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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모든 사람은 내남없이 한 번은 죽는다. 아니,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언젠가 반드시 죽는다는 것은 우주의 변함없는 질서이다. 창졸간에 당한 죽음도 있고, 준비된 죽음도 있다. 올해는 우리나라에서 유난히 큰 별들이 많이 사라져 국민들의 가슴이 녹아났다. 사랑하고 존경했던 두 분의 전직 대통령을 떠나보내고 죽음이 일상처럼 다가왔다. 내 가족이 아닌데도 그 슬픔의 무게가 참으로 컸다. 특히 노 대통령의 서거는 내 몸에 깊은 상흔을 남겨 입원을 해야 했고, 상태가 호전되어 그동안 중단했던 항암치료를 다시 시작하게 할 정도로 충격이 컸다.

 

어려서부터 한 번도 죽음을 경험하지 못한 나는 죽음에 대한 생각을 별로 하지 않은 채 살아왔다. 그런 내가 종가 맏며느리로 세 분의 부모님을 내 손으로 어루만져 보내드렸다. 위암이 발생해서 간까지 전이가 되어버린 시아버님은 통증이 심해 한동안은 나에게 온갖 역정을 다 쏟아내시곤 하셨다. 심지어 어떤 날은 반찬그릇을 벽에 던져버리기도 하셨다. 감당하기 힘들었다. 가족이나 당사자나 죽는 날짜를 받아놓고 기다리는 심정이 오죽하겠는가. 집안에는 죽음의 짙은 먹구름이 드리워 숨이 막혔다. 그 분위기에 짓눌려 나도 그 안에서 함께 죽어가고 있었다. 하루하루가 너무 견디기 힘들었다. 그러나 임종이 다가오자 아버님의 역정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시아버님은 관직에 계시다가 퇴직을 하시고는 그 생활을 견디지 못하시는 바람에 가족들이 많은 고통을 당해야 했다. 성격이 급하셔서 아무것도 아닌 일에도 버럭 역정을 내기 일쑤여서 가족들이 늘 비상사태였다. 그래도 맏며느리인 나를 참으로 아끼고 인정해주셨다.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라고 한다. 고된 시집살이도 아버님의 사랑 덕분에 견뎌낼 수 있었다.

 

식성도 좋아서 건강미가 넘치시던 아버님께서 갑자기 몸이 좋지 않아 검진을 한 결과 위암이 번져 간까지 전이가 되어버렸다. 위는 잘라냈으나 간으로까지 이미 다 퍼진 상태에서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아버님의 불같은 성격에 그 고통을 어이 견뎌내실까 싶었는데 의외로 잘 받아들여 의연하게 견디셨다. 밤이면 너무 고통스러워하시는 모습이 안타까워 통증을 잠시라도 잊으시도록 병원에 아는 의사를 통해 마약을 지어다 드렸다. 약이 잠시의 고통만 잊게 해주는 것이라고 설명해드렸더니 몇 번 드시다가 약을 끊으셨다. 그리고 혼자서 조용히 온몸으로 고통을 받아들이셨다.

 

임종을 앞두고 아버님은 그동안의 모습과 완전히 달라지셨다. 남편은 아버지와 이야기도 잘 하지 않았는데 그런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보고는 아버지를 존경하게 되었다.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자세에서 그동안의 아버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우리에게 기억되는 것들은 항상 마지막 모습이다.

 

외로우실까 봐 종손이라고 유난히도 사랑을 쏟아주셨던 손자들을 들여보내면 얼굴을 반대쪽으로 돌리신 채 손만 잡아주시고는 나가라고 하셨다. 아이들에게 할아버지의 좋은 모습만 기억하게 하고 싶어하셨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은 장손인데도 할아버지의 마지막 얼굴을 보지 못했다. 죽음에 임하는 순간은 철저하게 혼자셨다. 깊은 밤, 잠을 자고 있는데 안방에서 소리가 나 들어가 보면 극도의 고통을 견디기 어려워서 일어나 엎드리시곤 "주여, 도와주소서!" 하고 어둠속에서 애타게 하느님을 찾으셨다. 그 모습이 얼마나 간절하고 안타까웠는지 모른다.

