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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계기로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연구와 선양이 활발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역사의 그림자로 남은 채, 우리의 기억 속에서 잊힌 인물들이 많습니다.

무강(武剛) 문일민(文一民:1894~1968)이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평남도청 투탄 의거·이승만 탄핵 주도·프랑스 영사 암살 시도·중앙청 할복 의거 등 독립운동의 최전선에서 치열하게 싸웠던 문일민의 삶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독립운동가들이 여전히 많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문일민이라는 또 한 명의 독립운동가를 기억하기 위해 <무강 문일민 평전>을 연재합니다. [기자말]
평양을 탈출한 문일민은 1921년 초 상하이로 건너갔다. 그리고 미국 안식교에서 설립한 싼위대학(三育大學)에 입학했다. 

문일민이 싼위대학에 입학하게 된 동기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기록에 의하면 1920년 12월 평양 북금융조합에서의 총격전 끝에 순안(順安)으로 탈출, 안식교에서 운영하는 병원에서 한 달가량 치료를 받은 뒤 만주로 탈출했다 한다. 아마 이때 안식교의 주선 내지는 소개로 싼위대학에 입학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흥미로운 점은 1921년 3월 프랑스와 멕시코 등을 순방하고 왔다는 사실이다. 당시 싼위대에서는 중국인 학생들을 선발하여 프랑스와 멕시코로 보냈는데 문일민 역시 한인 학생 13명과 함께 동행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해외동포에게 애국사상을 고취하는 활동을 하다가 1922년 무렵에야 귀환한 것으로 추정된다.

윈난육군강무학교 입학 후 군사교육 이수

1923년 문일민은 윈난성의 군벌 탕지야오(唐繼堯)가 쿤밍(昆明)에 세운 윈난육군강무학교(雲南陸軍講武學校) 보과(步科)에 17기로 입학했다. 동문으로는 이계동, 김형동, 김무동, 김균, 이기용, 정계선, 민무, 이검운, 김태원 등이 있었다. 훗날 북한 정권에서 조선인민군 총사령관·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국가 부주석 등 요직을 두루 역임했던 최용건 역시 문일민과 동기였다. 나중에 김일성(金日成)과 함께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에서 활동하는 중국인 저우바오중(周保中) 역시 문일민과 같은 17기 생도였다.

이처럼 윈난강무학교에는 한인 유학생들이 상당히 많았다. 한인 학생들이 입학할 수 있었던 것은 탕지야오가 한국의 독립운동에 호의적이기도 했지만, 특히 신규식(申圭植)의 역할이 컸다. 일찍부터 탕지야오와 친분이 있던 신규식은 지속적으로 탕지야오를 만나 한인 학생들의 입학을 주선했던 것이다.
 
중국 윈난성의 군벌 탕지야오(왼쪽)와 독립운동가 신규식(오른쪽). 신규식은 탕지야오와의 친분을 이용해 한인 청년들의 윈난육군강무학교 입학을 주선했다. 한국 독립운동에 호의적이었던 탕지야오는 신규식의 요청을 수용해 한인 청년들을 받아들였다.
 중국 윈난성의 군벌 탕지야오(왼쪽)와 독립운동가 신규식(오른쪽). 신규식은 탕지야오와의 친분을 이용해 한인 청년들의 윈난육군강무학교 입학을 주선했다. 한국 독립운동에 호의적이었던 탕지야오는 신규식의 요청을 수용해 한인 청년들을 받아들였다.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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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따라 1920년을 전후하여 윈난강무학교에 입교한 한인 학생들은 대부분 신규식의 주선으로 입교하는 경우가 많았다. 윈난강무학교 출신 한인 독립운동가로는 대표적으로 청산리 전역을 이끈 이범석(12기), 김훈(16기)과 김좌진의 사촌동생이었던 김종진(18기)이 있다.

문일민 역시 신규식 내지는 상하이 임시정부의 주선으로 윈난강무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윈난육군강무학교 제17기 동학록>에 의하면 문일민이 편지 등 우편물을 주고받는 통신처의 주소가 '상하이 프랑스 조계(法界) 라페이더로(辣裴德路) 우기(友記) 4호(號)'로 명기돼 있다. 프랑스 조계는 임시정부가 위치하고 있던 곳이었다. 일제가 파악한 임시정부의 윈난강무학교 파견 유학생 명단에서도 문일민의 이름이 발견되고 있다.

