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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뚜알라 해변에서 지는 해를 따라가는 돌고래를 봤다. 인적없는 뚜뚜알라 해변은 맑고 따뜻하고 아름다웠다.
 뚜뚜알라 해변에서 지는 해를 따라가는 돌고래를 봤다. 인적없는 뚜뚜알라 해변은 맑고 따뜻하고 아름다웠다.
ⓒ 조경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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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감는 물, 어째 이상하네...

뚜뚜알라 해변에 딱 하나 있는 게스트하우스에는 손님이 전혀 없었다. 우리가 유일한 손님이었다. 우리 일행은 티모르인 운전사 아자노와 전흥수 고문, 나 그리고 조경국 기자. 야자나무 잎으로 지붕을 만든 방갈로 세 개를 빌렸다. 하나는 내가 쓰고, 전 고문과 조 기자가 하나를 쓰고, 아자노가 하나를 쓰기로 했다.

게스트하우스는 손님용 방갈로가 4개, 식당 건물이 하나, 안채처럼 보이는 건물 세 개로 이뤄져 있었다. 전부 나무로 만들어졌다. 바닥과 기둥은 대나무로 만든 것 같다. 친환경 재료로 만들어진 집인 것이다.

그런데 이곳에는 전기가 안 들어온다네. 발전기를 돌려서 전기를 사용하는 것 같은데 방갈로에는 전기가 연결되지 않았단다. 촛불을 사용해야 한단다. 뭐, 하룻밤쯤 촛불에 의지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바닷가인데도 부는 바람은 후텁지근하다. 온 몸이 끈적거려 아무래도 씻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샤워장은 화장실을 겸하고 있다. 콘크리트로 만든 사각 물통 안에 물이 담겨 있다. 이 물통이 화장실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 화장실, 돌이켜 생각하니 다시 가고싶지 않다. 밤에 화장실에 갔다가 눈이 반짝이는 쥐와 딱 마주쳤던 것이다. 눈이 딱 마주치는 순간, 둘 다 혼비백산했다. 정말이지 반갑지 않은 손님이다. 녀석에게도 그랬겠지만.

어쨌거나 하루 종일 흘린 땀을 씻어내려고 샤워장에 가서 머리부터 감기 시작했는데, 거품이 일지 않는다. 바닷가라 센물이라서 그런가, 하면서 열심히 거품을 만들었는데 노력이 계속해서 수포로 돌아간다. 그런데, 입 안으로 어쩌다 흘러 들어간 물의 맛이 어째 찝찌름하다. 아니, 짜다. 바닷물이었던 것이다.

바닷물에 감은 머리는 머릿기름을 잔뜩 발라 엉겨붙은 것 같은 느낌을 안겨 주었다. 끈적하고 눅눅하고 무겁고, 그런 여러 가지 느낌이 한꺼번에 뒤엉켜 꿉꿉하기까지 했다. 이곳 게스트하우스에서 아까 지나왔던 공동우물까지 왕복 세 시간을 걸어서 물을 뜨러 간다고 한다. 이렇게 어렵게 떠온 물을 씻는데 사용할 수는 없겠지. 바닷물에서 해수욕은 해봤어도 그 물에 머리를 감고 샤워를 하기는 생전 처음이었다. 씻어도 씻은 것 같지 않은 느낌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잠을 자야 했다.

어쩐지 전 고문은 씻지 않더라니…. 전 고문은 이 곳에 두 번째 오는 것이었다.

고작 3개월 배우고 영어 회화가 가능하다니!

저녁식사를 주문했더니 한 시간도 넘게 기다리게 한 뒤에 밥을 준다. 참 느긋하기도 하지. 밥과 볶은 쌀국수(미골렝)와 야채스프, 닭튀김을 먹었다. 물론 우리가 주문한 메뉴다. 음식맛은 그저 그렇다.

저녁 식사를 하고, 조 기자와 나는 식당에 할 일 없이 앉아 있었다. 전기가 없으니 딱히 할 일이 없어서 조 기자가 찍은 사진을 보고 있는데 게스트하우스 주인이 와서 말을 건다.

뚜뚜알라 해변 게스트 하우스를 운영하고 있는 라리.
 뚜뚜알라 해변 게스트 하우스를 운영하고 있는 라리.
ⓒ 조경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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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은 라리라고 했다. 나이는 22살, 결혼해서 7개월 된 딸이 있다고 했다. 라리는 이 날 밤에 이야기를 나눌 때는 분명히 미혼이라고 했는데, 다음날 아침 결혼을 했다고 말을 번복했다. 의사소통이 잘못된 것인지 아니면 말을 뒤집은 것인지는 확실히 모르겠다.

