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동티모르의 전통의식. 새끼돼지의 코를 잘라 코코넛 물에 섞은 다음 사람들에게 뿌린다. 바위가 있는 곳에서 한 번, 물이 있는 곳에서 한 번, 모두 두 번의 의식을 치른다. 집안에 경조사가 있을 경우 이 의식은 필수라고 한다.
 동티모르의 전통의식. 새끼돼지의 코를 잘라 코코넛 물에 섞은 다음 사람들에게 뿌린다. 바위가 있는 곳에서 한 번, 물이 있는 곳에서 한 번, 모두 두 번의 의식을 치른다. 집안에 경조사가 있을 경우 이 의식은 필수라고 한다.
ⓒ 조경국

관련사진보기



의식이 끝나면 돼지를 요리해 가족들과 함께 나눠 먹는다. 제물로 쓰인 돼지의 털을 제거하기 위해 불을 붙이고 있다.
 의식이 끝나면 돼지를 요리해 가족들과 함께 나눠 먹는다. 제물로 쓰인 돼지의 털을 제거하기 위해 불을 붙이고 있다.
ⓒ 조경국

관련사진보기


침 뱉고, 찌르고, 뿌리고

라리 패밀리의 전통의식은 7시부터 시작되었다. 주문한 아침식사가 나오기 전이라 우리는 마음 놓고 전통의식을 구경할 수 있었다.

전통의식에는 남자들만 참여하는지 돌과 나무가 있는 곳에 남자 7명이 모여 있었다. 전통의식을 주도한 사람은 주황색 모자를 쓰고 흰 수염을 기른 남자였다. 모인 사람들 중에 가장 나이가 많은 것처럼 보였다. 이 분도 라리의 큰아버지란다. 이들에게 큰아버지가 아버지의 형님인지 아니면 집안의 어른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무조건 '큰아버지'라니까.

어젯밤 가족들에게 화를 내던 라리의 큰아버지는 윗부분을 자른 코코넛 열매를 잡은 채 앉아 있었다. 젊은 남자가 자루에서 돼지 한 마리를 꺼냈다. 몸집이 작은 새끼돼지다. 돼지는 주둥이와 앞발·뒷발이 꽁꽁 묶여 있었다.

흰 수염 남자가 돼지에게 뭐라고 이야기를 하더니 돼지를 향해 침을 뱉는다. 그리고 가늘고 긴 칼로 돼지코에 상처를 냈다. 돼지가 비명을 지르면서 발버둥을 친다. 흰 수염 남자는 돼지 코에서 피를 짜내어 코코넛 열매 안으로 떨어뜨린다.

돼지는 곧바로 땅에 눕혀지고 칼을 넘겨받은 다른 남자가 칼끝으로 돼지 심장을 겨눈다. 돼지의 심장을 뚫고 들어가는 칼. 한동안 버둥거리던 돼지가 이윽고 움직임을 멈추고, 남자는 칼을 뽑는다.

칼에는 돼지 피가 묻어있다. 그 칼을 윗부분을 잘라낸 코코넛 열매 안으로 집어넣고 흔든다. 칼에 묻은 돼지 피와 코코넛 액체를 섞는 것이다. 피가 섞인 코코넛 액체를 흰 수염 남자가 주변에 뿌리기 시작한다. 사람들에게도 뿌린다. 내게도 뿌린다.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졌지만 그렇다고 피할 수도 없어서 '뿌리는 대로 맞으리라' 이러면서 맞았다.

의식은 한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펌프가 있는 물가에서 한단다. 같은 의식이 같은 순서로 반복된다. 두 마리의 새끼 돼지가 죽임을 당한 것이다. 이번에는 돼지 피가 섞인 코코넛 액체를 피하느라 두어 발짝 뒤로 물러서 있었다. 의식이 다 끝난 것 같아서 다가갔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내게 휙 뿌린다.

