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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 외할아버지께서 우리 집에 오시면 나는 큰집으로 급히 달려 내려가서 달걀 한알을 가져 왔다. 그것은 외할아버지가 오실 때마다 지키기로 한 엄마와 나만의 약속이었다. 그 시절 우리 집은 소도 없고 개도 없고 닭도 없는 참으로 가난한 집이었다.

큰 집에는 소도 있고 온 동네가 울리도록 컹컹 짓는 커다란 개도 있었다. 닭도 여러 마리 길렀는데 엄마 따라 종종종 몰려 다니던 노란 병아리들을 보며 얼마나 큰집 언니오빠들이 부러웠는지 모른다.

그렇게 큰 집으로 달려 내려가 큰엄마한테 달걀을 딱 한알 얻어서는 치마폭에 싸서 엄마한테 갖다 드렸다. 그러면 엄마는 그것을 정성을 다 해 프라이를 해서 막걸이 한사발과 함께 상에 차려 내셨다. 연탄불도 없고 곤로도 없었던 그 때 엄마는 무슨 재주로 달걀 프라이를 만드셨는지 지금도 궁금한 일이다.

그건 그렇고 그렇게 약주 한잔을 하시고 묵묵히 앉아 계시던 외할아버지께서 가시고 나면 엄마는 매번 하염 없이 훌쩍훌쩍 우시곤 하셨다.

마당에 가득하던 노란 햇살, 그리고 수국, 단국화, 봉숭화, 칸나가 피어 있던 어여쁜 화단과 저 아래로 푸른 들판이 내려다 보이던 산꼭대기 우리 집. 집 앞 소나무 밭에서 위잉 바람소리 스산히 들려오던 초가삼간 창호지 문 너머로 해가 기울 때까지 홀로 앉아 우시던 젊고 고왔던 우리 엄마.

후일 내가 시집 갈 나이가 되었을 즈음 들려 준 엄마의 얘기로는 그 때 그토록 운 이유가 얼굴도 한번 못 본 총각한테 외할아버지 시키시는 대로 시집을 왔는데, 와서 보니 그 신랑이라는 사람이 너무도 무뚝뚝하고 인정이라고는 도무지 눈꼽만치도 없는 양반이라 할아버지께는 아무 말씀 못 드리고 가고 나면 그리도 눈물이 나더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날 보고 날마다 하시는 말씀이 "니는 나이가 얼매가 되든지 꼭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내서 시집을 가거라. 결혼은 우야든동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찌리 해야 행복한기라" 이렇게 신신당부하셨다.

그 말씀을 정히 명심하고 산 것도 아니건만 나는 서른이 훨씬 넘도록 시집을 못가고 말았다. 내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 헤매다 그리된 것이 아니라 답답하게도 아무도 나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며 결혼을 청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스스로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내어 쟁취할 만한 용기와 숫기가 없었던 탓도 있겠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쓸 데 없는 내 교만과 아집 때문이었을 것이다.

엄마는 결혼하고 10년 동안 아기를 못 낳았는데 집안 어른들께서는 작은댁을 얻으라느니 그만 살라느니 여러 말씀들을 하셨지만 그 때 아버지께서는 일언지하에 모두 거절하셨다는 것이다. 그 일을 생각할 때마다 그렇게도 무뚝뚝하고 인정이라고는 눈씻고 봐도 없다고 여겼던 우리 아버지의 가슴 속에는 아무도 모르게 불타는 사나이 순정이 이글거리고 있었다고 지금도 나는 굳게 믿는다.

어찌어찌해서 내가 첫딸로 태어나고 엄마는 그때부터 이제는 살아야 겠다고 마음을 다잡아 잡수셨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에게 목숨을 걸고 사랑을 걸고 인생을 거셨다. 엄마의 가슴 속 모든 사랑을 다 받아 먹고 자랐지만 나는 그러한 엄마의 사랑을 배반하고 말았다. 회초리 한번, 큰 소리 한번, 욕설 한번 듣지 않고 고이고이 자란 내가 넘치는 그 사랑을 먹고 착하고 선하고 지혜로운 여인으로 자라지 못하고 교만과 아집투성이의 못난이가 되고 만 것이다.

그렇게 못난이가 되어 험한 세상을 헤매고 다니다 서른여덟 되던 해 아름다운 춘삼월 한 남자를 만나 시집을 갔다. 결혼을 하기 전에 오래 전 울엄마의 당부를 떠올리며 그가 나를 그리고 내가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는가. 그리고 그가 진정 '안 무뚝뚝한' 남자인가 혼자 곰곰 생각을 해 보았어야 했을 것을.

시집을 가고 보니 무뚝뚝하고 인정머리 없기로 이 양반은 우리 아부지보다 한수위였다. 세상에 우째 이런 일도 있다는 말인가. 내가 돌아서서 설거지를 할 때 뒤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까지 어찌 그리도 똑 닮았는지. 아! 참으로 늦게 온 감격의 내 사랑이라는 것이 어찌 그리도 야속하던지.

엄마는 친정 아버지께서 골라 주신 신랑이 그리도 원망스러웠고 닭 한마리 키우지 못할 정도로 찢어지게 가난한 살림살이였건만 그래도 그 아버지 대접하려고 큰 집에 이 눈치 저 눈치 봐가며 가슴을 졸이면서 내게 달걀 심부름을 시켰을 것이다. 그리고 그토록 무뚝뚝하고 인정머리 없는 양반이건만 그럼에도 하늘 같은 남편으로 순종하며 섬기며 한평생을 살아오셨다.

그러나 그 엄마의 딸인 나는……. 아버지 닮은 남편을 흉만 보면서 참으로 긴 세월 덧없이 살아왔다. 그 신랑을 택한 건 나 자신이면서 엄마한테 온갖 험담을 늘어 놓아 가슴만 아프게 해드리고, 아버질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오히려 아버질 원망하는 어이없는 딸이기도 했다.

이제 새로운 한 해, 닭의 해를 맞아 엄마를 생각한다. 새벽까지 잠 못들고 뒤척이다 꼬끼오~ 닭 울음 소리를 들으면서 달걀 한알 마음대로 가져보지 못했던 울엄마의 가난한 삶과 사랑을 생각하며 못난 내 모습을 돌아본다. 이제 나는 달라질 것이다. 나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몇 년 후, 몇 십 년 후 엄마의 모습을 회상할 내 딸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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