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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콜로세움
ⓒ 고의찬
2차 세계대전의 종전 이후 명실상부하게 국제사회의 시스템과 문화, 행동양식의 최신 유행을 이끌어 왔던 미국 패권(hegemony)의 영향력이 20세기 후반 들어오면서부터 점차 쇠퇴하고 있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특히 21세기, 테러와의 전쟁으로 대변되는 미국의 공세적 개입주의가 본격 대두되고 이라크 전쟁의 수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미국 리더십의 지지부진함은 경제력 측면에서 미국의 영향력이 쇠퇴하고 있다는 분석을 낳게 한다. 더불어 권력의 남용으로 인한 미국의 영향력 쇠퇴라는 고전적 현실주의 그룹의 비판까지 등장하고 있다.

<로마인 이야기>를 통해 접한 약 2000년 동안의 로마 융성과 쇠퇴 과정은 당시 유럽과 서구 세계의 전부라고 말할 수 있는 지중해 지역의 시스템과 문화를 주도적으로 발전시키고, 그 영향력을 주변 지역들로 파급시켜 로마에 의한 평화, 팍스 로마나(Pax Romana)를 달성시킬 수 있었던 '로마 패권'의 융성과 쇠퇴의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역사는 현재의 거울이라고 한다. 미국의 패권이 쇠퇴하고 있다는 분석이 사실이라면, 그 쇠퇴의 원인은 과거 로마가 왜 자국의 강대한 영향력을 상실해 나갔는지를 분석함으로써 간접적으로 도출될 수 있을 것이다. 필자의 전공분야와 결부시켜 가장 흥미 있었던 부분이 바로 이 점이었고, 저자 시오노 나나미는 수많은 로마인들의 입을 통해 이러한 궁금증을 어느 정도 해소시켜 주었다.

팍스 로마나는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었나

▲ 나폴리 국립 박물관에서 찍은 카이사르 입상
ⓒ 고의찬
팍스 로마나는 '로마에 의한 평화'를 의미하는 말로, 로마가 등장하여 지중해 세계의 패권을 차지하고, 그 영향력을 서유럽과 동유럽 전 지역과 북아프리카 지역으로 확장시켜, 지중해를 마치 '내해'처럼 유지시킬 수 있었던 시기로 시오노 나나미는 보고 있다.

따라서 팍스 로마나의 붕괴는 로마가 북아프리카와 근동 지역의 영향력을 상실하게 됨으로써 지중해가 유럽 문명과 오리엔트 문명간의 치열한 대결의 장으로 변하게 된 현상을 의미한다.

이러한 팍스 로마나는 로마 특유의 대외 정책으로 인해 달성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로마의 대외정책의 특징을 간략히 설명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대강의 범주를 지어보자면 첫째 개방성, 둘째 포용성, 셋째 세력균형으로 볼 수 있다.

첫째로 개방성은 로마 특유의 대외 정복 원리로 규정지을 수 있다. 근대의 제국주의는 중심부 국가의 필요에 의해 주변부 국가를 정복하여, 넓은 시장과 원료 공급의 기지로 삼는 지배와 착취의 원리로 운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로마의 대외정복은 그렇지 않았다. 카르타고와 갈리아는 '속주' 로서 로마라는 거대한 국가의 기능을 분담하였다.

동시대의 오리엔트 제국들이 피정복지역을 노예화하여 착취하고 지배한 것을 생각하면(예컨대 신 바빌로니아의 유대 정복, 유대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는 두 눈이 뽑히고, 유대 백성은 바빌로니아에서 70년간 노예생활을 해야만 했다) 로마의 대외정복과 피정복지 운영의 원리는 매우 획기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둘째로 포용성은 정복자 로마가 피정복 민족을 대하는 태도로 볼 수 있다. 피정복 민족은 '노예'가 아닌 로마 시민으로서 로마 시민과 동등하게 대우받았고, 로마의 의무를 다하면 로마 시민권이 주어지기도 하였다. 또 피정복 민족의 인재들 역시 로마를 위해 일하는 것을 명예로 여기게 되었고 나중에는 속주지역 출신의 황제까지도 등장하게 된다.

