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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무십자가를 등에 짊어지고 체험하는 순례객
ⓒ 이승철
예루살렘성의 사자문으로 들어간 우리 일행들이 첫 번째로 들른 곳은 성 안나 교회와 베데스다 연못이었다. 그곳을 나와 다시 비좁은 골목길을 걸어 1백여 미터쯤 들어간 곳에서 다시 오른쪽의 좁은 골목길을 거쳐 들어간 곳은 빌라도의 법정이었다.

이 빌라도의 법정은 예수가 로마총독 빌라도에 의하여 사형선고를 받은 바로 그곳이었다. 예수는 당시 상류계층이었으며 그를 시기하고 미워하던 제사장들에 의하여 이 법정에 기소되었다. 그리고 그가 이 세상의 왕이 되어 세상을 뒤집어 놓기를 열망하다가 실망한 유대인 군중들에 의하여 당시로서도 가장 참혹한 형벌인 십자가에 달리는 형벌을 당하게 되었다.

빌라도의 법정으로 쓰였던 건물은 주변이 온통 고색창연한 석재 건축물들이었다. 윗부분이 둥그런 모양의 출입문을 들어서자 내부에는 법정의 간단한 배치와 함께 가시관을 쓰고 서 있는 예수의 참혹한 형상이 세워져 있었다.

그곳을 나오면 바로 옆에 채찍질교회가 자리 잡고 있다. 이 채찍질 교회 안에도 역시 십자가를 짊어진 예수의 그림과 가시관을 쓴 성화가 벽면을 장식하고 있어서 끔찍한 풍경이다. 또 다른 벽면에는 십자가를 짊어진 예수에게 채찍을 휘두르는 로마병사의 그림도 그려져 있었다.

"어떻게 저런 모습으로 십자가를 짊어지고 거리를 걸었을까? 얼마나 아팠을까?"
"그러게 말예요. 정말 너무나 끔찍한 형벌이에요, 무슨 죄가 있다고…."


여성일행들 중에는 그런 끔찍한 모습의 성화를 바라보며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는 사람도 있었다.

비아 도로로사(Via Dolorosa)는 라틴어로 고난의 길, 또는 슬픔의 길이라는 뜻이다. 예수가 가시관을 쓰고 십자가를 짊어진 채 로마 병사들의 채찍을 맞으며 걸었던 길의 시작은 바로 그 채찍질 교회 앞에서부터 시작되었다.

▲ 고색창연한 옛 교회모습
ⓒ 이승철
▲ 골목길 돌담벽에 새겨진 슬픔의 길
ⓒ 이승철
그 시작지점에는 순례객들이 체험을 해볼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커다란 나무 십자가가 세워져 있었다. 찾는 사람들이 많을 때는 돈을 받고 빌려주는 것이라고 하는데 이날은 여행객들이 많지 않아서인지 돈을 받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우리 일행들도 그 나무십자가를 한 번씩 짊어져 본다. 나무십자가는 매끈하게 다듬어서 만든 것이라 당시의 십자가와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겠지만 그래도 그 옛날의 그 현장이라는 곳에서 체험으로 짊어져 보는 느낌은 매우 각별한 모양이었다.

"어, 보기보다 상당히 무거운데, 이걸 그냥 짊어지고 가려고 해도 보통 힘으로는 어렵겠는 걸."
"저는 몇 걸음만 걸어도 고꾸라질 것 같던데요."


체험용 나무십자가는 길이가 상당히 길어서 고스란히 짊어질 수는 없었다. 어깨에 걸친 채 그냥 끌고 가야 할 만큼 길쭉했기 때문이다.

고난의 길은 이곳에서부터 시작하여 골고다 언덕까지 이어진다고 했다. 골고다 언덕은 예수가 짊어지고 간 나무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장소다. 그 죽음으로 가는 길은 그 당시는 사람들이 별로 많이 살지 않았던 언덕길이었겠지만 지금은 성안의 시내 한복판에 나있는 비좁은 골목길이었다.

