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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 불국사, 일주문을 통과하면 바로 만나게 되는 아름다운 풍경. 멀리 해탈교와 천왕문이 보입니다.
ⓒ 방상철

프롤로그,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눈 소식에 가을은 이미 멀리 지나가버렸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며칠 전 다녀온 경주에서 그 끝자락이라도 잡았으니 참 다행이야! 하지만 결국 난, 너에게 했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말았어. 미안해!

@BRI@10년 전 바로 오늘(11월 23일)이지? 결혼식을 올리고 신혼여행을 떠나면서 비행기에서 맹세했던 거 말이야? 결혼 10주년 되는 날에는 꼭 해외에 가자고 했었지! 그때야 10년이 이렇게 가까울 줄 상상이나 했었나? 10년 후에는 돈도 많이 벌고 생활에 여유가 생겨, 외국 여행쯤이야 내 지갑에서 용돈 꺼내 쓰듯 쉽게 다녀올 수 있을 줄 알았지. 하지만 삶이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아 결국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되었어.

사실 ‘결혼 10주년’을 자축하기 위해 올 초부터 준비했어. 용돈도 조금씩 모았고, 당신 모르게 들어온 돈들도 죄다 내 비밀 통장에 넣어두었지. 처음 계획은, 100만원 정도가 모아진다면 제주도에 갈 생각이었어. 하지만 그동안 모은 돈은 고작 그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어. 제주도는 물 건너갔지.

하지만 그 대신 경주를 생각했어. 아낀다면 다녀올 수 있을 것 같았어. 며칠 전부터 회사 이름으로 돼있는 콘도를 빌려 놓았고, 바로 전날엔 은행에서 돈도 찾아 놓았지. 그나마 마음이 뿌듯하더라. 당신, 그 콘도에서 한번 자고 싶어 했었잖아!

금요일 저녁에 도착한 콘도는 너무 좋았어. 아들도 방안을 뛰어다니며 여기서 꼭 자자고 손을 모았지. 이미 예약하고 왔다는 사실을 아들이 알 턱이 있나. 그동안 찾아 다녔던 민박집은 방을 먼저 보고서야 돈을 치루고 잠을 잤지. 그나마 좋은 곳은 너무 비싸서, 돌아 나오기 일쑤였으니 아들의 행동이 이해도 돼.(중략...)


아! 누가 이렇게 절집을 근사하게 꾸며 놓았을까?

콘도에서의 하룻밤은 행복했습니다. 경치 좋고, 시설 좋고, 깨끗하고 또 따뜻했습니다. 아침에 커튼을 활짝 열었을 때 경주의 넓은 들녘과 주변 산허리를 가득 메운 안개를 보았습니다. 경주의 첫인상은 이렇게 아직까진 안개에 쌓여있습니다.

솔직히 경주에 온 것이 두렵기도 합니다. 역사의 도시, 거대한 박물관의 도시에 왔으니 무언가 느끼고 돌아가야 한다는 중압감이 어께를 누릅니다. 그래서 반대로 생각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아무것도 얻어가지 말자고. 이제부터 어떤 풍경이 펼쳐질지 모르지만 경치만 바라보고 돌아가자고...

아침을 먹고 불국사에 가보기로 했습니다. 어린 시절에 보았던, 아득한 기억 속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 절집을 꺼내보고 싶었습니다. 그때는, 선명한 기억은 아니지만, 내가 뭔가를 보고 싶어서 따라왔던 여행이 아니라 어른들의 짜 맞춰진 틀에 갇혀 질질 끌려 다녔던 여행이라 지겨웠었을 겁니다.

그래서 지금 내 옆에서 걷기 싫어 짜증내는 아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이 당연할 지도 모릅니다. 아이는 아직, 엄마와 아빠가 짜 맞춘 틀 속에서 언제나 피동적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존재니까요.

보문단지를 빠져나가는 내내 나의 시선은 주변 풍경에 머물렀습니다. 아! 여기서 비로서 가을을 느끼는 구나! 하지만 사실은 저희가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 내에서도 전날 보았던 풍경일지 모르겠습니다. 눈으로 본다고 다 마음속에 담기는 것은 아니기에, 삶의 현장에서 빠져나와 좀 여유를 갖게 되니 비로서 가을 풍경이 마음속에 다가온 모양입니다. 경주 여행이 끝나고 집에 돌아간다면 나의 흔한 주변 풍경에도 애정을 가져봐야겠습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언덕길을 한참 동안 걸었습니다. 그러고 나서야 비로서 불국사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아이는 벌써부터 지쳤습니다. 아니, 체력적으로 지친 것이 아니라, 심심하고 따분해서 기분이 가라앉은 것 일겁니다.

일주문을 통과해 절집에 들어서니 눈 두는 곳마다 형형색색 아름다운 가을빛과 만나게 되었습니다. 아! 누구의 작품일까요? 이렇게 아름다운 조경을 꾸민 사람이. 자연과 사람이 함께 만들어낸 정말 멋진 예술 작품입니다.

아내는 남아서 사진을 더 찍고 우리는 먼저 길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해탈교를 건너 천왕문에 이르는 데, 뒤에서 유치원생 꼬마 아이들이 선생님을 따라 친구의 손을 잡고 떠들썩거리며 걸어오는 모습이 보입니다. 아내를 기다리기 위해 꼬마들을 먼저 지나쳐 보내는데, 그때서야 아들 표정이 밝아집니다.