라리는 티모르식으로 영어를 했다. 고르, 라는 말을 했는데 그걸 못 알아들었다. 단어를 써주는데 'corn'이다. 이들의 언어 특성상 이런 발음을 잘 못한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다른 사람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대화는 조경국 기자와 라리가 했다. 나는 곁에서 두 사람이 대화하는 것을 구경했다.

라리가 게스트하우스 주인인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란다. 게스트 하우스는 라리네 가족 소유라고 했다. 그런데 그 가족이라는 개념이 패밀리가 아니라 커뮤니티란다. 일종의 공동체인 셈이다.

라리네 패밀리 구성원은 전부 67명, 17세 이상의 성인들만 센 숫자다. 이들은 뚜뚜알라에서 일부는 옥수수 농사를 짓고, 일부는 쌀농사를 짓는다. 게스트하우스도 이들 패밀리가 운영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어쩐지,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했을 때는 사람들이 별로 많지 않았는데 날이 점점 어두워지자 사람들이 계속해서 늘어났다. 어딘가에 갔다가 돌아오는 사람들인 것 같았다. '그래서 가족이 참 많구나' 했던 것이다.

라리의 설명에 의하면 게스트하우스 수입의 25%는 환경보호에 사용하고 나머지는 석 달에 한 번씩 똑같이 나누어 갖는단다. 전체 회의를 통해서 결정할 것은 결정하고. 라리는 회의하는 모습이 담긴 사진도 보여주었다.

라리가 영어를 배웠던 말레이시아 NGO 단체가 운영하는 '사이언스 오브 라이프 시스템' 교실 풍경.
 라리가 영어를 배웠던 말레이시아 NGO 단체가 운영하는 '사이언스 오브 라이프 시스템' 교실 풍경.
ⓒ 조경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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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 오브 라이프 시스템' NGO 학교에서 한창 영어 수업이 진행 중이다.
 '사이언스 오브 라이프 시스템' NGO 학교에서 한창 영어 수업이 진행 중이다.
ⓒ 조경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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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없어서 고등학교를 중퇴했다는 라리가 영어를 할 수 있는 게 궁금했다. 어, 그런데 세상은 참으로 좁다. 전날, 조 기자와 나는 오후에 딜리 시내를 돌아다녔다. 시내버스도 타보고, 가전제품 상가가 밀집한 콜메라에도 가고, 전통공예품을 파는 곳에도 갔다. 그러다가 우연히 들른 곳이 '사이언스 오브 라이프 시스템'(Science of Life System)이라는 시민단체가 운영하는 일종의 시민학교였다. 이 시민단체는 말레이시아 NGO라고 했다.

나무로 얼기설기 지은 가건물은 여러 개의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었고, 수업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무엇을 하는 곳인지 궁금해서 무작정 안으로 들어갔고, 책임자인 싱씨를 만나 그의 안내를 받으면서 학교를 살펴볼 수 있었다.

이 학교는 겉으로 보기에는 허술하기 짝이 없었지만 학생 수는 1800여 명에 이른다고 했다. 나무로 만든 가건물 기숙사에는 200여 명이 살고 있었다. 주로 먼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머문다고 했다. 이곳에서는 식사도 할 수 있었는데 교육비와 기숙사비는 무료지만 밥값은 내야 한다고. 한 달에 12달러 50센트.

교사들은 전부 자원봉사자라고 했다. 한국인도 한 명 자원봉사를 하다가 얼마 전에 귀국했단다. 일본인 자원봉사자와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이곳에서는 컴퓨터 100대를 갖추고 컴퓨터 교육도 하고 있었다.

딜리에서 차를 타고 8시간은 달려야 갈 수 있는 곳에 사는 라리가 바로 이곳에서 영어를 배웠단다. 그것도 고작 3개월간. 하루에 세 시간씩 공부를 했고, 토요일에는 세미나를 통해서 영어실력을 쌓았다고 했다. 겨우 그 정도 하고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니, 놀랍다.

