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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들어 봐유. 저 빠앙 하는 소리가 기차소리 맞어유. 요맘때면 날마다 아련하게 들린대니께유."

이따금씩 잠결에 어머니는 아버지께 기적의 여운을 아쉬움과 그리움을 가득 묻힌 채 잘 들어보라고 채근을 하시곤 했다. 가난해서, 너무도 가난해서 시집오고 몇 번 못 넘어 봤다는 대관령 고갯길이 넘고 싶다던 어머니는 늘 그런 식으로 기적소리의 여운에 마음을 달래곤 하셨다.

그런 어머니가 안 되어 보였던지 강릉에 사시는 외삼촌은 1년에 한 번은 꼭 마른 해산물과 농산물을 골고루 가마니에 넣어 화물로 보내 주셨다. 그러면 아버지와 오빠들은 십리길도 멀다 않고 리어카를 끌고 단숨에 달려가서 화물을 찾아 실어 오시곤 했다.

고구마, 쌀, 마른 오징어, 김 등 그 속에는 외삼촌 내외분의 정성이 가득 들어 있었다. 그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했던 것은 오징어였다. 소여물을 끓이기 위해 군불을 지피시던 어머니는 벌건 숯불을 화로에 담아서 오징어를 구워 주셨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오징어는 그 때 먹어보고 다시는 그때 그 맛을 느낄 수 없게 되었다. 부유와 음식물의 풍요 속에 잃어버린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어릴 적 입맛이 아닐까 한다.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이 푸른 하늘, 푸른 산 그리고 냇물이었다. 첩첩산중에 하루에 두세 번 지나가는 완행버스와 직행버스가 전부였던 가난한 농촌. 그 속에서 나는 중학교 2학년이 될 때까지 '우물안 개구리' 신세를 면치 못하였다.

먼지가 풀풀 나는 신작로 길을 걸어 시오리를 가야만 내가 다니는 중학교가 있었다. 당시만 해도 가정형편이 어려워 중학교 진학을 하지 못하는 친구들이 많은 터라, 방학이면 여행을 한다는 건 꿈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도 개학을 하면 가정형편이 괜찮았던 친구들은 여행을 한 이야기와 사진을 자랑삼아 학교에 가져오곤 했다. 그때처럼 우리집의 가난이 부끄럽고 화가 날 때도 없었을 것이다.

그해 여름이 되기 전 나는 멀리 포항에 살고 있는 언니에게 수시로 편지를 써서 보냈다. 친구들은 방학 때면 도회지로 놀러 가는데 나는 방학 때 마다 밭고랑을 누벼야 한다는 등, 언니의 동정심을 유발하기에 충분한 내용으로 가득 채워서 보냈다.

드디어 언니의 간곡한 부탁으로 나는 어머니 원성을 뒤로하고 생애 첫 여름방학 나들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마땅한 옷이 없어 교복을 입고 곤색 가방을 들고 혼자서 집을 나섰다. 버스도, 기차도, 여행도 모두가 처음이라 부모님은 연신 언니네 주인집 전화번호 적은 것을 잘 간수하라고 신신당부를 하셨다.

완행버스를 타고 원주까지 가면서 나는 참으로 신기했다. 부모님이 걱정하시던 차멀미가 도대체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저 좋기만 한 것을... 그리고 드디어 교과서에서도 볼 수 없던 기차역에 당도했다. 사람들은 어찌 그리도 많은지, 농촌에서는 볼 수 없던 화려한 옷차림은 또 얼마나 많던지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나 나는 애써 촌티를 내지 않으려 태연한 척 했다. 기차표를 끊어서 남들처럼 경주행 통일호를 타는 곳에 서면되었고, 내 좌석번호를 찾아서 앉으면 될 것을 부모님은 뭘 그렇게 잠을 설치시며 걱정을 하셨을까 싶었다. 난생 처음 타보는 기차는 황홀경 그 자체였다.

