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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 차창 밖으로 쿠바의 전경이 빠르게 지나간다. 비스킷을 한입 베어 물고는 좌석시트를 밀어젖혀 무거운 머리를 내맡겼다. 두 시간 정도 눈을 붙이고 나면 한결 가벼워질 거란 기대에서다. 뿌연 물보라가 창문을 훑고 지나가면 남은 자리엔 불투명한 풍경이 왜곡되게 비친다.
 
창문을 통해 맞은편 옆 좌석에 따로 앉아있는 J의 실루엣이 보인다. 녀석도 상념에 젖어있다. 지금쯤 어떤 생각이 들까? 괜히 따라나섰다는 후회? 아니면 이왕지사 이리 된 거 끝까지 해보겠다는 결연한 의지? 엔진 소리가 일정한 파동을 만들어 내고 피곤함은 자연스레 그 소음에 빨려 들어간다. 곧이어 화면이 닫힌다.

 

J에게 휴식을 주기 위해 온 트리니다드이니만큼 자전거는 살짝 제쳐두고 최대한 여유롭게 지내기로 했다. 트리니다드에 도착해서도 비는 계속 세차게 퍼붓고 있었다. 빗속에  짐을 꺼낸 직원에게 1CUC를 팁으로 주었더니 상당히 만족해한다.

 

민박집 아줌마의 표적이 되다

 

어떻게 알고 왔는지 터미널에서 만난 한 아주머니가 두 명 분으로 20CUC(한화 약 2만4000원)에 아침밥까지 준다고 숙박 알선을 해왔다. 마치 그 집이 트리니다드에서 정말 괜찮은 곳이라는 듯 열심히 광고하는 것을 그냥 "알았다"고 대답하고 돌려보냈다. 아직 이른 오후이고 트리니다드 적응차 천천히 한 바퀴 둘러보고 결정해도 늦지 않을 것이었다. 더구나 관광지역이다보니 여기저기 숙박을 소개하는 사람들도 퍽 많았다. 이런 조건이니 여유가 넘칠 수밖에.

 

비가 거침없이 쏟아져내렸다. 다른 여행자들은 배낭만 짊어지고 가면 됐기에 이미 다 떠난 상태지만 우리는 자전거 때문에 터미널 사무실에서 비가 그치기만을 기다렸다. 너른 터미널 주차장에 사무실 직원과 우리만 덩그러니 남겨졌다.
 
그 때 또다른 민박집 아주머니가 접근해 왔다. 우리를 표적삼아 온 것이다. 얘기를 나누고 보니 방금 전 왔다간 아주머니가 소개한 그 집이었다. 그리고 먼저 우리에게 접근한 아주머니는 우리를 그 집에 소개해 주고 수수료를 챙기는 중개자였다.

 

"두 명이서 20CUC에 아침까지 차려 준대요."

 

대화를 하던 J가 내 의중을 살펴보았지만 내 대답은 일단 '노(No)'였다.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판단의 번복이 아닌, 단지 조금 더 완곡하게 거절하는 방법을 찾고 있을 뿐이었다. 일단 명함만 받아들고 한 바퀴 둘러본 다음에 긍정적으로 결정하겠노라고 J를 통해 전달했다.

 

하지만 이런 여행자를 수도 없이 겪어본 아주머니도 순순히 물러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우리의 원론적인 입장이 못미더웠던 것일까? 상냥하게 웃는 가운데서도 답을 재촉했다. 살짝 부담이 더 가중된 가운데 아주머니는 첫 번째 떡밥을 던졌다.

 

"그럼 15CUC에 방을 내주고 아침도 줄 테니 우리집으로 지금 가요. 일단 짐부터 풀고 나서 구경해야죠."

"아주머니, 음, 저희 중요한 메일받을 게 있어서 인터넷 먼저 하고요. 그리고 도시를 둘러본 다음에 결정할게요. 아주머니 집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도록 하겠습니다."

 

가격을 깎는다거나 조금 더 좋은 조건으로 수정해 보려는 마음은 그다지 없었다. 15CUC에 아침을 차려준다는 건 지극히 평범한 서비스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관광지임을 감안하면 나쁠 건 없었다. 다만, 아무것도 모른 채 덜컥 계약을 해 버리는 게 찝찝했던 것이다.

 

그래서 여유를 갖고자 했다. 그런데 우리의 여유로움과 달리 아주머니는 마음이 초조해졌는지 급기야는 하룻밤 숙박에 10CUC를 불렀다. 숫자에 민감한 내 귀가 번쩍 틔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내일 아침식사 뿐만 아니라 오늘 저녁까지도 챙겨줄게요."

 

두 번째 강력한 떡밥을 투하한 아주머니의 회심의 미소에 마음이 급격히 흔들렸다. 저렴한 가격과 가격 대비 최고의 서비스. 이렇게까지 부탁하는데 모른 척 하기도 미안했다. 우선 그 아주머니의 명함을 다시 주의깊게 살펴보고는 나중에 꼭 찾아가기로 약속했다. J의 스페인어 실력 덕분에 숙소를 잡는 것이 어렵지않다는 것은 여행의 큰 짐을 더는 것이었다.

 

앗, 숙소에 도착하니까 말이 달라지잖아?!