죽은 돼지를 불을 붙인 짚에 그을리는 것을 보았다. 이렇게 전통의식은 끝났다. 라리의 말에 따르면 전통의식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죽게 된단다. 라리는 그것을 절대적으로 믿는다고 했다. 그것을 믿는 것은 라리 뿐만 아니라 그들의 패밀리도 마찬가지겠지만.

한 가지 다행인 것은 전통의식을 하는데 구경꾼을 개의치 않는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마음 편하게 구경하고 사진도 찍을 수 있었다. 물론 돼지의 심장을 찌르는 광경은 과히 보기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라리는 동티모르에서는 결혼식도 두 번 한다고 했다. 한번은 천주교 식으로 또 한 번은 전통의식으로. 그만큼 토속신앙도 뿌리가 깊은 모양이다.

한때 사람이 살았지만 지금은 원숭이만이...

뚜뚜알라 해변에서 바라본 자코섬.
 뚜뚜알라 해변에서 바라본 자코섬.
ⓒ 조경국

관련사진보기


자코섬 가는 길에 줄낚시로 잡아올린 붉은 물고기. 50cm가 넘는 이 물고기를 5달러를 주고 샀다.
 자코섬 가는 길에 줄낚시로 잡아올린 붉은 물고기. 50cm가 넘는 이 물고기를 5달러를 주고 샀다.
ⓒ 조경국

관련사진보기


아침식사는 아주 간단했다. 고구마 같은 것을 넣어 만든 빵을 기름에 튀긴 것과 커피가 전부였으니까. 입맛이 없었다. 하긴 이른 아침부터 돼지 두 마리가 죽는 것을 봤으니 식욕이 땡긴다면 이상한 것이겠지.

식사를 마치고 짐을 꾸렸다. 이제는 배를 타고 자코섬을 둘러볼 예정이었다. 자코섬은 직경이 11㎞인 긴 타원형 무인도로 지금은 원숭이만 살고 있단다. 인도네시아가 점령했을 때는 누군가가 살고 있었다고 했다. 지금도 자코섬에는 인도네시아가 세운 구조물이 남아 있다. 멀리서도 보인다. 자코섬에는 식수가 없단다.

게스트하우스에서 라리를 만난 덕분에 배를 타는 인원이 늘어났다. 우리 일행 넷과 라리, 선장, 현지인 가이드 이렇게 일곱 명이 된 것이다. 나중에 생각하니 현지인 가이드가 한 일은 생선 한 마리를 낚은 것 외에는 없다. 대화를 나눈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특별하게 나서서 한 일도 없다. 아, 중간에 모터보트의 기름을 채워넣는 일을 하기는 했다.

그래도 현지인 가이드 덕분에 제법 큰 붉은 생선 한 마리를 낚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모터보트 위에서 별다른 미끼 없이 생선을 잡는 것을 볼 수 있었으니 그를 배에 태운 것이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가 잡은 생선은 5달러를 주고 사서 딜리로 돌아가는 길에 들른 콤비치의 리조트에서 바비큐를 해먹었다. 싱싱해서 그런지 비린내가 전혀 나지 않고 맛있었다.

배는 일곱명이 타니 꽉 찬다. 자코섬을 한 바퀴 돌고 돌아온다고 했다. 섬 둘레를 도는데 걸리는 시간은 대략 1시간쯤이라고 했는데 실제로 타보니 1시간 40분쯤 걸렸다.

하늘은 맑았고, 바람도 별로 불지 않았다. 평온한 바다를 모터보트가 달린다. 이따금 배가 흔들거리긴 했지만 위험은 그다지 느껴지지 않았다. 푸른 바다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맑은 바닷 속이 고스란히 들여다보이는 것도 신기했다. 뱃전에서 바닷속으로 손을 집어넣고 휘저어 본다. 시원하다.

평소에도 이 바다가 이렇게 잔잔한지 궁금해졌다. 바람이 심하게 불거나 해일이 이는 날에는 위험하단다. 실제로 자코섬을 돌다가 해일이 너무 세서 살아 돌아가지 못하는 줄 알았다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로 운이 좋았다. 그런 위험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자코 섬에 내려서 둘러보았으면 좋았으련만 우리는 멀리서 섬을 보기만 했다. 아무도 섬에 가라고 권하는 사람이 없었다.

