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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에서 캡쳐한 책표지
▲ 잔혹2표지 구글에서 캡쳐한 책표지
ⓒ 최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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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지난 주말동안 쉬지 못해서 오늘은 오전 일을 접었다. 그렇다 해도 내가 즐길 시간은 두 시간 뿐이다. (이런 말들은 평소 별로 열심히 일하지도 않으면서 티를 내는 사람들이 쓰는 것인데.) 콜린 윌슨이 쓴 1991년도 간행본 잔혹이란 책을 읽고 있다.(정확하게 잔혹2다.) 이 책은 현재 절판되어 중고책방에서 구했다.

한 쪽에서는 밤을 삶고, 방금 끓인 커피도 옆에 있다. 이렇게 평안한 풍경과 책의 내용은 너무나 언발란스해서 오히려 생생하다. 내용이 실제로 너무 잔인하기 때문에 오래 읽으면 속이 메슥거릴 때도 있다. 그렇지만 땅콩을 까먹으면서 와인을 홀짝거리면서 살인마들과 마피아, 전쟁광들의 잔인한 활극을 감상하는 일은 묘한 쾌감이 있다.

내가 현재 안전하다는 느낌을 극대화 한다고 할까. 또 한편으로는 왠만큼 잔혹한 표현은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져서 감정의 예민함을 완화하는 효과도 있다. 그래서 이런 책읽기는 하루에 한 스무 페이지 정도가 적당하다. 나는 그 정도의 양을 육포 먹듯 잘근잘근 씹어 본다.

<잔혹>은 중금속 같은 책이다. 우울함(여기서는 멜랑콜리한 감정으로 보면 된다)쯤은 명함도 못 내밀 잔인, 망상, 고립, 싸이코의 종합세트다. 조사된 범죄의 내용이 그렇고, (양도 정말 많다. 세상에 그렇게 많은 살인마들이 있었다는 사실 만으로도 놀랍다.) 그러한 폭력에 대해 분석 서술하는 방법도 쎄다. 마치 거칠은 범법자를 잘 다루는 냉정하고 노련한 수사관 같다. 여기에 덧붙여서 콜린윌슨은 역사와 심리학의 배경 이론을 광범위하게 들이댄다. 물론 그것이 다 옳다는 것이 아니라 '이런 주장들을 근거로 우리는 이렇게 판단할 수 있다' 이런 거다. 이 이론들도 잔혹한 범죄 못지않게 실험적이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반작용의 효과가 있다. 세상이 이렇게 나쁜 놈들이 많은데 나는 얼마나 운이 좋은가, 내가 하는 고민쯤이야 초딩 수준이구나 하여 오히려 마음의 위안을 받게 된다. 이렇게 거친 세상을 이만큼이라도 살아온 내가 기특한 기분도 들고.

이 책은 1, 2부로 되어있다. 둘 다 500페이지 이상의 두께를 자랑하는데 원래는 한 권의 책이었기 때문에 뒤에 붙은 이론집과 나머지 한권 반의 사례집이 묶였다. 한마디로 살벌한 범죄 종합편이다.

1부는 인류의 역사 속에서 나타난 범죄의 양상, 전쟁, 암살, 성범죄, 마피아, 독재자들의 폭력들을 다루고 20세기 이후 폭발적으로 늘어난 대량살인, 강력범죄를 분류, 소개한다.  2부에서는 갖가지 폭력의 양상과 그 원인을 역사의 관점에서, 심리학의 관점에서 전방위로 분석하면서 인간의 진화과정에서 나타나는 폭력성의 원인을 찾아본다. (아직 <잔혹1>을 찾지 못해서 <잔혹2>부터 읽고 있다. 이 책은 성범죄부터 시작한다.)

윌슨의 결론은 한마디로 이렇다.

"범죄는 진화의 불행한 부산물이다."

