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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추위가 닥친 지난해 12월 28일 오후 경기도 안산 대부도 극기훈련장에서 극기체험에 나선 어린이들이 고무보트 육상 기동훈련을 통해 정신적, 육체적 한계에 도전하고 있다(기사와 특정 관련이 없습니다).
ⓒ 연합뉴스 신영근

큰애가 2박3일 동안 집을 비웠다. 초등학교 4학년인데 학교에서 단체로 '극기훈련'을 갔다.

집과 학교, 그리고 그 사이의 우호적인 공간들 속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으니 며칠 쯤 집을 떠나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더욱이 학교의 공식 행사이므로 필요 이상으로 걱정할 일도 없지만, 그럼에도 하룻밤 지내고 나니 마음 한 쪽이 헛헛해진다.

그래서 아이 방에 괜히 한번 들어가 보았다. 내 눈에는 언제나 철없는 개구쟁이지만 아무 걱정 말라면서 '빠이, 빠이' 손흔들고 나간 큰애를 생각하며 방을 둘러보다가 책상 위에 놓인 '극기훈련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다.

2박3일의 프로그램을 훑어보면서 '설마 여기 적힌 항목을 'FM'대로 하지야 않겠지' 하는 마음이면서도, 더 솔직히는 '아직도 이런 프로그램으로 하나' 하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래서 몇 가지를 더 생각해 보았다.

거기에는 '군사부일체 훈련' '협동심 함양' '체력단련' '예절 교육' '촛불의식' 등이 적혀 있었다. 만약 이러한 용어들을, 우리 모두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과거의 언어 관습이나 그에 따른 행동양식에 맞춰 고스란히 진행한다고 하면 진실로 "이제는 그만 사양할 때"라고 단호하게 말하고 싶다.

물론 극기훈련이라고 해서 초등학교 4학년생들을 '빡시게' 굴릴 수련원은 없을 것이요, 그 곳의 교관들도 젊은 친구들이기 때문에 옛날의 군사훈련처럼 함부로 아이들을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모처럼 아이들이 2박3일 동안 익숙한 공간을 떠나서 갖는 일들이 종이에 적힌 바와 같다면 이는 온 사회가 심각하게 고려해 볼 과제라고 생각한다.

왜 아이들이 야밤에 촛불을 들고 울어야 하나

우선, 왜 어린아이들이 '극기훈련'을 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부터 가능하다.

아이들은 원래 산만한 구석이 있고 그것이 반드시 나쁜 행동이거나 미래의 나쁜 행위와 직선으로 이어지는 것도 아닌데 왜 체력 단련과 정신집중 훈련을 받아야 하는가?

'군사부일체'며 '협동심 함양' 같은 용어가 독재 정권 때는 물론 90년대도 훨씬 지나서 그야말로 민주화 20년이 지난 21세기의 오늘에도 여전히 훈련을 통하여 습득해야 할 내용들인가?

왜 아이들이 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는데 야밤에 촛불을 들고 흐느껴야 하는가?

문제는 스승을 존경하고 친구를 사랑하는 마음들이 아니다. 뉘라서 그런 갸륵한 심성을 마다할 것인가?

그런데 이를 '군사부일체' '협동심 함양' '정신 집중' 같은 둔탁한 형식에 가둬서 익히고자 할 때는 필히 강요와 암기, 반복과 복종이라는 내용으로 이어지게 마련인 바, 이는 극기'훈련'이라는 단어 자체가 고스란히 증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자신을 이기는 것(극기)는 물론이려니와 자신을 알아가는 것도 한 평생 동안 해내기 어려운 숙제이다.

보다 엄밀한 뜻에서는 자기를 이기기보다는 자기 영혼의 어지러운 무늬를 깊이 헤아리고 자신의 욕망과 객관적 현실 사이의 이질감과 불균형을 메우기 위해 시지프스처럼 바윗돌을 굴리고 또 굴리는 것이 인생이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주어진 운명의 갈림길을 현명하게 살아가고자 노력하는 것이 가능할 뿐, 솔직히 자신을 이기는 것(극기)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극기훈련'보다는 그나마 '자아성찰'이 유소년들에게는 더 어울릴 법한 언어이지만, 이 일도 집단적으로 모여 '훈련'하는 것은 비교육적인 것이다.

이같은 상념 끝에 실제로 도처에서 벌어지는 극기 훈련의 내용이 궁금하여 '극기 훈련 프로그램'을 검색해 보았다. 독자들도 잠시 짬을 내어 살펴보기 바란다.

▲ 논산 육군훈련소 연병장에서 훈련병들이 제식훈련을 받고 있다(기사 내용과 특정 관련이 없습니다).
ⓒ 연합뉴스 조용학
대다수의 '훈련캠프'가 해병대 유격 훈련 프로그램을 차용하여 짜놓았는데 만약 경향 각지의 수련원을 하나의 사회라고 한다면, 한마디로 병영 국가라고 부르지 않을 수 없을 정도이다.

중고등 학생부터 대학생·회사원·공무원 등이 다양하게 '입소'하여 '훈련'을 하게 되는데, 장애물 훈련·순검·PT 체조·해상 훈련·15㎞ 행군 등이 그 과정이다.