배가 다시 뚜뚜알라 해변으로 돌아가자 남자 대여섯 명이 달려들어 모래사장으로 배를 끌어낸다. 이들은 전부 라리네 패밀리란다. 이들은 게스트하우스만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배를 빌려주기도 하고 바다에서 생선을 잡기도 하면서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라리는 뚜뚜알라 마을까지 태워다 달라고 했다. 걸어서 가면 1시간 반이 걸리는 거리. 그래서 라리와 함께 공동우물이 있는 뚜뚜알라 마을까지 같이 갔다. 라리의 집은 그곳에 있었고, 간 김에 우리는 라리네 집 구경을 하기로 했다.

티모르에서 처음 보는 하이힐

라리의 가족. 라리는 게스트 하우스에서 일하고 부인과 딸은 뚜뚜알라 마을에서 살고 있다.
 라리의 가족. 라리는 게스트 하우스에서 일하고 부인과 딸은 뚜뚜알라 마을에서 살고 있다.
ⓒ 조경국

관련사진보기


눈이 크고 예뻤던 라리의 딸. 안타깝게도 이름을 적어오지 못했다.
 눈이 크고 예뻤던 라리의 딸. 안타깝게도 이름을 적어오지 못했다.
ⓒ 조경국

관련사진보기


라리의 아내는 빼어난 미인이었다. 아이는 티모르 아이답게 눈이 크고 맑았다.

라리네 집 벽에는 니노 코니스 산타나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덥수룩한 수염이 체 게바라와 많이 닮았다. 라리는 코니스가 아내의 삼촌이라고 설명을 했는데, 지금까지 라리가 가족을 소개하는 것을 봐서는 진짜 삼촌이 아니라 먼 인척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라리는 코니스를 존경한다고 했지만 그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지는 못했다. 코니스는 인도네시아 점령 당시 독립운동을 했던 인물이지만 일찍 죽었다고 했다. 하지만 언제 죽었는지 라리는 모른다고 했다. 나중에 방문한 국립박물관에서 코니스의 전기를 볼 수 있었지만 인도네시아어로 쓰여 있어 내용은 알 수 없었다.

라리네는 부유한 편인 것 같았다. 거실에는 재봉틀이 있었고, 부엌 식탁 위에는 커다란 보온병이 두 개 놓여 있었다. 거실 벽에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상과 성모 사진이 여러 장 붙어 있었다.

방은 2개였는데 침대가 각각 놓여 있었다. 라리 부부 방에서 라리의 아내 것으로 보이는 하이힐 세 켤레를 보았다. 티모르에서 하이힐을 보는 건 처음이다. 정장을 빼입은 여자가 슬리퍼를 신은 것을 본 적은 있어도.

이 정도 수준이라면 동티모르에서는 중산층에 속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라리네 집 구경을 하느라고 정신을 빼고 있다가 배낭을 놓고 나왔다. 차에 타고 출발하려는 찰나 배낭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순간 배낭을 어디에 빼놓고 나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아득해졌다. 그 안에 여권과 지갑이 다 들어 있는데…. 다행히 배낭은 라리네 집에 얌전히 놓여있었다.

한적한 콤비치 해변. 동티모르에서도 많이 알려진 휴양지지만 해변에는 주민들만 가끔 보일 뿐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한적한 콤비치 해변. 동티모르에서도 많이 알려진 휴양지지만 해변에는 주민들만 가끔 보일 뿐 사람은 거의 없었다.
ⓒ 조경국

관련사진보기


뚜뚜알라를 떠난 우리는 콤비치 리조트에 들러 점심식사를 했다. 콤비치 리조트의 규모로 봐서 이 곳은 동티모르에서는 많이 알려진 휴양지인 것 같았다. 콤비치에는 예전에 항구가 있었는데 지금은 폐쇄되어 사용하지 않는다고 했다.