그렇다고 문명의 발달을 비관적으로만 보고 있지는 않다. 범죄의 배후에 있는 역동성은 창의성의 또 다른 모습이기도 하다.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 힘을 잘 다루느냐 잘못 다루느냐가 관건이란 건데, 엽기적이고 엄청난 양의 잔혹한 이야기를 실컷 한 다음 이런 평범한 결론을 내도 그 것을 수긍하게 되는 것은 역시 글의 힘이다.

2. 원인

왜 사람들이 이렇게 잔인하게 되는 걸까? 사회의 문제인가 개인의 문제인가, 우리는 이것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그의 관심사는 뭐 이런 거다.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다. 인간에게는 두 개의 자아가 있다. 하나는 의미, 이성을 대변하는 나, 그러니까 일반적으로 사회적인 나라고 할 수 있다.

또 하나는 원래 생물로서의 나, 그러니까 상황을 판단하고 반응하는 실체로서의 나가 있다. 이 둘은 서로 조화를 이루어서 온전한 나를 만들고 있는데 그 중 한 가지가 너무 발달하거나 손상되면 나머지 하나와의 사이에 일종의 누수현상이 발생, 그 것이 범죄나 정신이상으로 나타난다. (책 후반부에 가면 이 이론은 좌뇌와 우뇌 이론으로 연결된다.)

이 해석은 단순하고 누구나 경험한 적이 있어서 공감하기 좋다. 콜린 윌슨은 이런 부조화의 이유로 사회의 변화와 그 안에서 인간의 역할, 예를 들어 예전처럼 많은 시간을 노동하지 않게 된 것, 부와 권력의 심한 편재 현상 등을 말한다. 여기까지는 뭐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는 거기에 재미있는 가정을 하나 더 붙였는데 인간이 보게 되는 시각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과거의 인간은, 적어도 2세기 전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먼 곳을 보거나 자연의 연속된 풍경같이 고정된 장면을 보면서 지냈지만, 지금의 인간은 대부분의 시간을 벽처럼 서있는 건물들, 바싹 다가오는 자동차의 무리들, 닭장 같은 집  속에서 지내고 있다. 이런 시야의 일어섬(그러니까 수직성)이나 역동성(쌩 하고 옆을 스쳐가는 자동차처럼), 인위적인 사물의 연속, 빠른 움직임, 시야의 근접함 들은 인간에게 무의식적으로 긴장감을 만들고 호전성을 부추긴다는 얘기다. 그리고 이런 긴장감은 피로누적 효과를 일으킬 수 있다. 같이 출고된 동종의 차라고 해도 평지를 매일 달리는 차와 자갈길, 비탈길을 매일 달리는 차의 기계적 수명이 다른 것이나 마찬가지다.

우리는 누수의 강도와 기간이 다르기는 하지만 대체로 이런 삐끗한 현상을 경험한다.(흔히 조울증이라고 말하는 증상들) 어릴 때는 그런 것들이 자신감으로, 미래에 대한 기대를 통해 극복되지만 시간이 갈수록 금이 깊어짐을 느낀다. 어느 정도까지는 커버가 되는데 종종 눈앞에서 흘러넘치는 감정의 줄기를 그저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는 무력감을 느끼기도 한다.

윌슨에 의하면 이러한 감정을 느끼고 수용하고 견디는 힘은 개인차가 크고 또 개인이 겪게 되는 경험에 의해서도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다. 누구는 시냇물이 졸졸 흐르는 평안한 동네에 살기도 하고, 누구는 일년내내 폭풍이  몰아치는 바닷가에 살기도 하니까. 범죄란 특별히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 중에서 사는 환경이 열악한 사람들에게서 일어나기 쉬운 누수 현상의 결과다.