상하이에서 쿤밍으로 이동하는 길은 험난한 여정의 연속이었다. 당시 한인들이 이용한 일반적인 경로와 이동 수단은 다음과 같다. 우선 선편으로 광저우(廣州)와 홍콩(香港)을 경유하여 베트남의 해풍항에 도착한다. 여기서 화교 신분으로 위장한 뒤 열차를 이용해 윈난성 인근의 베트남 라오카이(Laokay)에 이르러 다시 2천여 리 되는 길을 도보 혹은 말을 이용하여 쿤밍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이 여정에는 통상 15~30일가량이 소요됐다고 한다.

입교 시에도 일제의 간섭을 피하기 위해 중국인으로 변성명하고 출신 지역도 지린성 등으로 위장하곤 했다. 문일민 역시 저장성(浙江省) 닝보(寧波) 사람으로 자신의 출신을 숨겼다.
 
<윈난육군강무학교 제17기 동학록>에 수록된 생도 시절 문일민의 사진
 <윈난육군강무학교 제17기 동학록>에 수록된 생도 시절 문일민의 사진
ⓒ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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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난강무학교의 커리큘럼은 일본 육군사관학교의 그것을 모방했는데, 일본 육사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중국인 유학생들이 교관으로 활약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체조와 구보를 한 뒤, 6시간 수업과 2시간 훈련을 마치고 저녁에는 자습을 하는 게 하루 일과였다. 야간에는 불시에 긴급집합훈련도 이뤄졌다. 학과는 보(步)·기(騎)·포(炮)·공(工) 4개 병과가 있었고 학습 기간은 1년에서 2년 반 등 유동적이었던 것 같다.

군사학교인 만큼 군사교육이 중점이 되었는데 생도들은 군사학·지리학·축성학·경리학 등을 익혔다. 중화민국 수립 이후로는 전술학·병기학·공병 지뢰매설(工兵布雷)·모의훈련(沙盤敎習) 등이 추가됐다. 또 산수와 일본어·영어·프랑스어 등의 보통학과 교육도 실시됐다.

문일민 후손의 증언에 의하면 이 당시 문일민은 체력 테스트에 통과하지 못한 적이 있다 한다. 그래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 밤에 혼자 나가 철봉(鐵棒) 운동에 매진하는 등 열성적으로 훈련에 임했다고 전해진다. 아마 이때 철봉 운동만큼은 확실히 익혔던 모양이다. 훗날 흥사단 입단시 그가 작성한 이력서에는 '철봉'을 특기로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일민은 이곳에서 신식 군사교육을 받은 후 1924년 10월경 졸업한 것으로 보인다. 윈난강무학교를 졸업한 한인 청년들의 진로는 크게 두 갈래로 나뉘었다. 국민혁명군(國民革命軍) 등 중국군에 입대하여 활동하거나, 상하이 임시정부 혹은 만주·러시아 지역의 한국 독립운동 진영으로 귀환하는 경우였다.

이제 문일민 앞에는 새로운 선택지가 놓여있었다.

- 8부에서 계속 -

[주요 참고문헌] 

1) <동아일보>, <신한민보>
2) <문탁진 구술>
3) 在上海 日本總領事, <閔廷植 救出後에 있어서 不逞鮮人의 對策宣傳에 관한 件>, 1924.12.27.
4) 배숙희, <中國 雲南陸軍講武堂與韓籍學員>, 《中國史硏究》 56, 중국사학회, 2008.
5) 조범래, <중국 쿤밍[昆明]의 운남육군강무학교 제17기동학록>, 《월간 독립기념관》 2006.9.
6) 나창주, <새로 쓰는 중국혁명사 1911-1949>, 들녘, 2019.
7)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7, 1976.
8) 한상도, <韓國獨立運動과 中國軍官學校>, 문학과지성사, 1994.

태그:#문일민, #무강문일민평전, #무강문일민, #윈난강무학교, #삼육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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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 사학과 박사과정 (한국사 전공) / 독립로드 대표 / 서울강서구궁도협회 공항정 홍보이사 / <어느 대학생의 일본 내 독립운동사적지 탐방기>, <다시 걷는 임정로드>, <무강 문일민 평전>, <활 배웁니다> 등 연재 / 기사 제보는 heigu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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