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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중사진촬영대회 장소는 서귀포 앞 바다였다. 우리는 서귀포 항구 옆에 있는 숙소에 짐을 풀었다. 전국의 '찍사'(수중사진 찍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동안 다이빙 포인트에서 간간이 보았던 찍사들은 다이빙 가방 옆에 그보다 더 멋지고  육중한, 하드케이스로 만든 카메라 가방을 들고 있었다. 카메라 가방에는 각종 다이빙 관련 업체들의 스티커가 붙어 있었고, 몇몇 가방에는 해외다이빙을 증거하는 항공화물 태그가 그대로 붙어 있었다. 해외여행도 자랑이던 시절이었다.

 

P와 나는 다이빙가방 하나를 달랑 맨 단출한 모습으로 이들 무리에 합류했다. 육상 사진을 찍을 때도 나는 그 많은 사진 공모전에 한 번도 출품하지 않았었다. 공모전 자체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진을 찍는 것은 단지 내 인생을 위한 취미일 뿐이라고 정의해 놓았기 때문이다. 나는 교만한 독립군이었던 것이다. 물론 경쟁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냐는 물음에 부정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런데 나는 오늘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이 대회에 출전하게 되었다. 그것도 내 개인화기도 없이, 이것은 대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장비를 숙소에 풀어놓고 P와 나는 항구로 내려갔다. 여기는 서귀포, 다이빙의 고장이다. 연산호의 세계적인 군락지요, 한국인들이 그리워하고 존경하는 남쪽나라다. 우리는 그 바닷바람을 쏘이며 항구를 돌아봤다.

 

"니는 카메라 안 할래?"

P를 보고 내가 물었다. P는 슬쩍 미소를 지었다. 내 물귀신 작전의 의도를 알아차린 것이었다.

 

"니 하는 데 내까지 하믄 되겠나?"
"와?"
"나는 모델 해야 될 꺼 아이가, 임마."


그는 슬쩍 내 말을 비켜나갔다. 그는 감정에 휩쓸려 칠락팔락 하는 나완 달랐다. 그는 속으로 카메라 값을 계산하고, 기종을 비교하며, 자신이 진정으로 카메라를 원하고 있는지를 자문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아니꼬운 마음에 혀를 찼다.

 

"쳇!"

 

그러나 그는 모델도 얼마 못하고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다.

 

저녁에는 세미나가 있었다. 미국과 일본에서 온 수중사진가의 발표도 있었다. 나는 귀를 쫑긋 세우고 들었으나 내가 육상에서 경험했거나 혹은 책에서 읽은 원론적인 이야기라서 흥미롭진 않았다. 우리가 참가한 이 대회만 하더라도 사진 기술로 우열을 가리는 대회는 아니었다. 사진도 하나의 창작이었고 이는 순전히 개인의 능력에 달린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저녁을 먹기 위해 일행들이 모였다. 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수중사진 클럽을 만들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거기 있었던 모든 사람들이 건성으로 찬성을 했다.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고 거기에 꼭 참여하고 싶다는 생각도 없었다. 그러나 곧 전광석화와 같이 발기인 대회가 열렸다. 이는 몇몇이 주동해 사전에 여러 가지 작업을 해놓았기 때문에 얻은 결과였다.


"수중사진클럽을 만들면 존나?"

 

나는 육상사진클럽에서 활동을 하며 전시회도 몇 번 해 봤다는 사람에게 물었다.

 

"아무래도 도움이 되지요. 다이빙 함 간다 캐도 돈 도 적기(적게) 들고, 특히 전시회는 혼자선 몬 합니더. 모이면 서로 알고 있는 기술도 가르쳐 주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도랑치고 가재 잡는 거지 뭐."

 

 

촬영대회가 시작됐다. 선수들은 협회 측에서 내어준 세 통의 포지티브 필름의 첫 장에 자신의 얼굴을 박아 넣었다. 협회 측에서 기념품으로 돌린 대회로고가 박힌 흰 티셔츠를 입은 선수들은 자신에게 배정 된 배를 타고 자신이 결정한 장소로 이동해서 금·은·동을 건지러 물 속으로 들어갔다.

 

우리 팀은 처음 참가하는 사람들을 위해 문섬의 새끼섬을 한 바퀴 도는 행사를 가졌다. 어디에 어떤 고기가 있는지도, 조류와 지형이 어떤지를 모르고는 사실상 촬영은 공염불이었기 때문이었다. 테스트 다이빙이 시작됐다.

