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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직장에서 연례적으로 하는 건강진단을 받았습니다. 결과 통보가 왔는데, 재검을 받으라는군요. 수년 전부터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다거나 고지혈증을 주의하라는 정도는 늘 나왔기에 그려러니 했는데, 이번에는 흉부 엑스레이를 다시 찍으라니 웬일입니까?

다음 날로 그 병원에 달려가 엑스레이를 찍었습니다. 물론 별로 걱정은 하지 않았지요. 일년 반이나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운 지가 한참은 되었지만 특별히 나쁘지는 않았거든요. 오히려 끊었다 다시 피우는 담배 맛을 한껏 좋아라 하고 있었구요.

며칠 후 1차 검진 통보서를 자세히 살펴보니 이상한 병명이 적혀있었습니다.

'종격동중피의증'

이게 뭡니까? 누구 아시는 분 있나요? 저는 처음 듣는 병명이거든요.

부랴부랴 인터넷에서 찾아보았습니다. 의학 용어들이 난무하는 속에 겨우 찾았는데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더라구요. 폐암 근처에 있는 것으로 봐서 비슷한 종류가 아닌가 걱정이 되었습니다.

걱정이 아니라 '헉'하고 호흡이 멎을 정도였지요. 잠시 정신을 가다듬고 심장전문의인 제자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 네 전공이 아닌 건 알지만 한가지 물어보자. 종격동중피의증이 뭐냐?"
"누가요?"
"나."
"누가 그래요?"
"건강검진 결과에 그렇게 써있어."
"엑스레이밖에 안 찍었잖아요?"
"그렇지."
"증상은 있어요?"
"아니, 모르겠어. 근데 그게 뭐니?"
"종격동에 중피가 덮히는 것인데, 빨리 정확히 알아봐야 되요."
"무서운 거냐?"
"악성이면 6개월, 길어야 1년밖에 못살아요. 악성이 아니면 빨리 수술해야 하구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니?"
"진단방사성과에 가서 CT 찍어 봐요. 그게 제일 빨라요."

오만가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꼭 내 나이 때 돌아가셨지? 한살 더 먹었던가? 앞으로 1년만 산다면 꼭 그 나이네.'

아버지는 당뇨에 간경화로 일찍 돌아가셨거든요.

'며칠 전 뜬금없이 막내 아들놈 방학하면 같이 아버님 산소에 다녀오리라 생각했는데 공연한 생각이 아니었구나!'
'작년에는 모든 일이 마음 먹은 대로 되지 않는 어려운 한 해였고, 아니, 근 5년을 준비해 온 일이 물거품이 되어버린, 최악의 한 해였는데…. 방향을 바꿔 다른 진로를 모색하던 것도 여의치 않아 포기상태에 있었는데…결국은 이렇게 끝나고 마는구나.'

얼른 아무도 없는 방에 들어가 소리없이 울었습니다.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지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정리를 해야지. 가족들에게는 당분간 알리지 말자. 작업실을 정리해야 한다. 꼭 필요한 것만 남기고 모조리 태워버려야지. 그리고…흑, ㅎ…."

'6개월이면 충분해. 내 살아온 길을 정리해서 내 아이들에게 기록을 남겨주자. 블로그에 비밀리에 글을 써 놓고 큰 딸에게 비밀번호를 알려주면 되겠지. 그리고 옛 추억이 서린 장소를 모조리 찾아보자. 친구들도 차례로 만나 인사를 해야지. 물론 내가 죽는다는 것은 눈치채지 못하게 해야겠지.'

진단방사선 병원에 들어선 순간 이상하게도 마음이 차분해지고 편안했습니다. 난 의사에게 건강진단서를 보여주고 엑스레이를 다시 찍었습니다.

여성지를 뒤적거리며 여유있게 기다리던 나를 부른 의사가 엑스레이필름을 살펴보며 왜 왔느냐고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습니다. 건강진단서를 보여주니 이상하다고 고개를 갸웃합니다.

"이것 때문에 그런가? 이건 심장으로 들어가는 하방정맥(?)인데? 내 생각에는 이상이 없을 것 같은데, 어떠세요? 마음을 못 놓겠다면 CT를 해보시든지, 안 해보아도 괜찮을 것 같기도 하고…."

내가 찜찜해하자 "해봅시다, 그럼" 했습니다.

팔에 주사기를 꼽고 호흡을 들이쉬었다 멈추기를 30여회, 괴로운 시간이 끝나고 곧, 의사와 면담이 있었습니다.

결론은 이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밖으로 나오며 하늘을 보았습니다. 날씨도 쾌청하고 바람도 시원했습니다. 가족들은 이 사실을 아직 모릅니다. 따지고 보면 내가 혼자 벌인 자작극이 된 셈이지요. 사실 죽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아 있었거든요. 선고를 받으면 오히려 편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구요. 현실에서 완전히 도피하는 것, 그게 죽음 아닌가요?

그러나, 나는 이 날 한가지 중요한 걸 얻었습니다. 실패한 과거에 집착하지 말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자는 의지가 생긴 것입니다. 죽음 앞에는 모든 게 별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죽으면 모든 게 끝인데, 집착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덧붙이는 글 | 블로그에 써놓았던 글을 약간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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