어느 정도까지 참다가 누수의 양이 위험 수위에 다다르면 사람들은 한쪽 자아, 그러니까 이성적 자아와 실체적 자아 중 한 쪽을 포기한다. 이성적 자아를 포기할 경우 사람은 짐승이 되어 범죄를 저지르고, 실체적 자아를 포기하는 경우 자신을 망각하여 정신병자가 된다.(이 부분은 내가 살짝 응용한 표현이다.) 상황이 매번 이렇게 살벌하다면 누구도 견딜 수 없겠지.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누수를 막고 제자리를 찾으려는 회복력을 갖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누구나 이런 범죄자, 또는 정신병자가 될 요소를 잠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것은 빙산의 수면 아래처럼 드러나지는 않지만 어떤 상황이 되면 실체화할 가능성이 있다.

이 책에서 윌슨은 이성적 자아를 포기하는 범죄자들의 사고구조를 다양한 관점으로 다루고 있다. 그 들은 대체로 육체적으로 아주 강인하거나 정신적으로 예민하고 지적 능력도 상당하다.(물론 범죄의 케이스는 너무 다양해서 일반적으로 이렇다고 얘기할 순 없지만 윌슨이 지목한 범죄자는 범죄 중에 최고의 악질적인 상태, 거기다 반성을 전혀 하지 않았던 사람들을 말한다.)  다른 사람들을 압도할 의지도 있다. 만약 이들이 스스로를 잘 통제했다면 훌륭한 예술가, 군인, 과학자가 될 가능성이 일반인 보다 높다.

그렇다면 그들이 통제하지 못한 것들이 무엇인가? 피아노나 수영을 보자. 음악을 듣거나 수영을 감상하는 일과 내가 연주를 하고 수영을 하는 일은 전혀 별개의 것이다. 그 들을 잘 하려면 집중과 통제, 그러니까 배우는 능력과 인내심이 동시에 필요하다. 사람들은 자기 능력에 좌절하거나, 물에 빠질까봐 두려워서, 혹은 다른 것들로 관심이 옮아가는 산만함 때문에 어느 순간 피아니스트나 수영선수가 되기를 포기한다. 범죄자들은 목표는 포기하지 않으면서 과정의 인내와 트레이닝을 감수하지 않으려는 어린애 같은 부류들이다. 범죄자들의  이런 비현실성은 자기중심적 사고의 극치이기도 하다.

'나는 무얼 해도 옳지. 세상이 너무 부패했으므로 내가 파괴하겠다.'

이런 망상과 자기 중심적 사고로 스스로의 통제 능력이 끊어진 결과가 바로 범죄다. 섹스에 대한 문제도 비슷하다. 섹스는 남녀가 서로에게 친밀감을 느끼는 과정에서 생기는 행위인데 친밀감을 만들기 어렵거나 그 과정을 참을 수 없는 범죄자들은 상대를 무시하고 폭력을 통해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 생각해 보라. 과거에 비해 사람들은 훨씬 더 많은 상대를 꿈꿀 수 있게 되었다. TV에는 아름답고 늘씬한 여자들이 넘쳐난다. 그러나 나에게는 전혀 기회가 주어지지 않고 그들은 나를 인간취급조차 하지 않는다. 인터넷에는 야동이 넘쳐난다. 그러나 실제 섹스란 맘만 먹는다고 다 환상적으로 되지 않는다. 이런 좌절과 긴장감의 결과 성폭력은 사회 조직이 발달 할수록 다양한 방향으로 증가하고 있다.