별다른 생각 없이 둘러보았던 '사이언스 오브 라이프 시스템'이 라리를 통해서 새롭게 다가왔다. 배운 것을 실생활에서 활용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의미가 있는 게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라리의 패밀리는 게스트 하우스를 운영하기 위해 라리를 딜리로 보내 영어를 배우게 했다고 한다. 이들도 미래에 대한 투자를 하고 계획을 세우면서 살고 있는 것이다.

매트리스 주변에 뭔가 스멀거리는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라리(사진 맨 오른쪽)의 가족들. 가족들끼리 모여 농사를 짓고 게스트 하우스를 운영하고 있다.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라리(사진 맨 오른쪽)의 가족들. 가족들끼리 모여 농사를 짓고 게스트 하우스를 운영하고 있다.
ⓒ 조경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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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리에게 상록수 부대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태권도를 가르쳐주기도 했고 여러 가지 자원봉사도 했는데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영화 상영이라고 했다. 동티모르에는 영화관이 하나도 없다. 수도인 딜리에도 없으니 다른 곳은 더 거론할 여지가 없다. 그런데 상록수 부대에서 영화를 보여줬단다. 미국 영화를 비롯해 한국 영화도. 라리는 본 영화 중에 <델타포스>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나.

라리와 한참 이야기를 나누는데 안채 쪽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온다. 가족끼리 고함을 지르며 싸우는 것 같다. 무슨 일이냐고 묻자 큰아버지가 문제란다. 큰아버지가 성격이 이상해서 가족들이 전부 다 싫어한단다. 그러면서 다음 날 아침에 전통의식(Traditional ceremony)을 할 예정이라고 덧붙인다.

갑자기 귀가 솔깃해진다. 어떤 형태든 티모르의 전통의식을 볼 수 있다면 그 기회를 놓칠 수 없지 않나. 이른 아침에 가족의 화합을 위한 전통의식을 치를 예정이라면서 볼 수 있으면 보란다. 그런데, 우리는 다음 날 아침에 배를 빌려서 아름답다는 자코섬을 한 바퀴 돌 예정이었다. 어쩐다….

뚜뚜알라 해변과 자코섬은 니노 코니스 산타나 국립공원(Nino Konis Santana National Park)에 속해있다고 했다. 니노 코니스 산타나가 사람이름이란다. 동티모르의 체 게바라 정도 되는 인물이라나. 얼굴이 체를 많이 닮았단다. 라리는 코니스의 사진을 보여주겠다면서 사진을 잔뜩 들고 왔다. 그 안에 코니스의 사진이 있다나. 하지만 코니스의 사진은 찾지 못했다.

11시가 넘어서 자러 갔다. 라리는 친절하게 내가 묵을 방갈로까지 와서 촛불을 켜주고 갔다. 어둠이 무척이나 깊은 밤이었다. 파도가 철썩이는 소리가 들려왔고, 간간이 개가 짖었다. 천정에 매달린 모기장을 치고 촛불을 끄고 누웠다. 하얀색 시트를 깐 매트리스는 너무 푹신해서 눕자 파묻힐 지경이었다.

그런데, 바닷가인데 바람 한 점 불어오지 않는다. 방갈로는 위가 툭 터져 시원할 것 같은데 눅눅하기만 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눅눅하고 끈적거리는 느낌은 점점 더 심해진다. 갑자기 어디선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매트리스 주변에 뭔가 살아있는 생물이 움직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혹시, 쥐?

벌떡 일어나 랜턴을 밝혔다. 안 보인다. 다시 눕는다. 온 몸의 신경이 곤두서는 것 같은 느낌이다. 뭔가 팔 있는 곳에서 스멀거리는 것 같다. 소름이 오싹 끼친다. 벌떡 일어나 랜턴을 들이대니, 발이 여러 개 달린 벌레다. 손으로 냅다 쳐서 매트리스 밖으로 던져낸다. 이래서야 잠이나 잘 수 있겠나.

결국 이 날 나는 밤새도록 눅눅한 더위에 시달리면서 자다가 깨다가를 반복했다. 잔 것도 아니고 안 잔 것도 아닌 것 같은 상태라고나 할까. 이 곳의 더위에 비하면 열대야는 충분히 견딜 만한 것이라는 게 내 결론이다.

모기장과 침대가 전부인 손님용 방갈로 내부.
 모기장과 침대가 전부인 손님용 방갈로 내부.
ⓒ 조경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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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지난 10월 5일부터 15일까지 10박 11일동안 동티모르를 여행한 이야기입니다.



태그:#동티모르, #뚜뚜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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