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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할머니에게 딸은 “쓰잘대기 읍는 지지배”인데 반해 외할머니는 “에구 이쁜 내새끼”였다. 지금은 두 분 모두 그리운 할머니지만...
▲ 내 로망이었던 외갓집. 친할머니에게 딸은 “쓰잘대기 읍는 지지배”인데 반해 외할머니는 “에구 이쁜 내새끼”였다. 지금은 두 분 모두 그리운 할머니지만...
ⓒ 고의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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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할머니는 남아선호사상의 대가였다. 딸을 낳은 며느리는 첫국밥조차 제대로 얻어먹지 못했다 한다. 나 역시 할머니 댁 사랑방에서 태어났는데 나를 받으신 할머니께서 “이런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지지배”하면서 태도 안 가르고 돌아앉아 우시는 바람에, 극심한 산고를 치르며 첫 출산한 우리 엄만 첫국밥도 못 드셨다고 두고두고 말씀하셨다. 이 얘기를 들을 때마다 난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태어나면서부터 딸이어서 환영받지 못한 설움은 자라면서 그 도를 더했다. 아버지 직장 때문에 일찍이 분가해 살던 우리는 엄마의 잦은 병환으로 할머니 댁에 심부름을 자주 가야 했다. 그 당시로선 기차를 타고 멀리 가는 일이 흔한 일이 아니라서 친구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는데도 마음 설레기보단 할머니께 야단맞을 일에 겁부터 나곤 했다.

우리 할머니는 모처럼 찾아온 손녀를 환대는커녕 걸핏하면 “쓰잘대기 읍는 지지배”라며 내 기를 죽이셨다. 혹시 사촌들과 어울려 놀다 할머니 눈에라도 띄었다간 “놀믄 밥이 나오네? 밭이 나가 풀이래두 뽑어”하시며 호통을 쳤다. 손자들은 학교 숙제를 핑계로 방안에서 빈둥거려도 손녀들은 잠시의 휴식도 용서받지 못했다. 객지 사는 손녀 역시 예외가 없었다. 

할머니 호통이 무서워 고사리 같은 손으로 농사일을 거들면서도 오빠들이 밭일을 안 하는 것에 억울하단 생각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집에 돌아와 마주한 밥상 앞에선 한없이 억울하고 속상했다. 집안에서 책이나 끼고 빈둥거리는 오빠들은 편안하게 다 차려진 밥상에서 밥을 먹는데 난 늘 언니들 틈에 간신히 끼어 전쟁을 치르듯 밥을 먹어야 했으니 말이다.

유일한 여자인 할머니와 안방의 남자들 밥상은 최소한 생선이 오르고 밥과 국이 가지런히 놓인, 각자의 자리가 정해진 교자상인 데 비해 건넌방의 여자들 밥상은 나물 몇 가지에 신 김치뿐인, 그것도 모듬으로 차려진 두레반이었다. 밥과 국은 스스로 떠먹어야 했고, 새 반찬은 양이 얼마 되지 않아 경쟁이 치열했다. 아직 어린 데다 약삭빠르지도 못했던 난 늘 이 생존경쟁의 패배자였다.

더욱이 큰어머니께서 “그 생선(혹은 고기) 의숙이네서 가져온 거예요. 많이 잡수세요”하는 소리를 듣노라면 울컥하는 마음에 눈물이 솟구치곤 했다. 우리 집에서 가져온 맛있는 반찬이 모두 남자들 몫이고 난 국물조차 구경할 수 없다는 것이 그렇게 억울할 수가 없었다. 솔직히 그 시절엔 우리 집에서도 생선이나 고기는 좀처럼 구경하기 힘든 귀한 음식이었으니 맛보지 못하는 그 억울함이 오죽했겠는가.

손녀에겐 호랑이처럼 무서운 할머니가 손자에겐 너무나 자애로웠다. 손자가 잘못해도 꾸중은 손녀가 대신 들어야 했다. 가끔 나와 동행한 남동생은 할머니 밥상에서 밥을 먹는 특혜가 주어졌는데 이런 사랑이 녀석은 부담스러웠는지 아님 누나들을 야단치는 할머니가 무섭게 느껴졌는지, 할머니 관심을 뿌리치고 누나 곁에서 밥을 먹겠다고 떼를 쓰곤 했다. 이때도 할머니의 불호령은 고스란히 내 몫이 되곤 했으니 그 억울함이야 어디 필설로 다 할 수 있으랴.