3. 역사

과거에 비해 범죄의 종류와 양이 증가한 것일까? 윌슨은 19세기 말을 기준으로 인간 범죄의 중요한 전환점이 생겼다고 말한다. 19세기까지 범죄는 주로 굶주림의 해결을 위한 일종의 반사작용 같은 것이었다. 19세기 중엽에 자본가들이 형성되면서 돈을 벌어서 남부럽지 않게 살려는 범죄, 조직적 강도가 나타났는데 살만한 사람들이 더 잘살려고 저지르는 범죄의 시작이다.(가족이 하나가 되어 혼자 사는 노인을 죽이고 금품을 뺏는 사건의 범인은 낮에는 멀쩡하게 회사를 다니거나 교회에 성실하게 다니는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성범죄의 역사는 아주 오래된 것이지만 광기가 동반된 성폭행 살인은 19세기 말에야 나타났다. 윌슨은 이 때를 묻지마 살인, 앞서 말한 자아의 파괴로 인한 범죄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1차 세계 대전으로 사람들은 가공할 만한 무기로 인한 끔찍한 죽음, 그러니까 인간 대 인간의 전쟁에서 기계와 인간의 전쟁으로 변한 현실에 큰 충격을 받는다. 명분도 없는 개죽음을 한 사람이 백만 명이 넘었다. 1920년대부터 50년에 이르는 미국의 잔인한 연쇄 살인범들은 지역사회의 붕괴와 도시의 발달, 열악한 환경에 노출된 개인이 자아를 상실한 결과다. 즉 전통사회가 유지하던 일종의 가두리 양식장 같은 역할이 사라지자 개인은 위험에 그대로 노출되고 모든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파도가 치든 상어가 오든 말이다.

오늘날 우리가 맞고 있는 문제도 크게 다르지 않다. 능력과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낙오된 사람들을 거두는 전통은 이제 사라지고 없다. 가진 사람들은 더 많이 가진 사람에 대한 상대적 열등감으로 우울하고, 못가진 사람들은 최소한의 보호 장치도 없이 극한상황에 내몰리고 있다. 심지어 종교조차도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울타리보다 가진 자들을 축복하는 일에 열을 올린다.

흉악한 범죄자들이 자신의 범죄를 사회탓으로 돌리고 범죄는 일종의 항의행위라고 주장해도 완전 틀린 말은 아니다. 윌슨의 글을 읽다 보면 그가 은연 중에 범죄를 합리화하고 즐기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마치 자신이 범죄를 저지르고 싶지만 그럴 순 없으니 연구라도 해야지 하는 것 같기도 하고, 하여튼 웬만큼 좋아하지 않고는 그렇게 방대한 자료를 모으고 생각을 정리할 수 있을까? 적당한 새디즘도 곁들어 있는 것 같다.

4. 종교

많은 심리학자들이 관심을 가졌듯이 윌슨 역시 범죄에 대한 종교의 역할에 주목하고 있다. 그의 주장은 이렇다. 인류의 진화 초기 어느 단계에서 종교의 의미가 필요해 졌고 그 의미는 종교의식과 함께 지적 능력의 한 축으로 수백만년 동안 자라왔다. 그런데 기원전 10세기에서 20세기 사이 인류는 매우 험난한 기후상황과 동족 간 경쟁에 내몰리게 되었는데(그의 주장에 따르면 아프리카 북부와 지중해 지역에서다.)

이런 경험으로 인간은 믿음에 대한 다른 시각을 갖기 시작했다는 얘기다. 그 때까지 인간은 신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지금처럼 잔인하지 않았었지만, 신이 해결해주지 못하는 환경에 맞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이 신을 거스를 수 있다는 자유의지를 갖게 된 것이다. 이 새로운 진화의 결과는 한편으로 인간을 잔인하게 만들었지만 한편으로는 급속도로 진화하게도 인도하였다. 왜냐? 이전에는 모든 당면문제를 신의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생각으로 나의 뜻이 내 행동의 결과고 그러므로 노력=문제해결=나의 발전이라는 등식이 성립되었던 것이다.(약간 다를 수도 있는데 그가 한 장의 전체를 가지고 설명한 내용을 쉽게 정리하다 보니 그렇다.)

그의 관점으로 볼 때 인간의 도전의식이란 호전성, 잔인함의 또 다른 모습이다. 왜 인간만 같은 동족을 죽이고 먹고 그랬을까? (베이징 원인의 뼈가 발견된 곳에서 인간이 동족을 잡아먹었다는 증거가 발견될 뿐만 아니라 아직도 오지의 여러 원시부족들은 용맹심, 종교적 이유로 식인을 한다.) 그건 결국 진화의 한 양상이다.