 

그 모습이 너무도 안쓰러워 등을 어루만져드렸다. 그랬더니 기도를 멈추시고는 "네 손이 어찌 그리 따뜻하다냐" 하시면서 "너무도 고통스러워 이렇게라도 하니 좀 낫다"고 하셨다. 극도의 고통을 당할 때 대신 아파줄 수는 없지만 곁에 누군가 함께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그때 알았다.

 

저렇게 아버님을 보내드리고 우리는 다시 살아가야 한다는 현실이 두려웠다. 마지막 날은 미음을 떠 넣어 드리니까 받아 드시면서 "이제 얼마 안 남았다" 하시곤 잠시 후 숨이 멎으셨다. 참 신비롭다. 어떻게 당신의 때를 아시는 걸까. 떠나야 할 때가 되면 뭔가를 보여주는 것일까.

 

아버님께서 가시고 문상객들을 맞으면서 사흘 밤을 꼬박 곁에서 지켜드렸다. 그땐 장례식장이 아닌 집에서 모든 일을 다 치렀다. 병수발 하는 동안 그토록 힘들었는데도 잠이 오지 않았다. 피곤한 줄도 몰랐다. 그렇게 온 마음과 온 정성을 다하여 보내드리고 나니 그리움이 사무쳤다. 아버님은 고통이 없는 좋은 곳으로 가셨지만 곁에서 날마다 뵈었던 아버님을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아버님은 내게 그리움을 남기시고 그렇게 가셨다. 백일 동안 영정 앞에서 기도드리며 그리움을 달랬다.

 

그러나 아버님께서 돌아가시자 어머님은 달랐다. 딸이 넷인데 딸들이 오면 섭섭한 것만 이야기하셔 불화가 끊이지 않았다. 딸들이란 어머니편이라 어머니 말을 믿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때문에 어머님과의 거리도 시누이들과의 거리도 점점 멀어졌다. 어머님은 치매로 3년을 고생하시다가 새벽에 모닥불 사그라지듯 그렇게 떠나셨다. 그땐 치매란 말도 없었다. 누구에게도 들어보지 못했으니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3년을 고스란히 치렀다. 그러나 어머님 돌아가시고는 기도를 드릴 수가 없었다.

 

그것은 아마도 나를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너무 아프게 하신 일들이 가슴에 앙금처럼 남아 풀리지가 않았던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러던 어느 날 꿈속에서 어머님을 뵈었다. 어머님은 생전의 기저귀 차신 모습으로 자리에 누워계셨다. 그 모습을 보고는 너무도 불쌍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나는 어머님의 얼굴을 어루만져드리면서 "어머니, 얼마나 힘드셔요. 제가 보살펴드릴게요. 제가 잘 보살펴드릴게요" 하면서 울다가 꿈에서 깨어났다. 그러자 마음이 가벼워지고 편안해졌다. 가슴에 깊이 쌓인 한이 비로소 풀린 것이리라. 나는 지상에서 풀지 못한 매듭을 꿈속에서 시어머님과 그렇게 화해를 했던 것이다. 지상과 천상은 연결되어 있음을 그때 보았다.

 

시부모님을 좋은 곳으로 보내드리고 나자 이번엔 친정어머니가 암에 걸리셨다. 그러나 그동안 병원을 가보지 않은 탓에 병원에 갔을 때는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3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고 서울 아들 집에 계시다가 마지막에는 아버지가 계신 시골 친정으로 내려오셨다. 그래서 나는 돌아가시기 전 열흘 동안 어머니 곁을 지킬 수 있었고, 덕분에 신비한 천상체험도 많았다.

 

세 분 다 70을 넘긴 호상으로 천수를 다하고 가신 것이라 받아들여야 하지만 가장 많은 상처를 남기신 분은 친정어머니시다. 내 전 존재의 뿌리이신 어머니는 자식들이 멀리 있고 시골에 계시는 바람에 몸이 편찮으셔도 얼마나 심한지 알지 못했다가 병원을 찾았을 때는 너무 늦어 3개월을 선고받았다. 자식으로서 아무 것도 해보지 못하고 보내드려야 했다.