 

모두 물로 뛰어들고 대오를 정비한 후 S가 앞장을 섰다. 곧 그의 여자 허리통만한 허벅지가 물살을 가르기 시작했다. S도 P와 우열을 가릴 수 없을 만큼 체격이 좋았다. 새끼섬을 왼쪽어깨에다 붙이고 섬을 한 바퀴 돌기로 한 것이다. 수로를 벗어나 섬 바깥쪽으로 나가서 수심 20m를 유지하며 앞으로 나갔다. 그러나 우리는 곧 조류에 막혀 버렸다. 도저히 헤쳐 나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숨이 턱으로 차올랐다. '나 혼자라도 돌아가야 하는가'라는 갈등의 순간, S가 발길을 돌렸다.

 

"카메라까지 기지고 들어갔다면 큰일 날 뻔 했잖아."
"조류와 맞서지는 마이소, 바보 같은 짓입니다."

 

두 번째, 우리는 반대편 코스를 택했다. 니코노스 V에 28mm 렌즈를 장착한 카메라를 들고 P와 함께 들어간 나는 정작 카메라를 들이댈 곳을 찾지 못해 애를 먹었다. S의 말마따나 P의 키 183cm를 28mm 렌즈에 구겨 넣긴 아무래도 힘들었다. 내가 구상한 구도로는 아무래도 사진이 힘들었던 것이다. 할 수 없이 나는 남들이 무엇을 찍나 유심히 관찰하다가 그 흉내를 내는 수밖에 없었다.

 

촬영대회는 내게 또 다른 물의 속성을 알게 해주었다. 수중카메라가 내게 한 발짝 앞으로 성큼 다가서는 계기가 되었다. 내가 알지 못했고 내가 관심을 두지 않았던 세계가 현실적으로 와 닿는 순간이었다. 바다는 그 온갖 것들을 포용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준 것이었다.

 

 

"바다가 왜 바다인 줄 아능교?"
"글쎄?"
"바다는 모든 것을 다 바다(받아)들인다고 바답니더."


그러면서 사부인 S는 이렇게 덧붙었다. '바다에 이 세상 모든 물(혼탁한 물, 맑은 물, 찬물, 더운물)들이 모이는 이유는 바다가 가장 낮기 때문에 그렇다'는 뻔한 소리를 하면서 '우리도 물로 들어갈 때는 낮은 모습을 보여야 하며 자세를 낮추면 사람이 모인다'는 다소 차원 높은 이야기도 곁들였다.

 

대회가 끝나고 한 달쯤 흘렀나? S의 다이빙 숍에 들른 내게 S는 촬영대회 입상소식을 알려줬다.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울러 그는 곧 수중사진클럽의 발기인 대회가 있다면서, 클럽이 왜 필요한가를 조목조목 역설하고 나서 내게 거기에 출석할 것을 명령했다.


"카메라도 없는데?"

S는 코웃음을 치더니 캐비닛에서 카메라 한 대를 꺼내 내 앞에 놓았다. 그러면서 그는 "공짜 아니고 외상"이라면서 돈이 되는 즉시로 갚으라고 주문했다.

 

산다는 것이 무엇을 한다는 것이고, 다이빙을 한다는 것도 다이빙 외에 무엇을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꼭 신체를 사용해서 무엇을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이날 이후 나는 많은 갈등에 시달렸다. 내가 당시에 산 렌즈는 35mm 뿐이었다. 이는 수중에선 육상의 55mm와 같은 표준렌즈였다. 동해안에서 이 렌즈를 사용해서 내가 바라는 사진을 찍기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도무지 카메라에 들이댈 주제를 찾기도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카메라 매뉴얼 북 하나 없는 형편이었기 때문이었다.

 

쓰레기통에 인화한 사진들이 쌓여 갈수록 내 고민도 깊어졌다. 갈 길은 먼데 나는 답보 상태를 면하지 못하고 있었다. 바다에 떨어져 고개를 박으면 시야가 나를 거부했고 창을 잡으면 창이 나를 밀어냈다. 창과 카메라 사이에서 갈등하는 나날이 많아졌다. 나는 새로운 정보와 기술에도 목말랐다. 클럽이 돌파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 다음편에 계속됩니다. 


태그:#물속이야기, #장호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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