물론 이 시기는 민족주의의 시대는 아니다. 따라서 피정복자가 정복자의 문명에 동화되는 것이 근대 이후의 세계보다 훨씬 자연스러운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피정복자들이 패배의 고통을 잊을 정도로 로마 문명의 포용성의 힘은 대단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포용성은 매우 넓은 세력권을 통치해야 하는 로마 지배층의 부담도 덜어주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는 사회 내부의 안정에 직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로 세력균형이다. 세력균형의 원리가 매우 잘 적용된 지역이 로마의 동방 국경 지역이었다. 동방 국경은 오리엔트의 대 제국인 페르시아와 직접 충돌이 일어나는 지역이다. 페르시아는 로마가 동방 근동지역을 지배한 시기 내내 로마에게 부담을 안겨준 존재였다. 하지만 로마는 페르시아를 침공하여 지배하려고 하기 보다는 외교적으로 균형을 유지하는 쪽을 택하였다.

또 아르메니아라는 소국을 이용, 페르시아와의 완충지역으로 삼기도 하였다. 이는 근대 유럽 외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세력균형의 원리로 분석할 수 있다. 19세기, 유럽의 세력균형을 유지하는 것을 자국 외교정책의 제1의 목표로 삼았던 영국의 이중장벽(double barrier) 정책 역시 중부유럽을 완충지대로 삼아, 프랑스와 러시아간의 직접 충돌을 방지하는 것이었다. 페르시아를 침공해 정복하는 게 엄청난 국력의 소모를 가져다 줄 것이 불 보듯 뻔한 상황에서, 로마의 통치자들은 매우 현명한 선택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미국 패권의 생성과 쇠퇴

미국이 패권국이라는 명제에는 의견이 다분할 수 있다. 하지만 20세기 들어 미국의 영향력이 강대해지고, 미국의 대외정책이 국제 체제의 상위 시스템을 규정지으며, 미국의 문화적 영향력이 세계 각국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하기 힘들 것이다.

미국의 영향력이 급속히 발전하게 된 20세기 초·중반에는 팍스 로마나의 속성이라고 본 개방성과 포용성, 세력균형의 원리가 잘 적용되었다고 생각된다. 개방성과 포용성은 세계 각국의 이민자들이 미국으로 건너와 미국에서 제2의 삶을 시작하고, 또한 이민자 출신 인재들이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는 것에서 엿보인다.

세력균형의 원리는 냉전시대의 대소봉쇄정책에서 엿볼 수 있는데, 무리한 대외확장으로 소련의 세력을 압도하려고 하기 보다는 소련과의 세력이 접하는 지역에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수립을 독려하여 소련을 간접 압박하고 또한 소련과의 군축협상을 통해 핵균형을 달성하는 데에 적정한 군비만을 유지시켰던 것이 그것이다.

▲ 포로 로마노
ⓒ 고의찬
패권이론은 패권국 경제력의 상대적 쇠퇴를 패권 쇠퇴의 원인으로 꼽는다.

즉, 강대국이 내재적 경제발전과정을 통해 패권국의 경제력과 동등한 위치에 서게 되면 패권 전쟁이 일어나고 새로운 패권국이 등장하여 새로운 세계체제를 이루어 나간다고 보는 것이다.

미국은 경제력만으로는 일본을 능가한다고 보기 어렵지만 일본과는 밀월관계가 지속되고 있고, 또한 중국의 경제력이 급부상하고 있지만 미국과의 패권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은 아직까지는 없어 보인다. 미국의 패권, 즉 팍스 아메리카나의 쇠퇴가 사실이라는 가정 하에, 그 원인은 경제력 측면이 아닌 다른 곳에서 찾아보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로마의 쇠퇴는 앞에서 언급한 개방성과 포용성, 세력균형의 원칙이 무너지게 됨으로써 시작되었다고 생각된다. 즉, 로마 시민권이 그 희소성을 상실하게 된 3세기 이후부터는 오히려 로마출신과 이민족간의 계층 갈등이 발생하게 된다. 따라서 내부적 통합을 자랑했던 로마는 내부에서부터 붕괴하게 되고, 출신을 불문하고 인재를 선발하여 국가에 이바지하게 하였던 로마의 인재 등용문도 그만큼 좁아지게 되었다.