넉살좋은 사촌 언니나 여동생들은 할머니 잔심부름이나 어깨를 주물러드리기 위해 할머니 방을 드나들며 과일이나 사탕 등을 얻어먹기도 했는데, 난 그것이 부러우면서도 할머니 방에 들어갈 엄두를 내지는 못했다. 할머니 앞에만 서면 오금이 저려 입이 떨어지지 않아 묻는 말에 대답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고, 그때마다 “저 쓰잘데기 읍는 지지배는 입도 읍네?”하는 소리에 점점 더 기만 죽었다.

할머니의 역정을 들으면서 “할머니도 여자면서 왜 여자를 무시하세요?” 따져 묻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았지만 감히 그럴 용기도, 처지도 못 되었기에 억울함을 속으로 꾸역꾸역 삼키며 그저 맘속으로 “나중에 커서 내가 쓸모없는 사람이 아니란 것을 꼭 보여주리라” 다짐하곤 했다.

그런데 이런 내 다짐이 위기에 봉착하고 말았다. 할머니께서 “지지배가 중핵교는 댕겨서 모한다네. 에미두 아픈디 집이서 살림이나 개리키지”하시며 나의 중학교 진학을 반대하신 것이다. 이 소리를 들은 난 걱정이 태산이었다. 만약 중학교도 가지 못한다면 정말 쓸모없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고민 끝에 난 할머니를 빨리 돌아가시게 해 달라는 간절한 기도를 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내 기도를 하나님이 덜컥 들어 주신 것이다. 중학교 입학시험 예비소집 일에 할머니의 병세가 악화되었다는 소식이 날아들더니, 끝내 내 중학교 합격자 발표를 하루 앞두고 할머니께서 하늘나라로 가시고 말았다. 결국 난 중학교 합격증을 받아들고 두려운 마음으로 할머니 장례식에 참석해야 했다.

할머니 죽음에 대한 당혹감이 채 가시기도 전에 내게는 더 큰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할머니 돌아가신 지 꼭 40일만에 갑자기 우리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것이다. 건강한 젊은이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뜨자 사람들은 말이 많았다. 여기저기서 어른들의 두런거림 속에 내 귀를 잡아당기는 말이 있었으니 그것은 '할머니가 아들을 데려갔다'는 말이었다.

그잖아도 내 기도 때문에 할머니께서 돌아가신 거 같아 찜찜한 참인데 그런 소리를 들었으니 어린 마음이 얼마나 무섭고 떨렸겠는가. 할머니께서 내 기도를 알아채고 벌주기 위해 우리 아버지를 데려가신 거란 두려움은 사춘기가 지나도록 날 괴롭혔다.

오늘(12월 6일)은 바로 42년 전 우리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신 날이다. 긴 세월이 흘렀지만 난 아직도 할머니의 양력 기일(제사는 음력으로 지내는데도)을 또렷이 기억할 만큼 할머니의 죽음은 내게 충격적인 사건이 되고 말았다.

할머니의 유난스런 남아선호사상 앞에 딸이란 이유만으로 늘 죄인처럼 주눅이 들어야 했던 어린 시절, 할머니 기일만 되면 두려운 마음으로 보내야 했던 이 우연한 사건은 결국 또 하나의 족쇄가 되어 날 압박했다. 가부장제사회에서 딸로 태어난 죄 값을 참으로 혹독하게 치른 셈이다.

덧붙이는 글 | '차별의 기억' 응모글입니다.



태그:#할머니, #차별,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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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 살면서 오블에 <고단한 삶의 놀이터>란 방을 마련하고 타국살이의 고단함을 풀어내고 있습니다. 블로그 운영한 지가 일 년 반이 되었으나 글쓰기에 대해 늘 자신이 없어 좀 더 체계적이고 책임있는 글을 쓰고 싶다는 욕심에 시민기자 활동을 신청합니다. 주로 사는 이야기와 여행 이야기에 관심을 갖고 주부의 시선에서 바라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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