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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의 '영산' 백두산. 아마도 백두산은 배달겨레의 영원한 '청산'일 것이다.
 우리 민족의 '영산' 백두산. 아마도 백두산은 배달겨레의 영원한 '청산'일 것이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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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의 정의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현대인은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들"이라고 답한다. 그러나 이는 내가 만들어낸 독창적 표현은 아니다. 1956년에 출간된 윌리엄 H. 화이트의 <조직 속의 인간>에 나오는 '현대인은 고향을 등진 조직인'이라는 경구를 변용한 표현이다.

청동기 이래 '조직의 쓴맛을 보여주겠다'는 농담이 가장 노골적으로 횡행하는 시대가 바로 현대사회일 것이다. 인간소외가 일반화된 세상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모여 있지만 현대사회의 조직은 공동체 사회가 아니다. 출근길에 문자메시지로 '오늘부터 출근하지 말라'는 퇴직 발령장을 받는 사회, 우리는 지금 그런 세상에 있다.

현대인들, '조직의 쓴맛' 속에서 늘 인간소외

물론 아득한 고려 시대에도 '군중 속의 고독'은 존재했다. <청산별곡>이 바로 그런 마음을 가장 절절하게 노래한 고려가요다. 머루랑 다래랑 먹으면서 '청산'에 살고 싶지만, 미워하는 이도 없고 사랑하는 이도 없는데도 '애꿎게' 돌에 맞아 울어야 한다.     

살어리 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랏다
멀위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어리랏다

우러라 우러라 새여 자고 니러 우러라 새여
널라와 시름 한 나도 자고 니러 우니로라

가던 새 가던 새 본다 믈 아래 가던 새 본다
잉무든 장글란 가지고 믈 아래 가던 새 본다  

이링공 뎌링공하야 나즈란 디내와손뎌
오리도 가리도 업슨 바므란 엇디호리라

어듸라 더디던 돌코 누리라 마치던 돌코
믜리도 괴리도 업시 마자셔 우니노라

보길도의 아름다운 해변 풍경. 산만큼이나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바닷가에서 살고 심정이 가득차 있다.
 보길도의 아름다운 해변 풍경. 산만큼이나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바닷가에서 살고 심정이 가득차 있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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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는 '제2의 청산'이다. 색깔이 닮았고 둘 다 끝없이 광활해 심상이 같다. 하지만 인간이 무리를 이루고 사는 한 그곳에도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다반사로 벌어진다. 사슴이 장대에 올라 해금을 켜니 놀라지 않을 도리가 없다. 독주가 나를 부른다.

살어리 살어리랏다 바라래 살어리랏다
나마자기 구조개랑 먹고 바라래 살어리랏다

가다가 가다가 드로라 에졍지 가다가 드로라
사스미 짐대예 올아셔 해금(奚琴)을 혀거를 드로라

가다니 배브른 도긔 설진 강수를 비조라
조롱곳 누로기 매와 잡사와니 내 엇디하리잇고  

팔공산 염불봉 아래로 염불암이 보이는 풍경. 고려 왕건이 견훤군에 대패해 이곳에 피신했다는 '믿을 수 없는 전설'도 있지만, 어쨌건 이곳은 그 격심했던 동수대전의 불길도 번지지 아니한 '청산'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팔공산 염불봉 아래로 염불암이 보이는 풍경. 고려 왕건이 견훤군에 대패해 이곳에 피신했다는 '믿을 수 없는 전설'도 있지만, 어쨌건 이곳은 그 격심했던 동수대전의 불길도 번지지 아니한 '청산'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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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가요 <청산별곡>은 어째서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것일까. 답은 간단하다. 현대사회가 바로 '술을 권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전쟁·가난·질병·독재권력·관료주의가 끝없이 인간소외를 유발하니 힘없는 개인은 <청산별곡>을 읽을 때마다 가슴이 찢어질 수밖에.