 

평소에 친정어머니는 자주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아무리 죽으려고 해도 죽어지지 않는다고 하소연하자 지나가던 스님이 한 가지 방도를 가르쳐주겠다고 하더니 '곡기를 끊으면 한 달이면 죽는다'고 했다는 말씀을 지나가는 말처럼 자주 하시곤 했다. 그러나 나는 철이 없어서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는데 어머니는 그것을 기억하고 계셨다가 실천하셨다. 한 달 여 겨우 드시는 둥 마시는 둥 하시다가 결국 어머니는 곡기를 끊으셨다. 장한 어머니상을 두 번이나 받으실 정도로 강인한 여장부이셨던 어머니는 돌아가실 때도 여걸다웠다. 나의 모든 것이었던 친정어머니를 잃고 나는 일 년 동안 무척 힘들었다.

 

부모님은 연세가 들어 돌아가신 것이니 그래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노대통령은 보내드리기가 너무 힘들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김 대통령 가실 때도 아쉬움은 남았지만 그만큼 심하지는 않았다. 내 가족이 아닌데도 죽음이 주는 그 슬픔의 무게가 참으로 컸다. 사랑하고 존경했던 두 분의 전직 대통령을 떠나보내고 나니 죽음이 갑자기 일상처럼 다가왔다. 죽음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가까이 있었다.

 

가족들의 눈물의 배웅을 받으며 편안하게 떠나신 김 대통령의 모습을 본 그의 비서실장은 마지막 임종에 대해 "대통령을 오랫동안 모셨지만 그렇게 평화로웠던 모습을 본 적이 결코 기억에 없다"고 했다. 마지막 모습이 그렇게 평화로우셨던 것은 할 일 다 하셨다는 만족감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으신 것이 아닐까 싶다. 그 모습은 다행이면서도 혼자서 처절한 외로움으로 부엉이 바위에서 몸을 날려야 했던 노 대통령 모습과 오버랩 되어 안쓰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분을 사랑했던 뜨거운 기쁨들과 그분과 함께 했던 행복한 기억들을 안고 담담하게 그분을 보내드려야 했으나 그렇게 하지 못했다.

 

사랑이 깊으면 외로움도 깊은 것을. 그래도 세 번이나 꿈속에 찾아와주신 그분. 차마 보내드릴 수 없었지만, 차마 놓아드릴 수 없었지만, 결코 믿기지 않는 그분의 부재였지만 사실로 받아들이고 고이 보내드려야 했다. 그분이 잠들지 못하고 힘들어하는 그 시간, 부엉이 바위 아래로 몸을 날리는 그 시간, 내 몸은 그분과 함께 나를 깨어있게 했다. 나보다 더 나를 잘 아는 것은 내 몸이었다. 노 대통령이 가시고 일주일 동안, 그리고 49재까지 나라 안팎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 절절한 그 파장은 참으로 길고 뜨거웠었다.

 

노 대통령의 죽음 앞에서는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가련하고 가련해서 가슴이 미어질 것 같았다. 어쩌면 그분은 그리도 서럽게 가야 했을까? 28일 밤, 노 대통령과의 마지막 이별을 고해야 하는 전날 밤에는 항암치료 받는 것처럼 잠도 못자고 끙끙 앓았다. 태연한 척 했지만 잠도 안 오고, 음식을 먹을 수도 없고, 도무지 마음의 중심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 파장은 내 몸에 커다란 변화를 남겼다. 나도 모르는 깊은 상실감으로 이후 계속되는 체중저하는 심하게는 36kg까지 내려간 적도 있었다. 결국 대상포진으로 입원을 해야 했고, 호전되어 중단했던 항암주사를 다시 시작해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나 역시 완치가 안 되는, 그래서 평생 치료해야 하는 골수암으로 죽음 앞에 서있다. 항상 죽음이 친구처럼 내 가까이에 있다. 그러나 두렵지도 않다. 삶과 죽음은 하나로 공간이동이 될 뿐이다. 죽음은 언제 어디서 죽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느냐가 중요하다. 내가 어떤 태도로 죽음을 맞는가 하는 열쇠는 온전히 내 손에 달려있다. '잘 보낸 하루가 행복한 잠을 가져오듯이 잘 보낸 삶은 행복한 죽음을 가져다준다'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말처럼 나도 잘 보내고 행복한 죽음을 맞이하리라.

덧붙이는 글 | <죽음에 관한 특별한 이야기> 공모글입니다


태그:#상실감, #일상인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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