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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장과 아이 얼굴이 너무 귀엽다.
▲ 사자의 탈을 쓴 아이 분장과 아이 얼굴이 너무 귀엽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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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세계일주 루트를 그리면서 처음에는 가장 짧은 코스를 계획해 멕시코 남서부에서 바로 과테말라로 이동하기로 했었다. 하지만 치첸이차, 팔렝케, 칸쿤, 뚤룸 등 유카탄의 매력적인 여행지들은 기존 루트를 포기하라며 내 안의 모험 본능을 일깨웠다.

유카탄 자전거 여행은 풍성한 경험을 선사하는 대신 다른 나라에서 체류할 시간을 잡아먹었다. 기회비용의 선택이긴 했지만 이대로 가다간 6년이 아니라 8년이 되어도 이 지구를 완주하는 것은 뜬구름 잡는 격일지 모른다. 그래서 원래 루트를 한참이나 돌아간 까닭에 일정을 맞추느라 버스에 자전거를 싣고 뚤룸 유적지를 출발해 멕시코 동남부 국경 도시 체투말에 도착했다.

각종 민예품이나 토산품 등을 파는 가게들이 열을 지어 있다.
▲ 길거리 풍경 각종 민예품이나 토산품 등을 파는 가게들이 열을 지어 있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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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도시만 지나면 드디어 중앙아메리카의 소국(小國) 퍼레이드 첫 타자로 벨리즈가 나오는 것이다. 체투말은 중남미 거의 모든 도시가 그렇듯 방사형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 바둑판 형태로 이루어진 점이 이채로웠다. 덕분에 도시에서 길 찾기는 여느 도시보다는 조금 더 까다로웠다.

멕시코 마지막 도시라니 감회가 새로웠다. 때문에 오늘만큼은 여유도 게으름이 되는 것이요, 결코 허투루 보낼 수 없었다. 도시에 도착하자마자 도로에서 웬 차량들이 열을 지어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러시아워가 아니었다. 차량 뒤로는 사람들의 행렬이 도로를 가득 메웠다. 그런데 행렬 속에서 아이들이 재잘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르나발(축제)로 생각하고, 나도 구경꾼 중 하나가 되었다.

부모의 손을 잡고 걷는 아이들.
▲ 퍼레이드 부모의 손을 잡고 걷는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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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드레스가 인상적이다.
▲ 축제 참가 중인 아이들 화려한 드레스가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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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저마다 동물이나 만화 캐릭터 등 개성 있는 분장을 하고서는 마음껏 귀여움을 뽐냈다. 그 뒤를 부모와 교사들이 따랐다. 그런데 한참을 따라가 보니 3월 14일이 특별한 축제 기간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럼 이 행사는 대관절 무엇이기에 경찰의 호위를 받고 또한 시민들의 환호 속에 도로에서 퍼레이드를 하는 걸까.

구경꾼에게 물어보니 이날은 체투말 학생의 날(특정 학교만 그런 건지 도시 전체가 그런 건지는 확인하지 못했다)이란다. 그래서 아이들 중심으로 행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분장한 모습도 귀여운데 보조개를 보이며 웃거나 '똥그란' 눈으로 무언가 바라보는 모습이 너무나도 앙증맞았다.

아이들 매력에 흠뻑 빠져 튀는 이방인 차림으로 쫓아가며 사진을 찍은 게 그들 눈에는 흥미로웠던 걸까. 갑자기 다섯 살 정도밖에 보이지 않던 녀석 하나가 급히 액션을 취했다. 조막만한 손에 쥐어진 것 중 하나를 빼더니 구경하는 사람들 중에 나에게만 건네주었다. 사탕이었다. 이를 보던 사람들이 박장대소를 했다. 마치 근엄한 어린 황제가 늙은 신하에게 상을 하사하는 모양이었으니 말이다.

3월 14일. 체투말 학생의 날이란다.
▲ 귀여워. 3월 14일. 체투말 학생의 날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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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부자였다. 주머니에는 껌과 과자와 사탕이 가득했다. 한 가지 고개를 갸우뚱거린 부분은 어른이 아이에게 선물을 주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지나가다가 뭔가 마음에 든다 싶으면 먹을 것들을 꺼내 준다는 사실이다. 그 혜택을 나를 비롯한 소수의 관람객들만 누렸으니 기분은 좋았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이 행사의 숨은 의도는 또 다른 곳에 있었다. 바로 유치원 홍보. 뒤따라가느라 보지 못했는데 맨 앞으로 가서 보니 두 명의 아이가 유치원 홍보 미니 현수막을 들고 행진하고 있었다. 탄성이 터져 나왔다. 전혀 눈치 채지 못했는데 학교 축제와 홍보가 그야말로 절묘하게 결합한 순간이었다. 교사는 학교 홍보해서 좋고, 부모는 아이들 행사 때문에 즐거워서 좋고, 이것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인가 싶다.

