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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와 설총 부자가 대를 이어 기거했던 것으로 알려지는 골굴암. 우리나라에서는 보기드문 천연 석굴 불교 유적이다. 이곳의 마애불은 보물 581호로 지정되어 있다.
 원효와 설총 부자가 대를 이어 기거했던 것으로 알려지는 골굴암. 우리나라에서는 보기드문 천연 석굴 불교 유적이다. 이곳의 마애불은 보물 581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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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는 신라 26대 임금 진평왕 재위 39년(617)에 경상북도 경산시 자인면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집 안에서 출생한 것이 아니라 밤이 많이 나는 골짜기[栗谷]의 길에서 태어났다. 이는 석가와 같다. 석가도 어머니 정안왕후가 출산을 앞두고 친정으로 가던 중 '란비'라고 부르는 넓고 유명한 꽃밭에서 탄생했다.

원효의 어머니[娑]는 밤나무에 옷을 걸어[羅] 주위를 가리고 아기를 낳았다. 원효가 태어나자 밤나무골은 온통 오색구름으로 가득 찼다. 뒷날 원효는 자신이 태어난 자리에 사라사(娑羅寺)를 창건했다.

삼국유사는 원효가 우리말 '새벽'을 자신의 이름으로 자칭했다고 전한다. 원효(元曉)는 '새벽'을 한자어로 옮겨적은 표기라는 말이다. 원효의 본명은 서당(誓幢) 또는 신당(新幢)이었다. 물론 아들 설총(薛聰)과 마찬가지로 그는 설(薛)씨였다.

원효의 출생지로 추정되는 경북 경산시 자인면에 세워진 제석사
 원효의 출생지로 추정되는 경북 경산시 자인면에 세워진 제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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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0년대 초, 경산의 한 농부가 밭을 갈다가 불상과 탑신을 발견했다. 절터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그 후 1625년, 유찬(維贊)은 이곳 경산시 자인면 북사리 226-1번지를 원효의 출생지로 믿으며 제석사(帝釋寺)를 세웠다.

뒷날 고려의 의천(義天, 1055∼1101)은 '원효 이상의 선철(先哲)은 없다. 오직 용수(龍壽)와 마명(馬鳴)이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용수와 마명은 기원전 2~3세기 무렵 대승불교를 개척한 이들이다. 석가모니 열반 이후 갈라져 싸우기만 하던 소승(小乘, 출가자만 탈 수 있는 작은 수레)불교를 배척하고, 승려가 아닌 대중들도 누구든 깨우쳐 부처가 될 수 있다고 가르친 것이 대승(大乘, 누구나 탈 수 있는 큰 수레)불교였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대승불교의 상징은 단연 성사(聖師) 원효 스님이다. 원효는 가난한 민중들과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음식을 먹었다. 술을 마시며 거리를 떠돌았고, '一切無㝵人 一道出生死'이란 내용의 <무애가>를 지어 세상에 퍼뜨리며 불교를 전파했다. '세상에 연연하지 말라,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가르쳤으니 원효는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던 신라 불교를 서민 대중에게 선사한 위대한 승려였던 것이다.

원효는 반월성 아래 남천에 일부러 빠져 요석궁으로 들어갔다.
 원효는 반월성 아래 남천에 일부러 빠져 요석궁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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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원효였으니 다음과 같은 노래를 삼국유사에 남긴 것도 놀랄 일은 아니었다.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내게 주려나. (誰許沒柯斧)
내가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깎아볼거나. (我斫支天柱)

아무도 원효의 뜻을 알지 못했지만 역시 김춘추는 왕다웠다. 책을 많이 읽은 그 숱한 신하들은 하나같이 간파하지 못하는 원효의 노래를 무열왕만은 꿰뚫어 읽었다. 왕은 관리에게 원효를 홀로 사는 여동생 요석공주 앞으로 데려가도록 조치했다.

이미 앞날을 관통해 뚫어보는 원효는 남산 아래 요석궁 앞에서 관리를 기다렸다. 게다가 원효는 일부러 개울에 빠져 옷을 흠뻑 적신 채 서 있었다. 덕분에 관리는 '스님의 옷을 말려야겠노라' 청하며 자연스레 요석궁의 문을 두드릴 수 있었고, 공주 역시 '큰스님이 물에 빠져 저 모양이 된 것을 어찌 모른 체, 못 본 체할 수 있겠느냐'며 거리낌없이 궁의 문을 열어줄 수 있었다.

그리하여 설총이 태어났다. 설총은 우리나라 최초의 가전체 문학인 <화왕계>를 짓고, 이두를 집대성하여 우리 겨레의 문자생활에 획기적 선을 그은 학자였다. 삼국사기는 전한다.

설총은 천성이 총명하여 태어날 때부터 이치를 알았다. 중국의 역경, 서경, 시경, 예기, 효경, 춘추, 논어, 맹자, 주례 등 경서들을 신라말로 풀어서 읽고, 또 후학들을 가르쳤기 때문에 지금(고려)도 학자들이 그를 존경하고 있다.  

설총의 묘소로 추정되는 경주 명활산성 뒤편(진평왕릉쪽)의 오래된 무덤
 설총의 묘소로 추정되는 경주 명활산성 뒤편(진평왕릉쪽)의 오래된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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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 했다. 과연 그런가. 가락은 찾을 길 없지만 노랫말은 조금이나마 남아 원효의 마음을 말해주는 듯하고, 온전히 전해지는 <화왕계>는 '하늘을 받칠 기둥'의 가르침을 오늘도 생생하게 설파하고 있다. 이 맑은 가을날, 원효와 설총 부자의 흔적을 찾아 길을 떠나본다.   

원효와 설총을 만날 수는 없으나 그들의 자취가 서린 유적이 남아 나그네를 애틋하게 기다리고 있다. 원효의 출생지로 추정되는 경산시 자인면의 제석사, 원효가 고의로 몸을 던진 경주 반월성 아래 남천, 설총의 신도비가 남아 있는 경산시 상대온천 입구의 하대리 도동재, 그리고 명활산성과 진평왕릉 사이의 전(傳)설총묘, 두 부자가 이어 살았던 것으로 여겨지는 경주시 양북면 함월산 기슭의 골굴사……. '일본국 진인(眞人)이 원효거사를 보지 못한 것을 매우 한탄했는데, 신라국 사신이 그의 손자라는 말을 듣고 기뻐하여 시를 지어 보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진정 실감나는 곳들이다.

설총의 신도비가 세워져 있는 경북 경산시 상대온천 입구 하대리의 도동서원. 사진의 건물은 사당임.
 설총의 신도비가 세워져 있는 경북 경산시 상대온천 입구 하대리의 도동서원. 사진의 건물은 사당임.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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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TNT뉴스에도 송고할 예정입니다.



태그:#원효, #설총, #골굴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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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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