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미 국방장관, 예비회담 시인

지난 토요일(18일) 주요 외신들은 미국이 탈레반과 평화 회담을 진행 중이라고 일제히 보도했다. 외신들은 하미드 카르자이 아프가니스탄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한 발언을 인용했다.

"(탈레반과의) 평화 회담이 이미 시작됐고 앞으로 계속될 것이다. 외국 군대, 특히 미국군이 이 회담을 계속 진행할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의 헌법, 자유와 민주주의, 그리고 개발 정책을 수용한다면 어떤 탈레반 세력도 협상의 상대가 될 수 있다."

카르자이 대통령의 발언은 최고위 정책결정자가 처음으로 아프간 전쟁을 끝내기 위한 미국과 탈레반의 공식 접촉 사실을 확인한 것이어서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러나 미국은 카르자이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공식적인 대응을 하지 않았다. 익명의 한 국무부 관리는 씨엔엔(CNN)과의 인터뷰에서 "카르자이다운 행동"이라며 카르자이 대통령의 발언을 폄하했다. 미 국무부의 메간 맷슨 대변인도 미국은 아프간의 화해 노력을 지원할 것이라는 이전의 입장만을 반복했다.

"미국은 아프간 사람들이 정치적 해결책을 찾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도록 도와야 한다. 여기에는 알 카에다와의 관계를 끊고, 폭력을 포기하고, 아프간 헌법을 기꺼이 준수하려는 의지를 가진 탈레반 세력들과 아프간 정부와의 화해 노력도 포함된다."

그러나 로버트 게이츠 미국 국방장관은 19일(한국시간 20일 오전) 씨엔엔(CNN)과의 인터뷰에서 미국이 아프간 전쟁을 끝내기 위해 탈레반과 예비 회담을 진행하고 있음을 인정했다. 미국의 고위급 관료가 처음으로 미국과 탈레반과의 공식 접촉을 인정하고 카르자이 대통령의 발언을 확인해준 것이다. 카르자이 대통령의 확인과 게이츠 장관의 재확인으로 미국과 탈레반의 평화 협상이 현실로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그러나 게이츠 장관은 성과에 대해서는 아직 예측할 수 없다며 조심스런 태도를 보였다.

"우린 항상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는 정치적 해결책이 마련돼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문제는 탈레반이 심각하게 논의에 임할 준비가 되어 있느냐다. 미국을 포함해 많은 나라들이 탈레반과 접촉하고 있다. 이런 접촉은 현재 아주 예비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화해를 위한 진지한 회담은 이번 겨울까지는 실질적인 진전을 보기 어려울 것이다."

게이츠 장관은 예비 접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영향력 있는 탈레반 인물들과 진정성 있는 접촉을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미국 외교관들이 접촉하고 있는 탈레반 인물들이 정말 탈레반 지도자인 무하마드 오마르가 보낸 사람들인지도 확실치 않다고 말했다. 또한 예비 접촉에는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은 직접 관여하지 않고 있다고 말함으로써 국무부의 개입까지는 인정하지 않았다.
 
탈레반, 아프간 정부, 그리고 미국 및 나토 사이에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접촉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은 이미 몇 차례 보도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미국 관리들은 물론 탈레반 측도 보도가 나올 때마다 접촉 사실을 부인했다. 지난 5월 26일 뉴욕타임스(New York Times)는 미국 관리들이 평화 회담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탈레반 지도자인 무하마드 오마르의 최측근인 타에브 아가를 만났다고 보도했다. 만남은 독일과 카타르가 주선했고 미국 중앙정보국(CIA)과 국무부가 관계하고 있다고도 보도했다.

이 만남은 처음 워싱턴 포스트(Washington Post)에 의해 보도됐고 독일의 시사주간지 슈피겔(Der Spiegel)에 의해서도 보도됐다. 또한 미국과 다른 서방 국가들의 관리들이 익명을 조건으로 이 일련의 보도들을 확인했다. 뉴욕 타임스는 이 접촉이 오사마 빈 라덴이 사망하기 훨씬 전에 시작됐으며 오바마 행정부가 탈레반과의 평화 회담 쪽으로 태도를 바꾸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분석했다.