이렇게 진화한 인류의 호전성은 역사시대에 들어와서 각종 전쟁을 통해 다양한 방법으로 노출되다가 19세기 산업사회에 들어오면서 앞에서 언급했듯이 개인의 문제가 되어 버렸다. 문명이 발달하면 할수록 인간이 느끼는 소외감과 감당해야 하는 역할은 증가하고 있다. 과거 인간은 굶주림과 잠자리를 해결하면 행복했다. 거기다가 짝을 이루어 자손을 낳을 수 있으면 더 바랄게 없었다. 지금은 어떤가? 대체로 이런 일들로는 행복해 하지 않는다. 윌슨의 말대로 욕구가 능력에 비례하여 진화한 것이라면 범죄도 욕구에 따라서 진화했을 것이다. 배고픔을 해소하려는 범죄는 이제 거의 없다.

윌슨은 인간욕구의 발달단계에 대해 매슬로의 주장을 소개하였다. 즉 먹을 것에 대한 욕구, 안전함에 대한 욕구, 가족을 이루려는, 혹은 번식에 대한 욕구 다음의 발달단계는 존중에 대한 욕구라는 것이다. 좌절하는 아이들에게 어른들은 쉽게 얘기한다.

"배부른 소리 하고 있네. 저게 다 고생을 안 해봐서 저런 거지."

그런데 사실은 그게 아니다. 아이들은 우리보다 진화했기 때문에  행복의 요건이 다르다. 그들은 존중 받아야 행복한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계속 하고 있으면 삶이 너무 우울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이 책을 읽다가는 가끔 달콤한 것을 먹으면서 감정을 회복하고 봐야한다.

윌슨의 주장에 대해 반격할 요소들도 물론 무수히 많다. 약간은 과대망상적이고 주관적이다. 특히 그의 글을 읽고 있으면 인류 공통의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에 대해 윌슨은 8대 2 정도로 남성주도적 생각을 갖고 있는 것 같다. 그의 말대로라면 사고도 남자가 치고 수습도 남자가 한다. 그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가 남성우월주의자임을 알 수있는 면이다.

5. 좌뇌와 우뇌

이렇게 우리의 무의식이 병들어 가고 있는데 우리는 앉아서 수수방관만 할 수는 없지 않을까? 그의 이론 속에서 어떤 해결점을 찾을 수도 있어 보인다. 윌슨의 분석에 따르면 우리의 뇌는 논리적 부분을 관장하는 좌뇌와 직관적 부분을 관장하는 우뇌로 나뉘어져 있다. 시험을 볼 때, 은행에서 송금을 할 때 좌뇌가 우리를 장악한다.

고향 동네어귀에 들어서기만 해도 마음이 편안해 지는 건 우뇌가 움직이기 때문이다. 의지를 실현하느라 눈앞의 문제에 골똘해 질 때 좌뇌는 최대한 커진다. 결과가 실망스러우면 좌뇌의 긴장감도 더하기 마련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뇌는 긴장을 다스리기 위해 작용한다. 그건 위로 같은 것이 아니라 시점을 전환하는 일이다.

무엇을 이루려 하거나 집착하는 의지, 그 것으로부터 우리를 분리시키는 작용, 말하자면 한 마리 사슴의 감성으로 우리를 쓰윽 돌려놓는 것, 바람이 부는구나 느끼게 해주는 것이 바로 우뇌의 작용이다. 윌슨은 이런 우뇌의 행동을 새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으로 표현했다. 아웅다웅하는 세상도 좀 멀리 떨어져 보면 별 차이 없는 것이다.

하나 더 매슬로의 주장으로 돌아가 보자.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 우리는 존중받기를 원한다. 그런데 존중의 의미는 매사에 해석하기 나름이라 하는 쪽이나 받는 쪽이나 만족하기 어렵다. 아이들은 매일 공부하고 있는데 부모는 매일 아이가 놀고 있다고 생각한다. 존중을 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원활한 소통의 방법은 교류의 주파수를 넓히는 것이다.

