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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2일 막을 내린 '33회 독립영화, 관객을 만나다'는 '1060, 까놓고 말해요'라는 제목으로 진행되었다. 우리 사회의 연령 문제를 이야기하기 위해서 어린이, 청소년, 청년, 노년 네 개의 섹션으로 구성해 영화를 상영했는데, 노년 섹션의 영화는 모두 네 편으로 두 편은 가족을, 다른 두 편은 노년의 성(性)을 담고 있었다.

할머니, 할아버지 두 분만 사는 집. 집에 든 도둑을 세상 떠난 아들이 온 것이라 생각하는 치매 할머니. 아내를 돌보는 할아버지는 안쓰러움과 함께 때로 성질을 내기도 한다. 맑은 정신으로 김장을 해놓은 할머니는 세상을 떠나고, 혼자 남은 할아버지의 단촐한 밥상 위에는 할머니가 담근 김치가 보인다.(초겨울 점심, 감독 강병화)

시골집에서 서로 의지하며 살고 있는 안집할매와 동갑할매. 일찍 혼자 돼 딸 하나 기른 동갑할매는 아들 며느리 번다한 안집할매가 부럽고, 안집할매는 아프기라도 하면 서로 책임을 미루는 자식이 야속하기만 하다. 쓰빠꾸는 할머니들이 발음하는 가루비누 이름. 동갑할매가 장에서 사다가 선반 위에 고이 모셔둔 그 비누가 어느 날 포장이 뜯긴 채 반이나 줄어있다. 안집할매를 의심하는 동갑할매와 억울한 안집할매는 싸움을 하고 결국 동갑할매가 집을 나가버린다. 동갑할매가 하다만 빨래를 해서 너는 안집할매. 빨래줄에서는 빨래가 말라간다.(쓰빠꾸, 감독 박종철).

홀로된 할머니와 할아버지. 두 사람은 서로를 좋아하고 있고, 서로 간절히 원하지만 계속 망설이며 머뭇거리는 할머니. 같이 단풍 구경을 가기로 하지만 할머니는 여전한 망설임으로 차를 놓치고, 기다리다 지쳐 코를 골며 벤치에서 잠든 할아버지. 두 사람은 결국 서로를 안는다.(단풍잎, 감독 오점균)

감독 지망생 손녀의 비디오 촬영으로 보는 할머니의 몸과 사랑. 연애하고 있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서로 만나러 가는 길은 설레임과 들뜸으로 넘친다. 비디오방에 간 두 사람은 서로를 아낌없이 사랑하며 몸을 나눈다. 비디오방에서 아르바이트 하던 손녀의 몰래 카메라에 담긴 할머니. 손녀는 테이프를 던져 버리지만, 10년 후 할머니의 몸을 찍은 화면에 자신의 몸을 겹쳐보며 자신의 몸이 걸어갈 길을 보는 듯 웃음을 보인다(애로영화, 감독 김시경).

'초겨울 점심'과 '쓰빠꾸'에서 우리는 물을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 가족은 누구인가. 피를 나눈 사람들인가. 아니면 공간을 공유하며 함께 하는 사람들인가. 자신을 돌봐주는 할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만나지 못하는 치매 할머니에게 문득 다가온 도둑은 다름 아닌 꿈에도 그리는 아들이다. 그래서 무릎에 눕혀 놓고 귀지를 파주고 간직했던 아들의 시계도 그의 것인양 내놓는다.

가루 비누 하나로 싸움을 벌이는 할머니들. 혼자 살며 둘이 같이 사는 안집할매와 동갑할매는 서로에게 누구인가. 지금은 이야기할 기분이 아니라는 안집할매를 향해, 그럼 언제 누구랑 이야기하느냐고 외치는 동갑할매의 쉰 목소리는 그래서 가슴이 아프다. 할머니들에게 가족은 누구일까. 우리에게 가족은 누구일까.

'단풍잎'과 '애로영화'에서 우리는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욕망을 확인한다. 그 누구도,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절절하고도 뜨거운 욕망. 사랑하고 사랑받는 일이 어찌 젊은 사람들만의 일일까마는 우리 현실은 너무도 냉정하게 노년의 욕망에 눈감고 귀막은 채 등돌리고 저만치 물러나 있다.

'단풍잎'에서 할머니의 연애를 눈치챈 손녀가 할머니 팬티에 '자랑스런 할머니'라고 쓴다한들, 늘어진 젖가슴과 몇 겹의 주름으로 쳐진 몸을 보이고 서로 나누는 일은 어렵기만 하다. 그래서 어쩜 노년의 욕망이야말로 그 무엇으로도 포장되지 않은 욕망의 순수한 얼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애로영화'에서 노인들의 벗은 몸 위로 장미꽃잎이 날려 떨어지는 것처럼 노년의 성(性)은 여전히 환상 속에 머물러 있다. 그래서 오히려 더 분명한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환상이 아니고는 노년의 성(性)을 보려고 하지 않으니까.

노년의 가장 중요한 주제인 가족과 성(性)을 영상으로 담은, 네 편의 독립영화야말로 김시경 감독의 말대로 에로영화도, 경로영화도 아닌 애로(愛老)영화였다. 노인문제를 고민하고 노인의 삶의 질을 생각하며 일하는 사람들이 이제는 이런 영화도 함께 나누면서 이야기의 통로를 좀 활짝 열어놓을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것이 바로 노년 사랑(愛老)의 지름길이겠다.

(33회 "독립영화, 관객을 만나다" / 한국독립영화협회 / 2002. 4. 19 -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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