뚜뚜알라 해변은 아름답지만 게스트하우스 외에는 다른 시설이 없기 때문에 괜찮은 휴양지라고 말하기는 어렵겠다. 동티모르의 바다는 어디나 다 아름답기 때문에 뚜뚜알라 해변이 특별히 더 아름답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오는 길에 들른 콤비치 역시 바다는 아름다웠다.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넋 놓고 바다를 바라보았으니까. 바다는 아름답지만 폐쇄된 항구는 을씨년스러웠다. 뙤약볕 아래에서 항구의 콘크리트 구조물 위를 걸었다. 더웠다.

딜리로 돌아오는 길에 시외버스 터미널에 들렀다. 시 외곽에 자리잡은 시외버스 터미널은 사람들로 북적이긴 했는데 어디에도 버스터미널이라는 표지판은 없었다. 양철 지붕 건물 한 채가 있고 버스들이 모여들고 사람들이 모여 있으니 터미널인가 보다 하는 거지.

건물로 다가가니 콘크리트로 만든 의자에 사람들이 죽 늘어 앉아 있다. 버스시간표라도 붙어 있나, 살폈지만 아무 것도 없다. 건물 안쪽의 공간은 비어 있다.

그래도 터미널 안은 활기가 넘친다. 계속해서 도착하는 버스들과 어디론가 떠나는 버스들. 마이크로 버스와 소형 승합차, 트럭을 개조한 버스 등이 계속 들어온다. 막 떠나려는 버스 안을 들여다보니 짐으로 가득 차 있다. 박스며 자루며 꾸러미가 잔뜩이다. 사람보다 짐이 더 많다.

버스에서 갓 내린 듯한 사람 옆에 커다란 자루가 두 개, 바나나 뭉치가 두 개가 놓여 있다. 저걸 어떻게 들고 가나, 했더니 손수레가 도착한다. 손수레 임자와 운임을 흥정한다.

한쪽에도 짐을 잔뜩 앞에 놓은 여자가 있다. 짐 속에 암탉 한 마리가 있는 게 눈에 띈다. 이 아주머니도 지금 막 많은 짐과 함께 딜리에 도착한 모양이다. 이 분은 경제사정이 나은지 트럭을 불렀다. 트럭 조수가 짐칸에 짐을 싣고 나자 이 아주머니는 암탉을 끌어안고 짐칸으로 올라가려고 한다.

그러자 조수가 트럭 운전석을 가리킨다. 자리가 있으니 거기 타라는 말인가 보다. 암탉을 안고 트럭 운전석으로 올라가는 아주머니를 보니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우'리나라도 예전에는 저랬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딜리에서 다른 도시로 이동할 때는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이런 미니버스를 타야한다.
 딜리에서 다른 도시로 이동할 때는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이런 미니버스를 타야한다.
ⓒ 조경국

관련사진보기


따가운 햇빛을 피해 그늘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따가운 햇빛을 피해 그늘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 조경국

관련사진보기


터미널을 둘러보고 우리는 다시 딜리 시내로 들어갔다. 우리가 딜리를 떠나기 전에 묵었던 엘리자베스 호텔로 다시 돌아간 것이다. 호텔 로비로 들어서니 객실 청소를 담당했던 메이드가 활짝 웃으면서 반겨준다. 체크인을 다시 하는데 전에 묵었던 방을 다시 내준다.

호텔로 돌아온 것인데 마치 집으로 돌아온 것 같으니 무슨 까닭일까?

[최근 주요 기사]
☞ [서민재판 풍속도] 지금 법정에선 없는 사람들이 싸운다
☞ [현장] 군경 의문사 유가족 내쫓은 신지호 의원
☞ 내 홈피 배경음악이 불법이라고?
☞ [인터뷰] "이렇게 표적감사 티를 내나? 무릎 꿇고 사느니, 서서 죽겠다"

덧붙이는 글 | 지난 10월 5일부터 15일까지 10박 11일동안 동티모르를 여행한 이야기입니다.



태그:#동티모르, #전통의식, #콤비치, #자코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