유치원 홍보(?)
▲ 유아 교육의 중심 유치원 홍보(?)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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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레이드를 쫓아가다 이번엔 무리를 이탈해 무척이나 소란스러운 곳에 들어가 봤다. 또 다른 학교 입구였는데 정문에 들어선 순간 난리도 아니었다. 중학생들이 서로 물총을 쏴대고 물풍선을 던지고 있었다. 여기엔 선생님도 학부모도 이방인인 나도 예외일 수가 없었다.

학생들은 서로 팀을 나눠 치열하게 물놀이를 전개하는가 싶더니 역시나 막판에는 같은 팀에게도 치명적인 물벼락 배신을 때린다. 특히나 여기에서도 예쁜 여선생님들은 짓궂은 남학생들의 집중 타깃이 되었다. 고로 옷이 흠뻑 젖은 선생님일수록 인기가 많다는 방증이 된다. 사춘기의 유치한 애정 표현은 한국이나 여기나 별반 다르지 않나 보다. 이렇게 재미있는 장면에 사진기를 가까이 대자 여지없이 내게로 물총을 쏘는 개구쟁이 녀석들. 첫 만남을 시원한 신고식으로 환영했다. 덕분에 카메라 렌즈가 젖어 버렸지만 이렇게 친근하게 대하는 아이들을 보자니 웃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거침없이 물총을 쏴 대는 아이.
▲ 친구를 향해 쏴라! 거침없이 물총을 쏴 대는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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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내 안에선 선생님과 학생의 차이가 없다. 일단 표적이 되면 모두 물세례는 각오해야 한다.
▲ 물총 쏘는 아이. 교내 안에선 선생님과 학생의 차이가 없다. 일단 표적이 되면 모두 물세례는 각오해야 한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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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학교 축제기간 중 하이라이트라고 한다. 아이들과 선생님들 간의 격의 없는 물장난, 상급생과 하급생이 구분 없이 모두 즐거이 어울리는 시간(오히려 상급생들이 당한다), 이런 장면을 함께 즐기는 학부모들. 덕분에 옷은 젖었지만 마음은 점점 따사로운 감정으로 물들어 갔다. 그리고 나이를 잊은 나도 이 분위기에 쉽게 동화될 수 있었다.

비록 멕시코 작은 도시의 학교였지만 이런 아이들의 교육 커리큘럼을 보며 먼 미래에 내 아이가 이렇게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순간이 올까 생각해 보게 된다. 살인적인 학업 스케줄에 치여 꿈을 저당 잡히고 당장의 오늘 성적만 바라보며 낑낑대는 우리 아이들은 친구들과 이런 신나는 놀이를 하는 대신 컴퓨터 앞에서 도무지 무익한 게임만 하는 것이 유일한 낙이 되어 버렸다. 참 가슴 아픈 일이다.

교내에서 물장난하는 개구쟁이들의 모습이 귀엽다.
▲ 아이들 교내에서 물장난하는 개구쟁이들의 모습이 귀엽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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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아이들을 보다 보니 논둑으로 언덕으로 심장이 터지도록 달려도 보고, 땡볕 아래서 축구며 농구며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도록 놀아도 보고, 저수지로 냇가로 가서 물고기며 올챙이를 잡아도 보고, 엄마가 저녁 먹으라고 부르기 전까지 가로등 밑에서 친구들과 이런저런 놀이하며 쌓았던 내 유년 시절의 건강한 추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르며 정말 소중하게 느껴졌다.

곳곳에서 물벼락 맞는 난리통에 물총과 물폭탄이 없어 당하기만 하던 나는 아이들에게 휴전을 제의했다. 사진 찍어주는 대가로 말이다. 고맙게도 나는 중립 위치에서 그네들 사이를 자유롭게 오갔다. 그리고 해질녘이 되어서야 공격하는 이나 당하는 이 모두 짜릿했던 물싸움은 모두 끝이 났다. 남은 건 바닥에 널린 온갖 물풍선 조각들.

물싸움 후에 학교 마당.
▲ 흔적 물싸움 후에 학교 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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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국경 마을에서 마지막 여행은 그렇게 아이들과 함께 어울려 지내는 것으로 하루의 일기를 써내려갔다. 미국 횡단 후 멕시코에 입성하고 136일간의 대장정을 마감한 밤, 물에 빠진 생쥐꼴로 방문한 곳은 역시나 소방서였다. 모든 이가 반갑게 맞아주었고, 어려움 없이 숙소를 배정 받음에 감사하며 체투말을 기억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무선 인터넷이 '빵빵' 터지는 체투말 소방서에서 깊은 밤이 흐르는 시간, 난 한국의 지인들에게 멕시코와 작별하는 순간을 전하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필자는 현재 '광야'를 모토로 6년 간의 자전거 세계일주 중입니다. (멕시코 여행은 2008년 3월 이야기입니다.)
저서 <라이딩 인 아메리카>(넥서스 출판)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 http://www.vision-trip.net



태그:#멕시코, #세계일주, #자전거여행, #배낭여행, #라이딩인아메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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