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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9월 11일 금요일. 항상 그랬듯이 난 주민센터에서 민원인들과 전화통화를 하고 있었다. 민원대에는 보육료 지원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업무들을 보기 위해 줄을 서 있는 민원인들로 정신이 없었다. 그 날도 역시 여느 금요일과 다를 바 없던 날이었다.

 

하지만 그 날은 다른 사람에겐 몰라도 내겐 조금 특별한 금요일이었다. 행정인턴으로 주민센터에 있으면서 여러 기초생활수급자를 만났지만, 그 중에서도 내가 처음으로 직접 찾아가서 만났던, 그것도 일반 가정집이 아니라 '요양병원'에 찾아가서 만났던 그 분, 선천성 난청으로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던 그 분, 내게 정말 특별했던 수급자 아저씨 한 분이 세상을 떠난 날이었기 때문이다.

 

첫 만남, 난 그 아저씨의 딸이 되었다

 

그 아저씨를 처음 만난 날은 보육료 지침 관련 교육 때문에 내 담당 주사님을 포함한 사회복지공무원들과 함께 부산을 다녀오던 날이었다. 교육을 마치고 구청 버스를 타고 오면서 남은 시간이 어중간해서 주민센터로 다시 들어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하고 있을 때, 갑자기 주사님의 휴대전화로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고, 그 문자메시지를 보신 주사님은 내게 '수급자분에게서 온 문자인데, 이 분이 왜 문자를 보냈는지 모르겠다'라고 말씀하셨다. 원래 공무원 개인 전화번호는 알려줄 수 없게 되어 있지만, 이 분은 듣지 못하기 때문에 특별히 번호를 알려준 거라고 하시면서.

 

그리고 시간이 흘러 구청 앞에 버스가 도착했을 때, 주사님이 내게 그 아저씨를 만나러 같이 가보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난 난생 처음으로 가정방문을 하게 될 거라는 기대감에 당연히 가겠다고 그랬고, 머릿속으로 그 분이 어떤 집에서 살고 계실지 막 상상하면서 주사님을 따라갔다.

 

그런데 이상했다. 주사님은 주택가가 아닌, 한 요양병원으로 들어가는 것이고, 난 그 순간 덜컥 겁이 났다. 그 당시만 해도 내 머릿속의 요양병원 이미지는 이제 죽음을 앞두고 있는 말기암 환자들이 주로 입원해서 뭔가 여느 병원과 다르게 분위기가 음침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대감과 두려움, 거부감 등의 여러 감정을 가지고 병원에 들어갔다. 다행히 병원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밝은 분위기였고, 난 그 곳에서 주사님과 함께 그 수급자 아저씨를 만날 수 있었다.

 

듣지 못하는 아저씨와 함께 종이에 펜으로 글씨를 쓰면서 이야기를 했다. 그 모습을 보시던 다른 환자분께서 '혹시 아저씨 딸인교?'라고 물어보셨고, 옆에 있던 간호사분이 웃으면서 '네, 아저씨 딸래미들이에요'라고 말씀해주셨다. 그 때부터 그 아저씨는 내게 또 한 명의 아버지가 되었다.

 

외롭게 죽어간 수급자 아저씨

 

내 이야기가 아니라서 상세히 밝힐 수는 없지만, 그 아저씨는 가족들과 사이가 좋지 않아 아무와도 연락이 되지 않았다. 집도 없이 다리 밑에서 살다가 발견된 뒤 최근에는 요양병원에 입원해 있었고, 선천성 난청으로 듣지도 말하지도 못해서 수화통역사분을 통하거나 내가 그랬던 것처럼 말할 내용을 종이에 쓰지 않으면 대화를 할 수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아저씨는 자신의 병이 어떤 것인지도 정확히 알지 못한 채 죽어가고 있었다. 무릎에 생긴 종양을 수술로 제거해야 하지만 자각증상이 거의 없어서인지 아니면 치료비 때문인지 계속 수술을 거부했고, 결국 온몸으로 종양이 퍼져 손을 쓸 수 없는 상황까지 되어 버렸다. 받을 수 있는 치료는 무통주사가 전부. 그것도 의료보험이 적용되지 않아 비싼 병원비를 지불해야 했기 때문에, 정말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한 단체의 지원 사업을 통해 의료비를 지원받아야 했다.

 

주위에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요양병원에 있는 직원들과 주민센터 복지사가 전부였던 그 아저씨, 그 아저씨는 그렇게 외롭게 이 세상과의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다.

 

또 한 사람의 아빠가 세상을 떠나던 날

 

그렇게 한두 달이 지난 뒤, 아저씨가 입원해있던 병원에서 연락이 없다.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다고. 그 병원에는 장례식장이 없어서 장례식장이 있는 인근 병원으로 옮겼다고. 그 통화가 끝나고 나서 몇 시간 뒤, 다시 연락이 왔다. 아저씨가 돌아가셨다고.

 

사실 수급자분들은 돌아가셨다고 해서 끝난 게 아니다. 가족들이 전부 연락이 되는 상황이라면 장제비 50만 원을 신청하는 것으로 끝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일일이 가족들에게 연락을 해서 장례를 어떻게 할지 이야기를 해야 한다.

 

아저씨의 경우는 후자였기에, 나와 주사님은 아저씨의 제적등본에 나와 있는 가족들의 주소를 주민전산에서 검색해 전화번호를 전부 알아낸 뒤, 그 중 큰형에게 연락을 했다. 큰형은 처음에는 머뭇거리면서 별 관심이 없다는 식으로 이야기했지만, 나중에 그 다음날 찾아가보겠다고 다시 연락이 왔다. 마지막까지 아저씨의 가족들과 연락이 되지 않을까 노심초사했기에,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아저씨의 장례는 끝이 났다. 14일 오전 화장터에서 연락이 와서 수급자 증명서를 보내주었고, 아저씨의 큰형분 앞으로 장제비 50만 원이 지급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병원에서 진단서와 병원 계좌 사본을 보내주었고, 현재 아저씨의 마지막 의료비를 지원받기 위한 서류 심사가 진행중이다.

 

암환자들은 무통주사를 맞으면 견디기 힘들 정도의 극심한 고통을 겪다가 죽는다고 한다. 그 고통을 홀로 견뎌내었을 아저씨. 볼 때마다 밝은 미소를 띠며 보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주었던 아저씨. 내게 또 한사람의 아버지처럼 느껴졌던 그 아저씨, 이제 고통 없는 곳에서 편안히 웃으며 지내시기를 바란다.

 

또 한 사람의 아빠, 안녕.

덧붙이는 글 | <'죽음'에 관한 특별한 이야기> 응모글입니다.


태그:#죽음, #수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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