끓이다가 간이 짜면 물을 더 부으면 해결되지만 김치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싱거운 김치에 소금을 뿌린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이 애매모호한 상황을 결단력을 발휘하여 슬기롭게 헤쳐나가는 일은 전적으로 담그는 이의 몫이다.

결국 무는 반 개를 남겨두기로 하고 끓여둔 찹쌀풀과 고춧가루, 액젓을 섞고 다진 마늘, 생강을 넣었다. 썰어놓은 무와 갓, 쪽파에 비해 고춧가루 소스가 너무 적은 것 같다. 액젓과 고춧가루를 다시 반 컵씩 더 넣고 일단 채소와 소스를 버무리기 시작했다. 역시 고춧가루가 적다. 다시 액젓에 고춧가루를 버무려 또 넣었다. 그런대로 붉은 빛이 돌기 시작하고 간을 보니 좀 싱거운 것 같다. 어떡하지? 액젓은 이미 다 써버렸고 소금을 넣을 수도 없고 애라 새우젓을 다시 반 컵 넣었다. 어젯밤에 세 시간이나 한 예습은 실전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다.

다음은 가장 중요한 배추 절이기. 배추만 잘 절여지면 김치 담는 건 반이 끝난다. 신문지를 풀러 배추를 반으로 갈랐더니 이게 뭐야 배추 속이 텅 비었다. 아무리 유기농 배추라지만 보통 배추 속의 반도 안 된다. 거기다 어제 푸른 잎은 죄다 따서 국거리로 만들어 버렸으니. 만들어 놓은 한 냄비의 속을 다 어쩌지? 할 수 없다. 싱거우니 많이 넣는 수밖에. 새로 사온 파란색 플라스틱 바구니는 밑에 배추가 다 깔리지도 않았다. 쓸 데 없이 물을 많이 잡아 아까운 소금만 버렸네. 골고루 절여지라고 냄비에 물을 받아 눌러 놓고 한숨 돌린다.

식탁위에 켜놓은 노트북을 얼핏 보니 단일화 후 대선후보 여론조사 보도가 눈에 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정치라는 게 그래, 김치 담그는 거랑 정말 닮았어. 기준이 될 상수가 하나도 없고 온통 변수 투성이잖아. 복지를 확대하려면 재원이 문제가 되고, 경기를 살리자니 물가가 오르고, 중국과 친하게 지내면 미국이 견제하고, 일방적인 계획이 들어맞는 법이 없지. 태풍이 불면 고춧가루 액젓을 더 붓듯이 추경예산 투입, 긴축재정을 해서 서민이 힘든 거나 짠 물에 오래 두면 배추가 녹는 거나. 안철수 후보가 사퇴를 했는데 왜 박근혜 후보 지지도가 높아지냐구.

새벽 여섯 시에 일어나 배추 씻어 엎어놓고 아침 출근하기 전에 열여 섯 쪽의 배추에 속을 넣어 적어도 겉으로는 매우 양호한 한 통 반의 김치가 완성. 물론 속이 많아서 배추 반 김치 반이 되었지만 이 뿌듯한 만족감을 어디 비길까? 드디어 완전히 나 혼자 해낸 거야! 김치의 대가 우리 시어머니는 텔레비전 드라마 보시면서 뚝딱 김치 한 통을 담그시는데, 잘난 며느리는 이틀을 좌충우돌 씨름하였다.

김장은 잘못해도 1년이지만, 선거는 잘못하면 '5년' 후회

김치담그는 일은 왜 어려운 걸까? 우선 몇 밀리미터, 센티미터를 엄격히 따지는 나의 직업의식이 김치와 맞질 않는다(내 직업은 설계다). 계량되지 않는 재료들의 관계가 애매하면 그걸 못 참는 거다. 이럴 때 모든 인터넷 스승들은 이렇게 표현한다. 넉넉히, 적당히, 알아서. 거기다 각 재료간의 균형감과 재료와 속의 비례, 속의 농도와 배추의 절여진 정도, 이런 것이 다 미묘하게 손맛에 좌우된다. 역시 계량이 불가하다. 시간도 그렇다. 지방마다 크기마다 배추의 절여지는 속도가 다르고 소금도 다 염도가 다르다. 속을 미리 만들면 질척거리고 너무 늦게 만들면 서로 맛이 어우러지지 않는다. 하다못해 배추를 씻는 것도 너무 씻어도 안 되고 너무 안 씻어도 안 된다.

김치는 섬유질을 염장한 다음 발효시키는 간단한 음식이다. 그래서 좋은 섬유질의 채소를 고르는 일, 적당히 염장하는 일, 발효를 돕는 부재료를 넣는 일만 잘하면 된다. 그런데 이 일들 사이에는 큰 틀이 있어서 서로 넘나들 수 없다. 아무리 염장을 잘해도 좋은 배추가 없으면 안 되고, 발효를 돕는 부재료를 주재료 보다 과하게 넣어서는 안 되는 식이다.

그러나 각 과정, 그러니까 배추의 크기나 속 재료의 종류, 절이는 방법, 이런 것들은 담는 사람의 노하우를 살리는 자유재량권에 속한다. 그런 것들을 잘하는 것이 김치담그기의 하이라이트, 피겨스케이트의 트리플액셀 같은 것이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사법부, 입법부, 행정부가 서로의 기본틀을 잘 지키고 충실하면서 작은 틀 안에서는 융통성과 개인역량을 발휘할 자유를 부여하면 정치의 트리플액셀도 가능하지 않을까.

박근혜 후보가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시장에서 김치거리 샀다는 기사가 났다. 박 후보가 산 김치거리는 누가 가져갔을까? 그 채소들은 김치나 되었을까? 주부들이 김장을 담으면서 겨울을 준비하듯이 우리는 선거를 통해 앞으로 5년을 준비해야 한다. 김치 잘못 담그면 두고두고 후회하듯이 대통령을 잘못 뽑으면 몇 년을 후회해야 한다.

정치라는 일의 어려움을 어찌 김치담그기에 비길까? 그러나 김치 우습게 보면 절대 맛있는 김치 먹을 수 없다. 김치담그기나 정치나 큰 틀의 규칙을 지키고 작은 틀의 융통성을 발휘하는 기술이 훌륭한 결과를 만든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직업인으로는 베테랑인 나를 쩔쩔 매게 한 지난 며칠의 김치담그기는 분명 유쾌하고 교훈적인 경험이었다. 박근혜 후보의 김치 담는 실력은 어느 정도일까? 내가 충고할 자격은 없지만 후보님, 결코 얕잡아 봐서는 안되요. 수첩에 적는 정도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니까.


태그:#정치, #김치담기, #박근혜, #배추, #직업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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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디자인회사를 운영하며 인테리어 디자인과 디자인 컨설팅 분야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전통건축의 현대화와 중국전통건축에 관심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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