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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중앙문화공사에서 발행한 교양에세이
ⓒ 장동언
91년 우연히 경북 구미역 앞에서 받아든 원색의 팸플릿 한 장.

"우리나라 유명작가의 교양에세이 전집입니다. 총 금액이 8만원이지만 8개월로 나누어 내시면 되구요. 월 만원에 유명지인들을 만날 수 있다면 결코 손해 보는 일은 아닐 거예요."

20대 정도로 돼보이는 여인은 전문 판매원답게 또박또박 그리고 핵심만을 짚어가며 책을 홍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날 나는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기에 그저 시큰둥한 표정으로 팸플릿을 훑어보았습니다.

이때 그녀는 "이곳에다 주소와 이름만 명기해 주시고 여기에 있는 전집을 가져가시면 됩니다"라며 내게 하얀 서류 한 장과 검정색 모나미 볼펜을 내밀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상술이야 어찌되었던, 표정이나 인상이 밉지 않은 그녀의 태도와 집요한 상술에 밀려서 한국중앙문화공사에서 발행한 교양에세이 전집을 구입했습니다. 책 한 박스를 들고 친구를 만나러 가자하니, 왠지 불편하고 거북스러워 나는 그 길로 왔던 길을 되돌아 집에 갔습니다.

집에 도착하여 내 방으로 들어 온 나는 책 내용이 더없이 궁금하여 황급히 박스 속의 책을 꺼내어 속독했습니다. 그러던 중 내 시선을 사로잡는 소제목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김소운(金素雲)님의 <가난한 날의 행복(幸福)>이었습니다. 그 수필을 대하는 순간부터 천천히 정독함은 물론 그 후로 독서삼매경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들은 가난한 신혼 부부(新婚夫婦)였다. 보통(普通)의 경우(境遇)라면, 남편이 직장(職場)으로 나가고 아내는 집에서 살림을 하겠지만, 그들은 반대(反對)였다. 남편은 실직(失職)으로 집 안에 있고, 아내는 집에서 가까운 어느 회사(會社)에 다니고 있었다. 어느 날 아침, 쌀이 떨어져서 아내는 아침을 굶고 출근(出勤)했다.

"어떻게든지 변통을 해서 점심을 지어 놓을 테니, 그때까지만 참으오."

출근하는 아내에게 남편은 이렇게 말했다. 마침내 점심시간이 되어서 아내가 집에 돌아와 보니, 남편은 보이지 않고, 방안에는 신문지로 덮인 밥상이 놓여 있었다. 아내는 조용히 신문지를 걷었다. 따뜻한 밥 한 그릇과 간장 한 종지……. 쌀은 어떻게 구했지만, 찬까지는 마련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아내는 수저를 들려고 하다가 문득 상위에 놓인 쪽지를 보았다.

"왕후(王侯)의 밥, 걸인(乞人)의 찬…. 이걸로 우선 시장기만 속여 두오."

낯익은 남편의 글씨였다. 순간(瞬間), 아내는 눈물이 핑 돌았다. 왕후가 된 것보다도 행복(幸福)했다. 만금(萬金)을 주고도 살 수 없는 행복감(幸福感)에 가슴이 부풀었다.


당시 나는 변변찮은 생활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으며, 나이에 걸맞지 않게 반찬투정이 심했습니다. 또한 씀씀이가 헤펐구요. 그러나 그 에세이집을 대하고 나서부터 생각이나 사물을 대하는 나의 사고가 바꿨다면 믿을 수 있을까.

이후 <가난한 날의 행복>은 내게 좀더 검소하게 그리고 겸허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깨우쳐 주었고, 행복이란 소위 물질만능의 풍족함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오늘 저녁 아내가 차려준 식단은 먹다 남은 각종 찬거리에 식은 밥을 돌솥에 넣고, 참기름과 고추장을 가미하여 이리저리 비빈 일명 돌솥비빔밥입니다. 아마도 새로운 찬거리를 만들자니, 남아 있는 반찬이 아깝고 하여 생각 끝에 그렇게 하였나 봅니다.

남아 있는 음식으로도 맛있게 먹을 수 있게끔 나름대로 재능을 발휘해보는 아내가 진정 고맙고, 그런 긍정적인 사고와 아름다운 생각들을 가질 수 있도록 배려해 준 김소운(金素雲)님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함께 식사를 하고 있는 이 아이가 조금 더 자라면 지난날 아버지의 진면목을 바꾸게 해 준 <가난한 날의 행복>을 정독해 보라고 권할 것입니다.

가난한 날의 행복

김소운 지음, 범우사(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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