자기 또래의 다른 아이들을 만나니 기분이 좋아진 모양입니다. 자기 혼자만 억지로 끌려온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을까요? 아니면 어른들만 오는 곳 인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은 것일까요?

"야! 하늘 天 이다." 한 남자아이가 큰 소리로 천왕문을 바라보면 얘기합니다. 다른 아이들도 함께 떠듭니다. 아마 아이들이 한자공부를 막 시작한 모양입니다. 그때 아들도 조용히 한마디 합니다. "나는 문 門도 아는데..."

사진을 찍던 아내가 도착하고 다시 함께 아이 손을 마주잡고 천왕문을 통과했습니다. 아이 표정이 많이 밝아졌습니다.

▲ 90미터에 이르는 석축을 정면에서 보면, 오른쪽에 청운교와 백운교(국보 제23호), 왼쪽에 연화교와 칠보교(국보 제22호)가 위치해 있습니다.
ⓒ 방상철

마음속으로 기둥을 세워 보고, 그림을 그려본 황룡사지

불국사 대웅전 앞에서 석가탑과 다보탑을 둘러보고, 또 절집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다 곧바로 시내로 나왔습니다. 시내 곳곳에 위치한 유적지를 돌아보기 위해서죠. 하지만 다른 곳보다 우선 황룡사터에 가보고 싶었습니다. 주춧돌만 남겨진 황량한 벌판을 불국사 다음으로 꼽은 것은 제 나름대로 이유가 있습니다.

분황사 앞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쓸쓸함이 묻어나는 넓은 들판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황룡사지는 신라 진흥왕 14년(553년) 월성의 동북쪽에 새로운 궁궐을 짓다가 황룡이 나타났다는 말에 사찰로 고쳐 지은 것이라고 합니다. 그 공사가 무려 93년이나 걸렸다니 얼마나 거대한 사찰이었는지 짐작이 갑니다. 그런데 고려 때 몽고 침입으로 이 아까운 보물들이 잿더미로 변했다니 참 안타까울 수밖에요.

▲ 황룡사지, 금당지 주춧돌 위에 상상 속 기둥을 세워봅니다.
ⓒ 방상철

금당지 주춧돌을 바라보며 살며시 눈을 감아 봅니다. 그리고 잠시 동안, 좀 전에 돌아봤던 불국사의 이미지를 생각해 냈습니다. 그동안 폐사지 여행을 하면서 좀처럼 마음으로 지을 수 없었던 건물들을 이곳에서 한번 지어볼 요량입니다. 어쩌면 불국사에서 석굴암으로 향하지 않고 이곳으로 바로 온 큰 이유가 이것 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과연 내 맘대로 이곳에 다시 불국사를 짓는 것이 옳은 일인지는 모릅니다.

서서히 눈을 뜨고 주춧돌 위에 기둥을 세워봤습니다. 방금 막 새로 칠을 한 붉은 색의 기둥이 서서히 올라옵니다. 그 위에 대들보, 서까래, 지붕까지 집 한 채가 생겼습니다. 하지만 눈을 크게 뜨면 바로 사라지고, 조금 실눈을 뜨고 집중을 해야지 겨우 대웅전 한 채가 보입니다. 하지만 이래서야 언제 황룡사를 다 짓겠습니까?

집짓기를 포기하고 천천히 폐사지를 걸었습니다. 그러면서 마음속으로 그림을 그려봅니다. 건물을 짓는 것보다는 훨씬 수월하지만 결코 만만치 않은 작업입니다. 앞으로 더 많이 돌아다니다 보면 좀 쉽게 할 수 있는 날이 오겠죠?

아이는 넓은 벌판을 날아다니듯 휘젓고 다닙니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뛰어다니는 그 얼굴에는 웃음이 한 가득입니다. 석탑이라도 하나 서있었다면 뛰지 못하게 했을지도 모릅니다만, 다른 곳에선 항상 못하게 하는 게 많은 지라, 이 절터에서는 아무런 제지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아들도 알고 있습니다. 아주 오랜 옛날, 이곳 주춧돌 위에 뭐가 있었는지 말이죠.

에필로그, 아! 잊지 못할 경주!

▲ 계림(사적 제19호)은 첨성대와 월성 사이에 위치해 있으며, 경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가 태어났다는 전설이 있는 곳입니다.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데, 적어도 500년 이상 된 나무들로 꾸며진 멋진 숲 속에 가을이 깃들어 있습니다.
ⓒ 방상철

분황사 석탑, 안압지, 천마총, 첨성대, 계림, 석빙고까지 둘러보고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경부고속도로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너무 짧게 돌아본 경주, 그 경주에 대해서 얘기하기가 많이 부끄럽습니다. 나중에는 남산만을 목표로 다시 경주에 오자고 아내와 얘기했지만, 솔직히 그게 또 언제가 될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후, 11월 23일 결혼기념일 당일에 아내에게 써놓았던 편지를 건네주고, 저녁을 먹으며 경주의 일을 얘기했습니다. 만추 속의 경주는 아직까지 나와 아내, 그리고 아이의 기억 속에 머물러있습니다. 깊어가는 가을 속의 경주가!

하지만 가장 중요한 사실이 꼭 경주를 다녀왔다는 일 때문만은 아닐 겁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은, 바로 10년 동안 함께 한곳을 바라보면 살아왔다는 사실이겠지요. 그래서 아마 2006년 올 한해에 가장 기억에 남을 만한 일이 바로, '아내와 나의 결혼 10주년'이 아닐까 싶습니다.

덧붙이는 글 | 2006, 나만의 특종 응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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