"가다가 보면 사람들이 많은 곳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조심들 하세요, 이 길이 이스라엘 땅에서 소매치기가 가장 많은 곳이니까요."

경험이 많은 일행 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주의를 준다. 이곳에 순례객들이 많이 몰릴 때면 걸어가기가 어려울 정도로 길이 복잡하다고 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사람들이 많이 몰릴 때면 물건을 팔거나 구걸을 하는 사람들이 사람들 사이를 누비고 다니며 가방과 주머니를 턴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서로 눈을 빤히 마주치고 바라보면서 손으로는 가방을 열고 주머니를 뒤진다는 것이었다.

▲ 빌라도의 법정에 서있는 예수상
ⓒ 이승철
▲ 고난과 슬픔의 길 여덟 번째 장소
ⓒ 이승철
그동안 그들에게 당한 여행객들이 많아서 악명 높은 곳이 바로 이곳이라는 것이었다.

"아니, 예수님이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고난을 무릅쓰고 걸어간 십자가 죽음의 길이 도둑들의 길이 되었단 말이야. 그것 참 안타까운 일이구먼, 비극이야, 비극!"

누군가 직접 당해보기라도 한 것처럼 혀를 끌끌 찬다.

다행히 이날은 길에 사람들이 별로 많지 않았다. 그러나 도중에서 만난 여행객들은 상당히 다양했다. 세계각지에서 찾아온 사람들은 외모도 달랐지만 그들이 쓰는 언어도 외모만큼이나 각양각색이었기 때문이다.

거리에서 만난 현지인들의 표정은 반기는 모습도, 적대감을 보이는 것도 아닌 그저 무덤덤하기만 했다. 하긴 여행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어서 현지인들에게 있어 여행객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일 만큼 특별한 사람들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우리에게 웃는 표정으로 인사를 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꼬레아? 꼬레아?"

몇 사람의 남자들이 밝게 웃으며 우리들에게 손을 흔든다. 그들은 우리들의 외모로 금방 우리들이 한국인인 것을 알아차리는 모양이었다. 근처를 같이 걷고 있는 다른 외국인들에게는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우리들에게만 특별한 관심을 표시하는 이유는 대체 왜일까?

"이곳 사람들 대체로 한국인들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이유는 잘 모르지만…."

가이드의 말이다.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많은 외국인들을 날마다 보고 상대하는 그들이 우리 한국인들을 좋아한다는 것은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가.

비아도로로사는 가톨릭교회에서 14곳의 특별한 장소를 지정하여 놓고 있었다. 그 14곳의 장소는 예수가 사형선고를 받은 빌라도의 법정이 첫 번째 처소였다. 그리고 그 두 번째 장소는 예수가 가시관을 쓰고 채찍질을 당한 채찍질 교회였다.

▲ 골목길 풍경
ⓒ 이승철
▲ 이슬람 여성들이 쓰는 히잡을 파는 가게
ⓒ 이승철
세 번째 장소는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가다가 맨 처음 쓰러진 곳이라고 한다. 이곳은 엘 와디(El-Wadi)라는 길가로 폴란드 교회가 자리 잡은 곳이었다. 이렇게 기념교회가 있는 곳이 아닌 장소는 대개 골목길의 벽에 조그맣게 기록을 해 놓거나 작은 표찰을 붙여 놓기도 했다. 외국인 순례객들 중에는 그 장소를 만날 때마다 간단한 예배의식을 드리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네 번째 장소는 예수가 슬퍼하는 마리아를 만난 곳이었는데 이곳에는 아르메니아 교회가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다섯 번째 장소는 구레네 사람 시몬이 예수 대신 십자가를 진 곳이라고 한다. 이곳에도 프란체스코 수도회 성당이 자리 잡고 있었다.

여섯 번째 장소는 성 베로니카 여인이 예수의 얼굴을 닦아준 곳이라고 하는데, 이곳은 본래 베로니카의 집이 있던 집터였다고 한다. 일곱 번째 장소는 예수가 두 번째로 쓰러진 곳이었다. 이곳은 비좁은 상가골목지역으로 그리스도교도들이 사는 지역이었다.