다양한 영역으로 다양한 방법으로 대화를 시도하고 생각을 알릴 때 오해의 폭은 줄어들고 존중받는 감정을 느끼게 마련이다. 우뇌를 작동하여 시점을 위로 끌어 올리는 방법도 있다. 내가 하늘에 떠있는 한 마리 독수리라면 저 아래서 벌어지는 일은 대체로 거기서 거기다. 대신 저 수평선 너머 떠오르는 태양의 장관을 볼 수 있다. 옳고 그름, 갖고 못가짐보다 훨씬 중요한 발견이 거기에 있다.

우리가 윌슨의 이야기에 주목해야 하는 건 좌뇌와 우뇌의 전환이 충분히 탄력적이지 못할 때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난관을 극복하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극도의 긴장과 냉정함을 유지하는 좌뇌를 선택적으로 발전시켜 왔다. 더구나 최근 2세기 동안의 문명발달속도는 거의  통제불능으로 우리는 결과적으로 과거의 인간들 보다 훨씬 까칠할 수 밖에 없다. 그러니 남들에게 더 공격적이고 존중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들로 부터는 더 상처받고 무시당한다고 느낀다.

역사적인 인물 중에도 위인과 폭군은 종종 중복된다. 나폴레옹을 위대하다고 느끼기도 하지만 그가 일으킨 전쟁으로 죽은 수십만의 사람들을 생각할 때 그는 잔인한 인물일 수 밖에 없다. 그렇게 멀리 갈 것도 없다. 박정희가 이룩한 많은 업적이 있지만 이면의 잔인함과 권력욕도 그 못지않게 강도가 셌다. 결국 좌뇌가 지나치게 발달한 인간은 높은 성취도와 호전성을 동시에 키우게 된다.

6. 선거

선거일이 코앞에 다가왔으니 후보자 선택 기준에 윌슨의 생각을 연결해 보자. 과거 박정희의 결단력과 추진력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은 "문제인은 뭔가 약해." 이렇게 말한다. 그건 강함의 위험성과 원칙의 강함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박정희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아도 된다. 이명박의 추진력은 얼마나 한때 우리에게 매력적으로 보였었나? 목적 달성이라는 면에  서 보면 이명박은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했다. 다만 그 목적이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었던 것 뿐이지.

이런 류의 강인한 지도력이란 어두운 폭력성과 맞붙은 양면의 칼날 같은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지도자의 우수한 능력보다 그 능력이 우리를 위해 쓰일 수 있는 것인지부터 살펴야 한다. 아니면 제구력이 없는 강속구의 공이 내 머리로 날아오는 수가 생길지도 모르니까.

어쨌든 또다시 우리가 직면한 문제는 누구를 뽑아야 우리의 미래가 더 행복해 지느냐 하는 것이다. 오래됐지만 의미 있는 콜린 윌슨의 결론을 참고해 보자. 어린아이들부터 노인까지 모두가 경쟁과 성과에 내몰려 좌뇌의 스위치를 있는 대로 돌리고 있는 지금 우리에게 누구보다 필요한 지도자는 바로 우뇌가 발달한 사람이다. 같이 차 한 잔 하면 왠지 기분이 좋아질 것 같은, 그래서 우리가 충분히 존중받고 있음을 느끼게 해줄 그런 사람. 적어도 내가 찾는 지도자는 그런 사람이다.


잔혹 - 피와 광기의 세계사

콜린 윌슨 지음, 황종호 옮김, 하서출판사(2007)


태그:#콜린 윌슨, #좌뇌, 우뇌, #후보, #범죄심리, #잔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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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디자인회사를 운영하며 인테리어 디자인과 디자인 컨설팅 분야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전통건축의 현대화와 중국전통건축에 관심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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