특히 대한민국은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로 전쟁의 기운이 아직까지 있는 나라다. 빈부 격차는 이루 말로 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해 '부자 정당'까지도 선거 때가 되면 '경제 민주화'를 부르짖는다. 병의 고통·자녀 교육·주택 문제 등은 모두 개인의 책임으로 떠넘겨져 있다. 닉슨은 워터게이트로 물러났지만 대한민국은 정치권력이 불법으로 국민을 사찰해도 그 국민들 스스로가 크게 문제 삼지 않을 정도로 독재가 일상화돼 있다. '경제 마피아' '교육 마피아' 등이 여전히 살아있을 만큼 행정 독재 역시 만연하다. '매운 누룩이 잡아끄는데 어찌 그냥 지나치겠느냐'는 소리가 저절로 터져 나온다.   

'죽음의 시대'에 저항하며 오늘에 이르렀건만

이미 군부독재 시절 양성우는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이라는 시를 썼다. 문학으로 분류되던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은 최병선의 곡에 힘입어 노래가 됐다. 고려가요처럼 민중의 노래가 된 것이다. 물론 양성우의 시는 노랫말이 되면서 약간 바뀌긴 했지만.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나 이미 떠났다고
기나긴 죽음의 시절
꿈도 없이 누웠다가
신새벽 안개 속에
떠났다고 대답하라

저 깊은 곳에 영혼의 외침
저 험한 곳에 민중의 뼈아픈 고통
내 작은 이 한 몸 역사에 바쳐
싸우리라 사랑하리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나 이미 떠났다고
흙먼지 재를 쓰고 머리 풀고 땅을 치며
나 이미 큰 강 건너 떠났다고 대답하라

저 깊은 곳에 영혼의 외침
저 험한 곳에 민중의 뼈아픈 고통
내 작은 이 한 몸 역사에 바쳐
싸우리라 사랑하리

비 갠 오후, 대구 앞산에서 바라본 청룡산 쪽의 맑은 풍경. 사람들은 이렇게 깨끗한 곳에서 살고 싶어하는 자연친화적 '수구초심'을 지녔다.
 비 갠 오후, 대구 앞산에서 바라본 청룡산 쪽의 맑은 풍경. 사람들은 이렇게 깨끗한 곳에서 살고 싶어하는 자연친화적 '수구초심'을 지녔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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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에 힘입어 노골적인 정치독재의 시대를 물리쳤다. 하지만 겉모양만 그럴 뿐 아직 멀었다. '청산'에서 살고 싶지만 여전히 우리는 그곳에 갈 수가 없다. '죽음의 시대'에 산화한 민주화 영령들을 끊임없이 폄훼하고 탄압해온 세력들은 예나 지금이나 '국민 통합'을 외치고 있다. 1970년대의 '국민 총화'를 2012년에 이르러 '국민 통합'으로 바꿔 부르며 그들은 대중을 현혹한다.

일제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국민 총화' '국민 통합'

세계에서 가장 등산을 좋아한다는 대한민국 국민들, '호마의북풍 월조소남지(胡馬依北風 越鳥巢南枝)'라는 말처럼 언제나 '고향'을 그리는 마음으로 '청산'을 드나들지만, 과연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하면 돌아오기 어려우니 명월이 만공산할 때 쉬어가면 어떠리...' 그렇게 '건강이 최고'라는 신념을 불태우며 산을 오르는 것일까.

현대는 도시의 시대다. 내년이 되면 도시도 '청산'이 될 수 있을까. '산을 좋아한다'기 보다는 '등산을 좋아한다'고 표현해야 옳을 듯싶은 국민들의 '신성한' 선택이 몹시도 궁금하다.

부산 국제시장의 풍경. 언제 우리의 도시들은 '청산'이 될 수 있을까.
 부산 국제시장의 풍경. 언제 우리의 도시들은 '청산'이 될 수 있을까.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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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TNT뉴스에도 송고할 예정입니다.



태그:#청산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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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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