'마지막 로마인'이라고 저자가 보고 있는 스틸리코 역시 야만족 출신 장군이었으나, 로마출신 세력들의 시기와 모함으로 인해 퇴장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로마가 더 이상 개방성과 포용성의 사회 운영 원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방증한다.

또 기독교가 국교화되며 일신교인 기독교의 속성상, 다원주의를 배척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만연하며 내부적 붕괴로 이어지게 된 것도 로마에 위기를 가져다 준 한 요소이다. 세력균형의 원리는 결국 로마의 국력 쇠퇴에도 불구하고 무리한 페르시아 원정이나 야만족 정벌을 강행했다는 것에서 보여진다.

개방성과 포용성이 사라지고 있다

지금 미국의 패권이 쇠퇴하고 있다면, 이 역시 미국 패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개방성과 포용성이 쇠퇴하고 국제 체제 수준에서 미국의 권력이 남용됨으로써 미국의 권력이 쇠퇴하게 된 것을 원인으로 꼽을 수 있다.

미국은 9·11 테러를 기점으로 마치 '문명의 충돌'이라는 전제 하에 국제 체제를 바라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슬람 문명은 파괴적이고 폭력적이므로 항상 경계해야 한다는 왜곡된 인식이 등장하게 되었고, 또한 미국인이 아닌 이민자 집단은 항상 미국에 해악을 끼칠 수 있는 존재로 인식하게 되는 현상이 미국 주류사회 내에 퍼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재작년 미국 사회를 뒤흔들었던 이민법 개정 문제와 멕시코 국경에 설치한 철조망, 그리고 이슬람 신도들에 대한 린치 사건 등등, 미국 사회 특유의 개방성과 포용성이 사라지고 있다는 징조는 여기저기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미국의 개방성과 포용성의 상실은 대외정책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어, 미국이 자국의 국익과 관계없는 지역으로의 영향력을 확장하려고 하는 무리한 정책을 시행하게 되는 원인을 제공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라크 전쟁이 그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의 전통적 중동 정책은 중동의 친미국가를 강화하여 중동 내 반미 세력인 이란이나 시리아와 같은 국가들을 견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고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명목으로 이슬람 세력을 견제하기 시작하면서, 중동 내 친미세력은 그 입지가 약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더욱 거슬러 올라가면 베트남 전쟁에 무리하게 미국이 개입함으로써 전 세계적인 반전, 반미운동을 촉발시키고, 아시아 공산권 국가들이 미국과 대립각을 세우게 된 것 역시 미국의 권력이 남용된 사례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사례들은 권력의 사용을 '사려 깊게' 해야 한다는 전통적 현실주의 그룹의 비판 대상이 되는 것들이다.

팍스 로마나의 쇠퇴가 현재에 가져다주는 의미

패권의 쇠퇴는 그 패권이 융성할 수 있었던 요소들이 하나 둘씩 상실되며 일어난다는 것을 <로마인 이야기>를 몇 년에 걸쳐 읽으면서 생각할 수 있었다. 로마가 그 찬란했던 문명과 뛰어난 운영의 묘를 상실하게 되는 2세기 이후의 과정은 나에게는 큰 슬픔과 비감으로 다가왔다.

그 순간 내가 <로마인 이야기>에 얼마나 매료되어 있었는지를 느끼게 되었다. 거대한 문명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유장한 드라마의 감동을 <로마인 이야기>를 통해 느끼게 된 것이다.

현재 우리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미국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 것도 <로마인 이야기>가 내게 가져다 준 긍정적인 선물이었다. 미국 패권이 지금 쇠퇴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는 가정 하에 로마의 융성과 쇠퇴 과정은 미국 쇠퇴의 원인을 생각하는 데에 많은 힌트를 제공해 주었다.

<로마인 이야기>를 통해 현재를 살아가는 한국인들은 미국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또한 국제정세를 어떻게 이해해 나갈 수 있는 것인가에 관한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로마인의 국가 운영의 지혜는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로마인 이야기 6 - 팍스 로마나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한길사(1997)


태그:#팍스로마나, #팍스아메리카나, #미국, #패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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