 

우리는 가장 먼저 도시의 중심인 빠르께(Parque)에 들렀다. 그리고 각자 받은 메일을 체크하기 위해 인터넷을 접속하려고 하는데 한국어 지원이 되지 않았다. 더구나 개인 노트북도 원칙적으로 접속이 불가하단다.

 

프로그램을 함부로 만질 수 없기 때문에 한국어를 다운 받을 수도 없거니와 설령 허락을 받고 다운받는다 해도 걸리는 시간을 고려하면 시간당 7불인 비용이 부담스러웠다. 할 수 없이 인터넷 사용을 포기하고 여행 기간 중 완전히 매료된 쿠바 피자로 늦은 점심을 해결했다.

 

5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트리니다드는 고풍스런 자취와 맞지 않게 18세기 후반까지 후미진 밀수업자들의 은신처였다. 그 뒤 아이티의 노예 폭동으로 프랑스 농장주들이 트리니다드로 도망 오고 이곳에 그들의 작은 제국을 재건설하면서부터 지금의 모습이 갖춰졌다.

 

그 독특한 콜로니얼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외국인들과 외국문화를 빨리 접하면서 자유주의의 자본 맛을 알아가고 있었다. 한 블록 길을 걸으려면 숙박할지 묻는 질문에 답을 내놓아야 한다.

 

여러 사람이 숙소를 찾느냐고 물어왔지만 그 때마다 웃으며 고개를 가로젓고는 처음 만난 아주머니 집으로 조금씩 거리를 좁혀갔다. 사실 가격이나 서비스가 다들 비슷한 까닭에 대충 아무 곳이나 숙소를 잡아도 크게 상관없었다. 하지만 약속은 중요하다. 그리고 서비스 내용을 살짝 기대한 것도 사실이었다.

 

마침내 예정된 집에 다다랐을 때 아주머니는 마치 귀한 손님이 찾아온 듯 멀리서부터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숙소의 외부 상태가 썩 좋지 않았다. 그래도 내부는 괜찮겠거니 여기고, 아까 확인받았던 조건을 다시 한 번 J를 통해 확인시켰다. 그랬더니 이야기를 나누던 J 표정이 굳어진다. 아주머니 억양도 낯설 정도로 딱딱해져 있었다.

 

"오늘 저녁, 내일 아침식사까지 해서 두 명이 10CUC라고 하셨잖아요?"

"내가 언제? 두 명이서 20CUC야. 아니, 10CUC를 받아서 수지나 맞겠어?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여기 근방에 그렇게 재워주는 곳은 하나도 없어!"

 

금세 말이 바뀌었다. 스페인어를 잘 하는 J가 이를 놓칠 리 없었다. 나 역시 다른 건 몰라도 가격에 관한 것은 확실하게 들었던 부분인데 뭔가 잘못된 것이 분명했다. 그럼 15CUC라도 아주머니를 봐서 머물기로 했다. 이미 지나온 길에 그 가격을 계속 뿌리쳐 왔었다. 하지만 무슨 심보인지 아주머니는 좀체 가격을 내리려 하지 않았다.

 

너무 황당했지만 아주머니 태도는 반대로 당당했다. 말 바꾸기야 중남미에서 어제 오늘 일이냐 만은 그럼에도 아쉬운 표정 없이 '갈 테면 가라'는 식이 참 고약했다.

 

도대체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나라에서 허가를 받고 게스트 하우스를 운영하면 일정금액을 세금으로 납부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를 꼭 재워야 할 텐데 15CUC에도 타협하지 않겠다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그만 철수하기로 했다. 그런데 그 때서야 아주머니는 15CUC로 흥정을 다시 하는 것이다.

 

'오호, 숙박비 가지고 장난치시겠다?'

 

하지만 신뢰가 바닥을 치는 그 집에서 더이상 머물 이유가 없었다. 우리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멍한 표정으로 서로 바라보다 동네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수소문 끝에 도시 언덕 쪽에 자리잡은 숙소를 택해 머물기로 했다. 굉장히 깨끗한 침실을 배정받은 데다 주인 아주머니가 너무나 친절한 것이 마음에 꼭 들었다. 물론 같은 가격이다.

 

쿠바의 장점은 다른 라틴 아메리카에 비해 사람들이 비교적 정직하다는 데 있다. 그런데 오늘 제대로 한 방 먹었다. 여기가 무슨 서울 아파트값도 아니고, 말 한 마디에 들쑥날쑥 방값이 널뛰기를 하니. 나와 1:1로 그랬다면 누구 잘잘못이든 간에 우선 내 언어능력을 탓하겠지만 스페인어가 막힘없이 되는 J를 전면에 내세웠는데도 그렇게 나온다는 건 납득하기 어려운 장면이었다.

 

아직도 궁금하다. 왜 그랬을까? 아쉬웠다. 아주머니가 사정을 설명하고 조금만 더 배려해 줬더라면 그깟 몇천원 비용은 그리 문제될 게 없었는데 말이다.

 

'쿠바에서 더 좋은 사람 만나 더 좋은 기억을 갖게 하려는 하늘의 뜻', 이것 말고 다른 이유를 찾기가 어려웠다. 왜냐하면 이 집에서 숙박하게 되면서 이날 밤 우리는 쿠바 여정 중 최고의 장면을 목도하게 됐기 때문이다. 모든 일은 순리대로 흐른다.

덧붙이는 글 |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 http://www.vision-trip.net


태그:#쿠바, #세계일주, #자전거여행, #체게바라, #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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