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항저우'입니다. 9월 23일부터 10월 8일까지, 5년 만에 아시안게임이 열리는 장소입니다. 기다림 자체가 길었던 탓인지 선수들에게는 항저우 아시안게임이 어떤 때보다도 많이 중요한 자리입니다. 그런 항저우 아시안게임의 현장을 더욱 깊고 진중하게 여러분께 전해드립니다.[편집자말]
 남북전이 끝난 직후 기자회견에 나선 북측 선수들. 왼쪽부터 강향미 선수, 정성심 감독, '통역'을 위해 나섰다던 관계자.

남북전이 끝난 직후 기자회견에 나선 북측 선수들. 왼쪽부터 강향미 선수, 정성심 감독, '통역'을 위해 나섰다던 관계자. ⓒ 박장식

 
어느 때보다도 살얼음판 위인 남북관계 탓일까. 농구 남북전이 끝난 직후 북측 선수들이 가진 기자회견은 어떤 때보다도 긴장되었다. 축구 종목을 제외한다면 사실상 한국 기자들과는 담을 쌓다시피 했던 북측 선수단이 기자회견에 나섰기 때문이다.

29일 항저우 스포츠 파크 체육관에서 열린 남북의 여자 농구 경기가 끝난 후 열린 기자회견에 남측과 북측 선수들이 모두 기자회견에 나섰다. 물론 경기장에서도 대면을 피했던 양측 선수답게 기자회견은 패퇴한 북측이 먼저 진행하고, 이어 대한민국 선수들이 승리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평소 기자회견과 비슷했던 대한민국의 기자회견과는 달리, 북측과의 기자회견은 그야말로 '공포의 기자회견'이었다. 동시통역이 제공되지만 '통역을 하겠다'며 따라온 관계자가 외신 기자의 말을 막아세우는가 하면, 한 취재진이 '북한'이라고 언급했다는 이유로 사과를 요구하는 등 여느 기자회견과는 다른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단일팀 질문에 "이번 경기와 관련 없다"

경기 소감을 전할 때까지만 해도 여느 기자회견과 큰 차이를 느끼기 어려웠다. 북측 여자농구 대표팀의 정성심 감독은 "아시아 올림픽(아시안게임의 북측 표현) 경기에 참가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며, "아시안 올림픽 경기 출전을 위해 도와주신 중국의 여러 동지들에게 감사드리고 싶다"고 출전 소감을 전했다.

그러며 정 감독은 남조선, 남측 등의 표현을 언급하지 않은 채 "오늘 경기가 좀 잘 안 되었는데, 경기라는 게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지 않겠느냐. 앞으로 훌륭한 경기 모습들을 보여주겠다"고 경기 소감을 밝혔다.

강향미 선수 역시 "아시아 올림픽 경기에 참석하게 된 것을 기쁘고 영광스럽게 생각한다"며, "생각했던 것보다는 잘 못했다. 팀 경기 운영을 제대로 하지 못했는데, 다음 경기 준비를 잘 해서 훌륭한 모습을 여러분께 보여드리겠다"고 말했다.

이어진 질의응답에서 외신 기자가 지난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때 단일팀으로 만났던 남북을 상기하며 다시 이러한 기회가 생긴다면 또 함께하겠냐는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갑작스럽게 통역을 위해 앉았다던 관계자가 막아세우며 우리말로 "내가 대신 말하겠다. 이번 경기와 관련이 없다고 본다"고 쏘아붙였다.

대답을 회피할 것이라고는 예상했지만, 예상치 못한 인물의 투입에 현장은 당황스러운 분위기였다. 결국 자연스럽게 다음 질문이 이어졌는데, 여기서 북측 관계자가 '사과 요구'를 하고 나섰다.

'북한' 발언에, 영어로 "사과하라"
 
 29일?항저우 스포츠 파크 체육관에서 열린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 대한민국과 북한의 여자 농구 경기에서 한국 선수들이 북한을 디펜스하고 있다.

29일?항저우 스포츠 파크 체육관에서 열린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 대한민국과 북한의 여자 농구 경기에서 한국 선수들이 북한을 디펜스하고 있다. ⓒ 박장식

 
다음 질문에서 한국 취재진은 '북한' 응원단이 보낸 열정적인 응원에 대한 소감을 묻는 질문이었다. 앞서도 외신 기자의 말을 막았던 북측 관계자가 싸늘하게 반응했다. 그는 앞서 외신 기자에게는 우리말로 이야기했던 것과 달리 남측 취재진에는 영어로 쏘아붙이고 나섰다.

"우리는 North Korea(북한)이 아니라 DPR Korea이다. 우리에게 북한이라고 언급한 것은 불쾌하다. 아시안 게임에서는 모든 국가에 정확한 이름을 붙여야 한다. 내 말이 맞지 않나, 사과하라."

우리말 대신 영어로 한국 취재진을 상대한 것도 놀랐지만, 뜻밖의 반응에 더 놀랐다.

보통 북측과 남측 기자가 만났을 때 국가를 지칭하는 단어에 차이가 발생하면 우리말로 화를 내며 삿대질을 하거나, 또는 무응답으로 일관하곤 했다. 오히려 싸늘하게 사과를 요구하는 반응이 현장에 알 수 없는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조직위원회 측 사회자가 상황을 정리하고 다음 질문을 받았다.

정성심 감독은 남북전을 앞두고 긴장하지 않았냐는 질문에 "긴장된 것도 두려운 것도 없었다"며, "다만 국제경기에 처음 참가하는 선수가 많아서 실수가 많았다. 그래서 약간 경기가 잘 안 되었다"며 여전히 남측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은 채 발언했다.

2m가 넘는 장신으로 손쉽게 골을 넣었던 박진아 선수에 대해서도 정 감독은 "아시아 쪽에서 가장 큰 축에 속하는 박진아 선수인데, 이번 대회가 첫 국제대회이기에 아주 좋다"며,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욱 훌륭한 경기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더욱 많은 훈련을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렇게 기자회견은 끝났고, 북측 선수가 모두 나갈 때까지 기자회견장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평소와는 다른 북측의 싸늘한 반응에 기시감이 들었던 5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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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전 남북관계 여자농구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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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교통 기사를 쓰는 '자칭 교통 칼럼니스트', 그러면서 컬링 같은 종목의 스포츠 기사도 쓰고,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도 쓰는 사람. 그리고 '라디오 고정 게스트'로 나서고 싶은 시민기자. - 부동산 개발을 위해 글 쓰는 사람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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