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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에는 민주화 이후 오히려 담론이 사라졌다는 말이 있습니다. 진지하게 논의돼야 할 이슈들이 산적해 있는데도, 아예 쟁점으로 떠오르지 않거나 간혹 논쟁이 벌어지더라도
갈등만 증폭되는 현상도 보입니다. 담론의 복원을 위해 어느 때보다 건전하고 창의적인 언론활동이 요청되는 시기입니다.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은 매체창업 또는 칼럼과 프로그램 제작을 통해 우리사회의 건전한 담론형성과 의사소통에 크게 기여해온 분들이 진행하는 '저널리즘 특강'을 마련했습니다. 강의를 들은 저널리즘스쿨 학생들이 쓴 기사를 이번 학기에는 <오마이뉴스>에 연재합니다. 안수찬 <한겨레> 기자 강의는 지난 5월 30일 오후 3시 세명대 서초동 강의실에서 진행했습니다.<기자 주>

예비 언론인들에게 내러티브 저널리즘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 강의중인 안수찬 기자 예비 언론인들에게 내러티브 저널리즘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 이해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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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들이 신문을 떠나고 있다. 구독률이 1996년 69.3%에서 2006년에는 40.0%로 10년간 약 29% 하락했다. 인터넷이 대중화되면서 주요 포털사이트와 각 신문사 홈페이지를 통해 쉽고 빠르게 뉴스를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떠나는 독자들을 붙잡기 위해 신문이 변해야 한다고 말하는 기자가 있다. <한겨레신문>의 안수찬 기자다.

안 기자는 신문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기사 장르, 그 자체를 혁신하라’고 말한다. 오늘날 한국 신문 기사의 지배적 장르인 ‘스트레이트’ 스타일을 넘어 새로운 장르인 ‘내러티브’ 스타일로 옮겨가자고 제안한다.

왜 논픽션 내러티브 저널리즘인가?

그에 따르면 현재 한국 신문의 90%는 스트레이트 기사다. 스트레이트는 사실 만을 압축적으로 전달하는 글쓰기 방식으로, 지금까지 가장 객관적인 보도 형태로 인식돼 왔다. 그러나 스트레이트 기사는 한편으로 복잡한 사회 현상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늘 있어왔다. 그래서 보다 심층적인 정보를 원하는 요즘 독자들의 수요를 충족시켜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기자의 관점에서 보면, 스트레이트는 매우 정형적인 틀에 맞출 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창의적 재능을 발휘하기 어려운 장르이기도 하다. 이는 곧 스트레이트가 기자들의 자기계발 동기를 부여하는 힘이 약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안 기자는 “한국 신문이 스트레이트 기사를 계속 고집하면, 결국은 독자로부터 멀어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안수찬 기자는 스트레이트 기사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논픽션 내러티브 저널리즘’을 제시한다. 논픽션 내러티브 저널리즘, 즉 이야기 기사는 현재 저널리즘을 장악하고 있는 정교한 ‘스트레이트’체가 효과적인가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된 새로운 패턴의 글쓰기다.

독자에게 흥미를 불러일으키고, 사건의 진실을 심층적으로 전달함과 동시에 기자 개인의 창의적 재능까지 끌어 올릴 수 있는 새로운 기사체 모델이 바로 이야기 기사다.

이야기 기사란 이런 것

이야기 기사는 미국에서 많이 채택하고 있다. 미국 언론의 신문 구독자 조사 결과 대중들이 스트레이트 기사보다 이야기 기사에 더 주목한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기자들은 이야기 기사에 집중하게 됐다. 이야기 기사는 피처 스토리에서 더 확대된 장르다. 피처스토리가 개인의 일을 사회와 결부 시킨 기사라면 이야기기사는 보다 복잡한 사회 현상을 소설처럼 다룬다.

내러티브 이야기 기사는 네 가지 큰 특징을 갖는다.

첫째, 사건이 아니라 인물에 주목한다. 세계는 사건이 아니라 인물의 총체이며 인물을 통해 사건을 더욱 잘 설명할 수 있기에 인물로 사건과 사회현상을 끄집어 낼 수 있다.

둘째, 설명보다는 묘사를 통해 상황을 그대로 재현한다. 독자는 설명이 아닌 재현된 상황을 통해 객관적인 입장으로 사건에 접근한다.

셋째, 소설같은 플롯 구조로 갈등의 탄생부터 절정과 해소에 이르는 과정 전부를 드러낸다. 사건은 ‘어느날 갑자기’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읽는 기사가 아니라 보는 기사를 구현한다. 문자를 읽어 정보를 취득하게 하는 저널리즘의 전통적인 전략을 거부하고 픽션의 편집 기법을 차용한다.

안수찬 기자는 자신이 가장 으뜸으로 친다는 이야기 기사를 한편을 소개했다. 

