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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허스님의 선방일기는 여시아문 출판사에서 2003년 발간하여 2007년 까지 초판 7쇄 까지 발행한 책이다. 출판되기 전에 <현대불교신문>에 연재되어 많은 호응을 얻었다. 

 

서울대 출신의 지허스님이 1970년대 초, 오대산 상원사에서 동안거 기간 동안 겪은 선방의 얘기이다. 1973년 봄 <신동아>의 논픽션 공모에 응모하고 당선된 작품이다. 책 머리글에 의하면 지금 지허스님의 행방은 알 수 없는 모양이다.

 

어딘가 계신다면 우리또래 이거나 바로 위 형님 뻘 될 것 같은 생각에 친근한 마음이 들어 책을 들자마자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손에서 놓지 못했다. 136쪽으로 된 수첩마냥 적은 책인지라 더욱 부담스럽지 않았다.

 

책의 내용은 마치 목욕하는 처녀를 울타리 너머로 엿보는 듯한 짜릿한 흥분이 있었다. 일전에 읽은 <욕심을 버리는 법> 책도 절의 스님들의 생활에 관한 내용을 적나라하게 기술한 내용이라 흥미로웠지만 이 책은 일체 신비로 감춰진 선승들의 자신들과 처절한 투쟁만이 존재하는 세계의 사실적 묘사이다. 동안거는 음력 10월 15일에 시작하여 다음해 1월 15일에 끝나는 3개월 수행기간을 말한다.

 

결제기간에는 사찰 밖으로 일체의 출입을 삼가고 오직 화두를 들고 참선하는 것이 주 일과이다. 새벽 2시 반에 일어나서 3시부터 6시까지 참선, 오전 8시부터 11시까지 참선, 오후 1시부터 4시까지 참선, 오후 6시부터 9시까지 참선하는 일과로 짜진 오직 견성을 위한 수행일정이다. 이 곳은 외부인의 출입이 일체 봉쇄된다.

 

나도 2005년 여름 통영 앞 오곡도라는 섬의 선방에서 일주일 간 무(無)자 화두를 들고 참선만을 위한 생활을 해본 경험이 있다. 참선을 통해 선정에 들었을 때는 시간의 경과에 무감각할 수 있지만 일단, 좌선이 육체의 고통으로 느껴지기 시작하면 엄청난 고행이 된다. 하루 종일 미동도 않는 ‘차렷’ 자세로 버텨야 한다.  이를 극복하고 참선 7일 째 되던 날 저녁에 경험한 신비의 체험은 지금도 성성히 나의 의식에 자리하고 있다.

 

선방의 분위기는 가장 어르신인 조실 스님의 결제 법문의 간추린 요지에서 그 결연한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영원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모든 것은 영원하다. 상(相)의 세계인 물질의 형태에서 보면 영원한 것이 있을 수 없고, 물질의 본성인 공(空)의 세계는 영원하다. 중생의 고집(苦集)때문에 영원성은 부인되는 것이요, 불타의 열반 때문에 영원성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이다. 저 눈 속에서 탄생의 기쁨을 위해 다소곳이 배자(胚子)를 간직하는 동물처럼, 얼어붙은 땅속에서 배아(胚芽)를 키우는 식물처럼 우리도 인간의 한계성을 극복하고 가능성인 불성을 얻어 다가오는 초춘(初春)땐 기필코 견성하도록 하자. 불성은 나의 안에 있으며 영원한 것이다.

 

결제 기간의 수행에는 매우 강한 정신력과 육체의 완벽한 건강이 기본적으로 요구된다. 어느 사회나 투쟁과정이 처절할수록 낙오자가 많이 생기기 마련일 것이다. 자연의 섭리에 충실한 선승들인지라 낙오자들을 인간적으로 배려할 겨를도 없다는 사실이 매우 충격적이다. 만일 인연이 닿는다면 한시적일지라도 출가하여 선방에 방부를 들이겠다는 생각을 가끔 해보는 나에게 비쳐지는 비정한 낙오자들의 현실은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법문 그 자체이다.

 

위선에 의해 생식을 하고 이로 인해 다른 선승들로부터 차별을 강조하고 싶은 한 선승이 한 겨울에 강원도 오대산 상원사의 불기도 없는 삼신각에서 단식을 하겠다는 극단적이고 무모한 고행을 만류하는 지허스님과 그 스님 간의 대화를 통해 위선의 무섭고 비참한 결과의 실상을 본다. 아상(我相)을 버리지 못하고 위선 때문에 쇠락의 길을 선택하는 스님에 연민의 정이 앞선다.