탈레반도 '미국과 직접협상'... 태도 변화 보여

고위 정책결정자들에 의해 공식 접촉이 확인된 이번 보도를 통해 외신들은 탈레반도 미국과의 직접 협상 쪽으로 태도를 바꾸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그동안 탈레반은 외국 군대가 떠난 후에만 평화 협상을 진행하고 아프간 정부와만 대화할 수 있다는 입장을 고수해왔다. 그러나 탈레반이 미국과의 접촉에 응한 것을 보면 아프가니스탄에서 실질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미국과의 접촉이 자신들의 향후 정치적 이익을 위해 필요하다는 판단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사실 평화 협상은 오래전부터 예견된 것이었다. 탈레반이 계속 세를 확산하고, 아프간 정부가 전국을 제대로 통치하지 못하며, 미국을 포함한 나토군이 계속 주둔할 수 없는 상황에서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는 어떤 식이든 정치적 타협을 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또한 평화 협상이 미국을 포함한 나토군, 아프간 정부, 탈레반 모두에 현재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실질적인 명분을 줄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가장 시급하게 평화 협상을 필요로 하는 것은 2014년까지 철군을 계획하고 있는 미국을 포함한 나토 국가들이다. 특히 9만 명 이상의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으며 올해 7월부터 단계적인 철군을 계획하고 있는 미국은 철군 일정을 순조롭게 진행시킬 수 있는 명분과 실질적 장치가 필요하다.

또한 아프가니스탄에 자유 민주국가를 세우겠다는 명분으로 전쟁을 시작한 만큼 현 아프간 정부와 탈레반과 사이에 정치적 타협과 국가 재건 협력 약속이라도 있어야 철군할 명분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미국이 애초 '악의 세력'이자 '테러 협력자'인 탈레반을 완전히 제거할 목적으로 전쟁을 시작한 것을 상기한다면 그때와 비교해 전혀 달라지지 않은 탈레반과 평화 협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지극히 모순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결국 아프간 국민들만 10년 동안 명분도 소득도 없는 전쟁에 희생된 셈이다.

탈레반 인정할 수밖에 없는 아프간 정부

아프간 정부 역시 속히 전쟁을 끝내고 국민들이 원치 않는 외국 군대를 철수시키기 위해 평화 협상이 필요하다. 그동안 탈레반의 공격은 물론 나토군에 의한 민간인 사망도 늘면서 아프간 정부는 치안을 위해 외국 군대에 의존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국민들의 원성을 달래기 위해 외국 군대를 비난하는 줄타기를 해 왔다.

아프간 정부는 또한 탈레반을 지지하는 국민들이 여전히 상당수 존재하며 탈레반을 인정하지 않고는 전쟁을 끝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 때문에 최근 몇 년간 아프간 정부는 탈레반과의 평화 협상을 계속 주장하고 비밀 접촉을 시도해 왔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미국과 탈레반이 직접 접촉을 시작한 것은 아프간 정부에는 오히려 다행스런 일이기도 하다.

탈레반 또한 평화 협상을 거부할 이유는 없다. 계속 세력을 확장해 수도인 카불까지 위협하게 된 상황에서 평화 협상이 결코 자신들에게 불리한 쪽으로 진행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현실적으로 엄청난 비용을 요구하는 전쟁을 계속하기보다는 평화 협상을 통해 제도 정치로 재진입해 국민들로부터 인정을 받은 후 정권을 탈환하는 것이 더 효율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아프간 국민의 염원은 관심밖?

그러나 미국과 접촉을 시작했다고 해서 탈레반이 무력으로 외국군대를 철수시키고 아프간 정부를 몰락시키겠다는 기본 정책을 바꾸지는 않을 것이 분명하다. 카르자이 대통령이 미국과 탈레반의 평화 회담이 진행되고 있음을 확인한 몇 시간 후 카불 중심가에서는 3건의 자살폭탄 테러가 발생했다.

폭탄 테러는 대통령 궁에서 불과 800미터 떨어진 곳에서 일어났고 재무부 근처의 경찰서를 겨냥했다. 탈레반은 자신들이 폭탄 테러를 저질렀음을 확인했다. 탈레반은 협상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서라도 싸우기에 좋은 계절인 여름과 가을 동안 공격에 더 박차를 가할 수 있다. 게이츠 장관이 겨울까지는 실질적으로 회담에 진전을 보기 힘들 것이라고 말한 것도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평화 협상이 현실화될 가능성이 높아진 가운데 가장 우려되는 것은 누구를 위한 평화 협상이 될 것인가의 문제다. 현재로서는 평화 협상이 미국, 아프간 정부, 탈레반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일반 국민들은 그 과정에서 소외될 가능성이 높다. 이런 평화 협상은 정치적 타협과 거래로만 끝나고 국민들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안전한 환경, 생활수준의 향상, 진정한 평화는 가져오지 못할 것이다. 결국 국민들은 부패하고 무능한 현 정부와 폭력적이고 독재적인 탈레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최악의 상황에 내몰리게 될 수 있다.


태그:#아프간 전쟁, #아프가니스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