몇 년 전, 쿠바 관타나모 기지에서 알 카에다 포로들을 상담했던 ‘제임스 이’라는 미군 이슬람 목사가 간첩활동을 한 혐의로 고발된 사건이 미국 <워싱턴타임스>에 특종 보도된다. 과거 제임스 이를 취재한 적이 있던 <시애틀타임스>의 리베라 기자는 이 사건에 의심을 품고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한다. 1년 6개월동안 이 사건을 심층 취재한 리베라는 총 10편의 이야기 기사를 연재한다. 기사는 각 편마다 이 사건에 얽혀 있는 각기 다른 이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모든 이의 입장을 대변한다. 이렇게 탄생한 ‘제임스 이 스토리’는 독자들의 공감을 이끌어내기에 충분했다.

낯익고 낯선, 기자의 작가주의

이러한 이야기 기사는 기사 사회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기자의 일생을 살펴보자. 수습부터 4년까지 노동을 숙련한다. 적당히 숙련된 5년차 기자는 자신의 경로를 모색하고 9년차부터 치열한 승진 경쟁을 한다. 15년차쯤 되면 데스크에 있거나 이름을 날리는 전문기자가 되거나 이도저도 아닌 땜질기자로 버티다가 21년차가 넘어가면서 은퇴 압력에 시달린다.

스트레이트 기사가 주를 이루는 한국 신문의 특성상, 기자들은 왜 전문성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한 동기를 부여받지 못했고, 자기 계발에 소홀했다. 하지만 이야기 기사라는 새로운 장르는 현장의 작은 모티브에서 출발해 깊이 있는 사회 문제를 다루기 때문에 기자들의 현장감각과 글쓰기 능력이 강하게 요구된다. 이야기 기사는 기자의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다.

안수찬 기자는 기존 기사체가 가진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기사 쓰기의 길을 안내한다.
 안수찬 기자는 기존 기사체가 가진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기사 쓰기의 길을 안내한다.
ⓒ 이해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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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장과  보도국장이 되는 것은 7년을 인내하여 고작 7주를 우는 매미의 여름과 같다. 이것을 견뎌낼지라도 ‘내가 지금 뭘 하고 있지?’라고 고민하는 것이 지금 현업 언론인들의 번뇌이다.

가장 절실한 것은 매일 매일의 노동에서 가치와 재미를 함께 일구려는 기자들의 욕망을 해결하는 것이다. 이를 위한 내러티브 저널리즘은 좋은 조건이 된다. 이는 기자 개인의 ‘작가주의’적인 지향을 긍정적 에너지로 수용한다.

“낯익은 것의 실체는 이야기입니다. 낯선 것의 실체는 그 이야기를 기사에 녹이는 일이지요”

이미 익숙한 이야기를 기사에 녹여 새롭게 창작되는 것, 낯익지만 낯선 글을 지향하는 것, 이것이 바로 내러티브 이야기 기사이며, 기자의 욕망을 이야기 기사로 풀어내는 것이 기자의 작가주의다.

기자여! 글쟁이가 되라

1997년 한겨레신문사에 입사 후, 약 10년 6개월을 기자로 생활한 안수찬 기자는 얼마 전 한겨레 창간 20돌을 맞아 ‘한겨레 20년사’를 정리한 <희망으로 가는 길>을 써내고 다시 본업으로 돌아왔다. 그는 10여 년간 사회부, 체육부, 여론매체부, 문화부를 두루 거친 자신의 약력을 간단히 소개 한 후, “‘어느 신문사에서 어느 부서를 거쳤나’는 기자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기자는 ’무슨 기사를 어떻게 썼느냐’로 인정받는 게 옳다”고 말했다. 영화감독이 ‘필모그라피(filmography)’로 인정되듯이 기자들도 글을 통한 ‘저널-그라피(journal-graphy)’로 인식 될 수 있도록 언론계가 변화해야 한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는 기자를 오롯이 글쓰는 직업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소설을 잘 쓴다고 기사를 잘 쓰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기사를 잘 쓴다고 소설과 논문을 잘 쓴다는 보장 또한 없겠죠. 하지만 20년 후에 위태로운 땜질기자가 되지 않기 위해 글쓰기 능력은 필수입니다.”

안수찬 기자는 마지막까지 글쓰기 능력을 강조했다.

“언론인은 당대의 대중과 깊이 있게 소통하려는 욕망이 있어야 합니다. 독자와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서는 모든 장르의 글쓰기에 익숙하고 모든 장르를 장악하려는 욕심이 있어야 하겠죠. 10년차 기자인 제가 그렇고, 예비 언론인이 여러분이 그래야 할 것입니다.”

언론의 글쟁이가 되는 것, 이것이 지금 한국의 기자들과 예비기자들이 가장 먼저 욕심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강연을 마치고 서둘러 나가는 안수찬 기자를 붙잡았다. “기자님! 기자님의 이야기 기사는 언제쯤 만날 수 있을까요?” “지금 준비 중인데 6개월 후쯤에는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는 수줍게 답한 후 총총걸음으로 강연장을 빠져 나갔다. 안수찬 기자가 세상에 내놓을 한국형 이야기 기사는 어떤 모습일까? 낯익지만 낯설 그의 기사가 몹시 기다려진다.


태그:#저널리즘 스쿨, #안수찬, #내러티브 저널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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