 

“신외무물(身外無物) 아생연후(我生然後) 만사재중(萬事在中) 이라는 말을 얼핏 들으면 물질적이고 이기적인 것 같지만 자세히 음미해보면 존재의 보편타당성의 가장 적나라한 표현임을 알게 됩니다. 무한한 공간, 무량한 원소, 무진한 시간, 무궁한 활력(에너지)의 부단한 작용에 의해 생멸하는 무수한 존재 중의 하나로써 나를 의식했을 때, 비로서 나를 만나게 됩니다. 그 동안 양생을 위한 수신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하여 나를 찾았을 때는 이미 나는 없고 다만 적멸이 있을 뿐입니다” 라고 설득해 보지만, 그 스님은 엄동설한의 냉방의 단식을 택했고 3일만에 하산해야 하는 필연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본래 고행이라는 것은 고행을 생각한다거나 느낀다면 이미 그것은 고행이 아니다. 단지 자기 학대일 뿐이다. 고행이란 자기가 고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무의식적으로 실행하게 되어야 참된 고행이며 견성을 향해가는 길이 되는 것이다.

 

일즉다(一即多) 다즉일(多即一),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은 불교의 중도(中道)의 완벽한 표현이다. 중도란 대소와 고저의 가치를 분간하는 자타를 넘어서 크고 높은 가치를 실현하는 일이다. 여기에 대승의 진리가 잠겨있다. 양극에 부딪쳐 상극에 그치지 않고 더 높고 더 큰 가치를 지양하며 나아간다. 중도란 단순한 중간이나 중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무궁무진한 불교의 정신에서 다즉일(多即一)의 진리를 선양하는데 그 본의가 있다. 일즉다(一即多)이다.

 

색즉시공은 현대물리학으로 설명되고 증명된 보편적인 사실이다. 즉, 현존하는 물체를 쪼개고 쪼깨면 최후에는 형태가 없는 파장 또는 떨림이나 진동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상을 갖는 물체는 궁극적인 형태가 없다는 것이다.

 

불교 중도의 본질을 일즉다(一即多) 다즉일(多即一)로 표현하는 의미는 얼핏 생각하면 크게 혼란을 일으키기 쉽다. 그러나 본질과 현상의 개념으로 설명한다면 한층 더 쉽게 우리에게 다가온다. 예를 들어 원을 정의해보자. '하나의 점에서 동일한 거리에 위치하는 점들을 연결하는 선 또는 그 선의 내부의 면적이라고 정의 할 것이다.' 이렇게 정의되는 원은 분명히 존재한다. 바로 이것이 원의 본질이다.

 

그러나 이 원을 형상화하여 상을 갖게하면 이미 그것은 원이 아니다. 왜냐면, 점은 위치만 있고 면적이 없다. 선은 길이만 있고 넓이가 없다. 면적은 넓이만 있고 두께가 없다. 이런 점과 선 그리고 면적을 사용하여 원을 형상화할 수 있겠는가? 사실 원을 형상화하는 순간 원은 원이 아닌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함에도 우리들은 아무런 모순도 없이 많은 원을 그리고 또 사용한다. 그러나 원의 본질은 하나일 수 밖에 없고 영원 불멸하다. 동시에 원의 형태는 수도없이 많으며 유한하다. 그러므로 일즉다(一即多) 다즉일(多即一)이며,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 되는 것이다.

 

조실 스님의 해제 법문으로 동안거는 끝난다. 한여름 소나기 내린 후 피어나는 뭉게구름처럼 뭉쳤다가 흩어지는 인연따라 스님들은 만행 길에 나선다

 

계산없이 행하는 상극을 초월하는 도의 경지는 나에겐 영원히 무지개요 그림자가 아닐까 싶다. 부처의 열반의 경지를 의심하는 나의 중생의 속성은 그 동안 쌓은 적고 적은 공부마저 삭풍이 이는 허공으로 흩어진다.


선방일기

지허 스님 지음, 견동한 그림, 불광출판사(2010)


태그:#참선, #동안거, #결제, #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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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덕연구단지에 30년 동안 근무 후 은퇴하여 지리산골로 귀농한 전직 연구원입니다. 귀촌을 위해 은퇴시기를 중심으로 10년 전부터 준비했고, 은퇴하고 귀촌하여 2020년까지 귀촌생활의 정착을 위해 산전수전과 같이 딩굴었습니다. 이제 앞으로 10년 동안은 귀촌생활의 의미를 객관적인 견지에서 바라보며 그 느낌을 공유해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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