여덟 번째 장소는 예수가 마리아를 위로한 곳이었다. 예수가 자신을 보고 슬퍼하며 우는 마리아에게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와 네 자녀들을 위하여 울어라"고 한 유명한 장소로 이곳에도 희랍정교회 소속의 수도원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곳에서 울었던 마리아는 예수의 어머니가 아니라 같은 이름의 다른 마리아였다.

아홉 번째 장소는 예수가 기력이 떨어져 세 번째로 쓰러진 곳이었다. 이곳은 콥트 정교회소속의 총주교관의 입구에 해당하는 곳이었다. 그리고 열 번째 장소는 드디어 골고다 언덕에 도착하여 옷 벗김을 당한 곳이었다.

이곳은 기념교회가 세워져 있어서 교회의 내부에 해당되는 곳이었다. 열한 번째와 열두 번째 장소도 교회 안에 있었는데 열한 번째 장소는 십자가에 못 박힌 곳이고, 열두 번째 장소는 운명한 곳이었다.

▲ 성분묘교회 내부모습
ⓒ 이승철
▲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가 누웠던 석판을 만져보는 순례객들
ⓒ 이승철
열세 번째 장소는 골고다 언덕의 무덤 앞이었다. 이곳에는 숨을 거둔 예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려놓았던 돌판이 있었는데 여성들 몇이 그 돌판을 만지며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마지막 열네 번째 장소는 역시 기념교회 안에 있었는데 시신을 안치했던 무덤이었다. 무덤은 장식이 대단한 작은 건축물이었다. 그런데 이 무덤을 지키고 있는 수도자는 얼마나 근엄한 모습인지 여행객들을 꼼짝 못하고 주눅 들게 만들었다.

무덤 안으로 사람들을 들여보낼 때마다 일곱 명씩 정확하게 숫자를 헤아려 들여보냈다. 또 방문자들이 말을 전혀 하지 못하게 단속했을 뿐만 아니라 표정까지도 엄숙하게 하여 지금까지 둘러보았던 그 어떤 곳보다도 엄숙한 분위기가 감돌게 만들었다.

그곳을 둘러보고 밖으로 나오자 가이드가 또 한 곳이 더 있다면서 우리를 안내한 곳은 바로 방금 들어갔다가 나온 무덤 터 뒤편에 있는 또 하나의 무덤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무덤은 바위굴이었는데 불이라도 난 것처럼 안팎이 모두 시커멓게 그을려 있는 것이 아닌가.

"서로 다른 가톨릭교단들의 다툼에서 비롯된 것이지요. 이곳이 또 하나의 다른 무덤 터라고 만들자 다른 교단에서 불을 지른 것입니다."

가이드가 시커멓게 그을린 바위 무덤을 가리키며 설명을 해준다.

"왜들 그렇게 헐뜯고 싸우는 건지. 사랑과 평화, 인류구원의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부끄럽게 만드는구먼."

정말 그랬다. 비아도로로사는 예수가 인류구원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 고난의 길을 걸어 죽음까지 이른 사랑과 평화의 길이었다.

▲ 시커멓게 그을린 바위동굴 무덤 터
ⓒ 이승철
그러나 3일 만에 부활하기 전까지 누워 있었던 무덤 터를 가지고 서로 자신들이 주장하는 장소가 옳다고 주장하다가 불까지 지른 인간들의 행동을 예수는 과연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을까.

전쟁과 음모, 살생이 그치지 않고 배불러 버려지는 음식이 넘쳐 나는 곳이 있는가 하면, 먹지 못해 굶어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 지구촌에서 그 숭고했던 사랑의 정신은 언제쯤 널리 실현될 수 있을까? 슬픔과 고난의 거리이자 희망과 사랑, 그리고 평화의 거리를 돌아본 우리 일행들은 다음 코스인 통곡의 벽이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덧붙이는 글 | 이승철 기자는 시가있는오두막집이라는 홈페이지를 갖고 있으며, 전국 100대 명산 등산기라는 등산여행기사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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