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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밭 발자욱이 물결 한 번 지나가면 흔적없이 사라지듯이 내 맘 속 모든 부질없는 것들은 이제 다 사라지고.
▲ 바닷가 모래밭 모래밭 발자욱이 물결 한 번 지나가면 흔적없이 사라지듯이 내 맘 속 모든 부질없는 것들은 이제 다 사라지고.
ⓒ 문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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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비 오시는 날, 친구 금선이네 집에 놀러 갔다. 중학교 1학년쯤으로 기억된다. 금선이네는 굉장히 큰 집에서 살았다. 안방 옆에는 대청이 있고, 대청 옆 건넛방을 지나고 또 방을 지나고. 방을 몇 개나 지나 한참이나 들어가면 맨 끝에 자그마하고 아담한 방이 있었는데 그곳이 금선이 혼자서 쓰는 방이었다.

우리 둘은 그 방에 앉아 바로 바깥 마당이 내다뵈는 방문을 열어놓고 비 내리는 하늘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비에 젖어 파르르 떠는 나무와 끝도 없이 펼쳐진 녹색 들판, 그리고 저 멀리 보이던 낮은 산자락. 지금도 그 아름다운 정경이 눈에 선하다.

그런데 그 날 그 방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이상하게도 자꾸만 몹시도 슬프고 외로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야기를 하면서 왜 이럴까 왜 이럴까 혼자 생각을 골똘히 했는데 그 이유는 그 방에 놓여있는 책상 때문이었다. 금선이네 집에 오랜만에 갔었던지 그날 처음으로 그 책상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 집에는 그때까지 책상이 없었고 쌀 담아두는 뒤주 위에다 책을 펴놓고 엄마 미싱의자에 앉아서 공부를했다. 금선이네 책상을 보기 전까지는 책상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는데 번들번들 윤이 나는 멋진 그 책상을 보자마자 이 세상에서 그만큼 탐나는 것이 없을 것 같았다.

금선이한테는 책상에 관해선 아무 말도 아니하고 울적한 마음을 혼자 달래면서 비 오시는 신작로를 타박타박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고개를 숙이고 쓸쓸히 쓸쓸히 돌아오던 내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훤히 보이는 것만 같다.

그 이후로 나이를 먹어가면서 남이 가진 것을 부러워한 적이 참 많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내 나이 열서너 살 무렵 금선이네 집에서 본 그 책상보다 더 내 가슴에 깊이깊이 새겨져 있는 것은 다시 없다.

방이라고는 딱 두 개밖에 없었던 우리 집에 돌아와서 나는 작은 방에 꼼짝도 안 하고 들어앉아 아무도 못 들어오게 문을 걸어 잠그고 저녁 내내 심통을 부렸다. 그러나 끝내 금선이네 책상 이야긴 하지 않았다.

내가 엄마한테 그 이야길 하지 않았던 것은 지금 생각해 봐도 참으로 잘한 일이라 여겨진다. 만약에 그 이야길 했더라면 내게는 그 일이 그저 지금까지 잊지 못 하는 일 중의 하나로 남아있지만, 엄마 가슴 속에는 아프게 아프게 지워지지 않는 옹이처럼 깊은 한으로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2004년 암 수술을 한 이후, 나의 생명이 끝나는 날이 그 언제일런지, 절절하고 깊이 생각하며 기도하게 되었고 비로소 진정한 감사를 알게 되었다. 이제는 그저 살아있다는 것보다 더 큰 은총이 어디 있으랴 싶고 더 바랄 것이 무어랴 싶다. 이제는 이 세상 그 아무것도 부러운 것이 없다. 죽음의 사선을 넘나들며 삶의 벼랑 끝에 서 보고서야 비로소 자족의 기쁨을 얻게 된 것이다. 이제는 세상 그 어떤 고통과 고뇌조차 아무것도 아님을, 세상 그 어떤 값진 것도 풀의 꽃과 같고 잠시 후면 사라질 안개와 같은 것임을 이제사 절실히 깨닫게 된 것이다.

남편의 스킨로션 냄새가 배어있는 집안 곳곳을 둘러보며, 내 아이의 웃음 소리가 배어있는 집안 곳곳을 둘러보며 이렇게 살아서 그들을 저녁이면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얼마나 눈물겹도록 감사한지, 남편이 사랑한다고 말해주지 아니하여도, 널 위해 내가 산다고 말해주지 아니하여도 진심으로 감사하며 그저 행복하다.

인간이기에 때로는 육신이 몹시도 힘이 들고 지칠 때도 있지만 그래도 가슴 속에는 기쁨이 넘친다. 그리고 이제는 아무것도 탐나지 않고 그 아무것도 부럽지 않은 마음을 갖게된 것에 또 감사하다.

아침에 눈을 뜨면 살아서 하루를 산다는 것이, 저녁에 자리에 누우면 건강한 몸으로 하루를 살게 해 주신 주님의 은혜가 너무나 감사하여 무어라 형용할 수가 없다. 이제 앞으로 선한 마음을 품고, 주님 기뻐하시는 여종이 되기만을 간절히 기도드린다.


태그:#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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