'홍익회'라고 쓴 옷과 모자를 쓴 사람들이 이따금씩 지나가며 맛있는 걸 팔 때면 나는 가벼운 주머니를 달래가며 꾹 참았다. 원주에서 경주까지 기차로 무려 7시간이나 걸렸지만 나는 아무것도 사 먹을 수가 없었다.

부모님이 어떻게 해서 보내주시는 건데 혼자 맛난 걸 사먹으랴 싶어 창밖을 열심히 구경했다. 터널, 큰 건물, 도시, 과수원...어느 것 하나 놓치기 아까운 장면들이 자꾸만 사라져가고 또 새로 나타났다. 다행이도 내 앞좌석에 앉았던 아가씨 둘이서 나에게 먹을 것을 연신 권하는 바람에 배고프지 않게 경주까지 무사히 갈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의 7시간은 전혀 지루하지 않았었다. 아마 내 모습을 드라마로 엮었다면 '촌놈 서울나들이'란 제목이 딱 어울리지 않았을까. 또 남들한테 처음타보는 버스와 기차임을 들키지 않으려 억지로 태연한 척 내 모습은 참으로 우스운 모습이 아닐 수 없잖은가.

나중에야 안 사실이었지만, 그 해 여름 강릉에 계신 외할아버지 생신에 어머니는 마땅히 차려입고 나설 옷이 없어서 못 가신다는 걸 알았다. 그 뒤로 난 직장에 다닐 때까지 다시는 여행이야기를 입밖에 꺼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여름방학 때면 어머니를 따라서 남의 밭에 김매는 일을 따라다녔다. 내가 어머니를 도우면 조금이라도 우리집 형편이 나아질 거라는 희망을 가득 안고서.

그때는 내가 얼른 커서 대학진학을 하는 것 보다 돈을 벌어서 부모님을 가난에서 벗어나게 해 드리고 싶은 욕망이 가장 컸었다. 가난! 가난은 너무도 힘들고 부끄러웠던 나의 적이라 느껴졌었다.

어쩌다 친정에 가는 어머니는 직행버스 보다 요금이 조금 더 싸다는 이유로 기차를 타고 가셨다. 완행버스요금도 아까워서 지나가는 트럭을 잡아타고 기차역까지 가셨다. 한 번은 트럭 앞에 사람이 타고 있어 짐칸에 탔다가 지나가는 차와 충돌하는 바람에 손가락 두 개를 잃고 말았다. 지금 같으면 봉합수술을 한다지만 그때만 해도 너무도 당황한 나머지 그냥 병원에 가서 치료만 받으셨다고 했다. 참으로 가슴 아픈 기억이 아닐 수 없다.

세월이 흘러 지금도 농촌에 사시지만 그래도 어머니는 '부잣집 할머니' 소리를 들으신다. 여든의 연세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내가 싫어했던 밭고랑에서 봄부터 늦가을까지 일터로 삼고 지내신다.

1년에 두 번, 어머니는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제삿날이 되면 강릉엘 가신다. 해마다 오빠가 모시고 가곤 했는데 지난 봄에는 사정이 생겨서 남편이 모시고 가게 되었다. 덩달아 나도 바닷바람을 쐴 수 있어 신나게 집을 나서게 되었다. 가는 도중에 어머니는 너무도 힘들어 하셨다. 차를 타니 어지럽고 힘이 없어서 자꾸만 쉬어 가자고 하셨다.

고속도로가 새로 생겨서 한 시간이면 족히 가는 거리를 3시간 만에 도착을 했다. 가는 동안 나는 속으로 엄청 눈물을 삼켜야 했다. 내가 그토록 원했고, 행복했던 그 기차여행도 이젠 돌이킬 수 없는 '불효'로 남아 있다. 젊어서는 돈이 없어 못 간 고향이 이제는 세월의 무게에 짓눌려 힘겨운 나들이가 돼버린 것이다. 새벽녘 조용한 시간이면 어렴풋이 들리던 그 기적소리조차 들을 수 없는 어머니!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덧붙이는 글 | 철도와 함께 떠나는 여행 응모글입니다.


태그:#기차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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