이마저도 '즐거운 놀이'라면 할 말이 없고, 이 훈련 과정에서 참여자들이 자신의 체력이 어느 정도 되는지 알 수도 있을 것이라면 효과가 전혀 없지는 않다. 그렇지만, 과연 이렇게 학생에서 회사원까지 '모의 군사훈련'을 하면서, 촛불을 들고 엉엉 울어야 한단 말인가?

이들 프로그램의 초등학생 과정은 그 정도가 약하게 되어 있고 '장기자랑' 같은 프로그램도 섞여 있는데, 이는 그 연령 때문에 비교적 낮은 수준으로 짠 프로그램일 뿐 그 흐름은 여전히 '기상'으로 시작하여 '취침 점호'로 끝나는 '모의 군사훈련'과 그리 다르지 않다.

큰 산을 오르기도 '훈련'이요, 오지 마을 다녀오기도 '훈련'이다

물론 이렇게 말하면서도 그리 큰 걱정을 하지는 않는다.

아마도 큰애와 또래의 어린이들은 특유의 천진난만으로 '훈련'을 조금 색다른 '놀이'로 치환하여 가급적 즐겁게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고, 그래도 세상이 많이 변했으니, 수련원이나 교관들도 아이들에게 '이색 체험'의 기회를 제공하는 정도로 여기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87년 이후 '민주화 20년'이 흘렀고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중대한 변화와 발전이 진행되었지만, 우리 사회의 집합적 내면은, 그리고 그것을 가르치고 습득하는 과정이 '병영 사회'의 잔영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는 것이다.

비단 극기훈련만이 아니다. 지난 월요일 저녁의 SBS 뉴스는 울산의 어느 초등학교 축구부 아이들이 대낮에 운동장에서 폭력을 당하는 장면을 보도하였다. 코치의 손찌검을 두려워서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는 10대 초반의 어린 영혼들을 보면서 충격에 휩싸이지 않은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한겨레신문>이 3월의 신학기 때 전국 각 대학에서 벌어지는 폭력적인 길들이기 과정을 연속 보도한 바 있는데, 말하자면 지금 우리 사회의 어떤 미성년들은 여전히 맞으면서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때로는 성인들도 그와 같은 일을 겪는다. 회사도 그렇고 심지어 '프로' 스포츠 팀들도 그렇고 뭔가 전체를 추스르고자 할 때는 반드시 '훈련캠프'에 입소하는 것을 만능책으로 삼고 있으니 안타깝다.

그리고 그러한 야만적 행위가 '정신 집중' '협동심 함양' '극기' 따위의 전근대적 용어로 합리화되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다시 한번 검토하건대, 성장기의 아이들이 집을 떠나서 며칠 동안 색다른 체험을 하는 것은 반드시 권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경향 각지에서 똑같이 시행되는 '극기훈련'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굳이 '훈련'이라는 이름을 붙여 말하자면, 두꺼운 책을 끝까지 읽는 것도 '훈련'이요, 친구들과 큰 산을 오르는 것도 '훈련'이다. 식물도감을 끼고 너른 들과 깊은 산의 야생화를 하루 종일 살펴보는 것도 '훈련'이요, 사라져가는 옛 일상 문화를 찾아 오지의 마을을 다녀오는 일도 '훈련'이다.

이러한 것도 2박3일 프로그램으로 충분히 짤 수 있을 것이며 그 과정에서 아이들은 친구와 함께 낯선 세상 속의 공기를 마시며 수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될 것이다.

"극기훈련 폐지" 공약하는 후보를 찍겠다

▲ 지난 2005년 '학생인권보장 청소년축제'에서 참가 학생들은 자율발언 등을 통해 두발단속, 야간자율학습 강요, 학생회 간섭, 교문앞 용의검사, 인터넷 글쓰기 금지, 단체기합 등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개선을 촉구했다. 두발단속이 없어지기를 바라는 뜻을 담은 '마지막 바리깡'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이런 점에서 나는 '민주화 20년'이라고 하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는 더 많은 민주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각 진영의 유력한 대선 후보들이 저마다 새로운 정치적 언어와 정책을 제시하고 있는 판국인데, 오늘의 심정으로는 "전근대적인 극기 훈련 프로그램을 폐지하겠다"는 공약을 누군가 제시한다면, 나는 당장 그 사람을 지지할 것이다.

거창한 정치적 의제에는 어울리지 않는 작고 사소한 이야기지만, 나는 바로 이와 같이 일상의 낡은 모습, 지난 시대의 권위적 요소들, 극기 훈련이나 두발 단속 같은 일상의 민주화가 대단히 소중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지난 4월 14일, 서울 광화문 한국통신 건물 앞에서 청소년들이 '인권 거리 퍼포먼스'를 펼쳤다. 그들 나름의 절박한 메시지를 유쾌한 퍼포먼스로 펼친 것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기사에 대한 2600여 건의 댓글 가운데 대부분이 비난 일색이었다. "저 나이 땐 다 그러지만, 얘들아, 사회 나오니 약육강식이다. 정신 차려라" "요즘 애들 배가 불렀어요" "중간고사 기간에 뭣들 하니?" "저런 애들이 나중에 정치한다고 깝쳐요" 등등.

아, 진실로 '민주화 20년'이라고들 하지만, 우리에게는 더 많은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태그:#극기훈련, #체벌, #청소년,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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