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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계기로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연구와 선양이 활발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역사의 그림자로 남은 채, 우리의 기억 속에서 잊힌 인물들이 많습니다.

무강(武剛) 문일민(文一民:1894~1968)이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평남도청 투탄 의거·이승만 탄핵 주도·프랑스 영사 암살 시도·중앙청 할복 의거 등 독립운동의 최전선에서 치열하게 싸웠던 문일민의 삶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독립운동가들이 여전히 많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문일민이라는 또 한 명의 독립운동가를 기억하기 위해 <무강 문일민 평전>을 연재합니다.[기자말]
윈난육군강무학교를 졸업한 문일민은 상하이로 향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하기 위해서였다.

군사훈련을 마친 그가 만주로 가서 독립군 진영에 가담하는 대신, 상하이 임시정부로 향한 데는 한국독립운동의 최고지도부로서 임시정부에 대한 어떤 기대감이 있었던 게 아닐까.

흔들리는 임시정부의 위상

그러나 문일민이 임시정부에 도착했을 당시, 그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야말로 '목불인견'이었다. 지속된 정쟁으로 심한 내홍을 앓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쟁의 원인 중 하나는 '외교독립운동의 실패'였다. 임시정부는 파리강화회의와 워싱턴회의에 대표단을 파견하는 등 국제 사회를 상대로 적극적인 외교독립운동을 전개했지만 열강의 외면으로 아무런 성과를 얻을 수 없었다.

결국 1922년 3월 워싱턴회의가 종료된 직후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신규식을 필두로 한 임시정부 요인들이 내각 총사퇴 의사를 표명하기에 이르렀다. 같은 해 6월 임시의정원에는 '대통령 및 국무원에 대한 불신임안'이 제출됐다. 그 이유 중 하나가 '파리강화회의와 워싱턴회의에서의 외교실패'였을 정도로 외교독립운동의 좌절은 정쟁의 주요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한국 독립운동의 총지휘부로서 임시정부의 위상도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23년 1월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가 개최됐다. 국민대표회의는 각 정파와 단체를 통일하려는 의도로 열렸으나, 초기의 의도와 다르게 임시정부의 존폐 문제를 둘러싸고 임시정부를 개혁하자는 개조파와 임시정부를 폐지하고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자는 창조파로 나뉘어 대립하는 등 진통을 겪었다.

국민대표회의가 한창 진행 중이던 4월 2일 조덕진(趙德津) 등 의원 9명의 연서로 임시정부의 개혁을 요구하는 '대국쇄신안'이 임시의정원에 제출됐다. '대국쇄신안'의 핵심은 상하이를 떠나 미국에서 독단적으로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를 설치하고 자금을 틀어쥔 채 정국 수습을 방기하고 있는 임시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탄핵'과 임시대통령제 폐지를 골자로 한 '임시헌법 개정'이었다.

국민대표회의는 임시정부의 해산령 발동에 따라 성과 없이 결렬됐지만, 개조파는 임시정부 쇄신을 위해 더욱 분투했다. 해가 바뀌자 이들은 임시대통령 탄핵을 매듭짓기 위해 '임시대통령 유고안(臨時大統領 有故案)'을 제출했다. 결국 1924년 6월 16일 '유고안'이 가결됐다. 이에 따라 9월 10일자로 대통령직을 유고(有故) 상태로 정하고, 이승만이 상하이로 돌아오기 전까지는 국무총리 이동녕(李東寧)으로 하여금 직무를 대리토록 했다.

이동녕은 군무총장·임시대통령 대리까지 겸하며 각각 김구(金九: 내무총장 및 노동국총판)·조소앙(趙素昻: 외무총장)·이시영(李始榮: 재무총장) 등으로 내각을 정비했다. 그러나 이동녕 내각은 현상 유지를 추구하는 세력이었다. 따라서 대통령 탄핵과 임시헌법 개정 등 보다 근본적인 개혁을 추구하는 개조파의 입장에서는 이동녕 내각 역시 타도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임시의정원 초대 의장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주역이었던 이동녕(1869~1940)
 임시의정원 초대 의장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주역이었던 이동녕(1869~1940)
ⓒ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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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녕 내각 총사퇴로 이어진 '민정식 사건'

이러한 상황에서 '민정식 사건'이 터졌다. 민정식 사건이란 조선에서 막대한 재산을 갖고 상하이로 망명한 민정식(閔廷植) 일가를 이동녕 내각이 보호를 명목으로 프랑스 조계 내에 감금하다시피 했지만, 1924년 12월 10일 상하이 일본 총영사관의 공작에 의해 탈취당한 사건이다.

민정식은 명성황후의 친정 조카였던 민영익(閔泳翊)의 아들이었다. 일찍이 중국으로 망명했던 민영익은 홍콩과 상하이를 오가며 인삼을 팔아 막대한 부를 쌓았는데, 그가 죽자 아들 민정식이 가산을 물려받게 됐다.

그러나 민영익의 유산을 둘러싸고 일가 친척들 사이에서 재산 다툼이 벌어졌을 뿐만 아니라, 그가 독립운동 단체에 자금을 후원하고 있는 것으로 의심한 일제에 의해 핍박받는 등 고초를 겪자 1924년 3월 가족들을 이끌고 비밀리에 상하이로 망명해버렸다.

 
민정식의 상하이 망명 소식을 보도한 1924년 4월 18일자 조선일보 기사
 민정식의 상하이 망명 소식을 보도한 1924년 4월 18일자 조선일보 기사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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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대한 재산을 가진 그가 상하이로 오자 독립운동 진영에서도 그의 재산에 눈독을 들였다. 1922~1923년의 재정 수입이 1921년도에 비해 10~20% 정도에 불과했을 정도로 자금 사정이 열악했던 임시정부 입장에서는 민정식의 후원이 절실했다.

임시정부는 프랑스 조계에 민정식의 거처를 마련해준 뒤 그를 보호했다. 그러나 민정식에게서 자금을 후원받기 위해 교섭하는 과정에서 다소 강압적인 태도를 취했던 모양이다. 임시정부에서는 프랑스 영사관의 청원 경찰에게 요청하여 민정식을 엄중히 감시하도록 하는 등 그를 거의 감금하다시피 했다고 한다.

또 김구가 휘하의 나석주(羅錫疇)·최천호(崔天浩)·손두환(孫斗煥) 등과 모의하여 민정식을 잡아다 감금한 후 그의 부인에게 "돈을 내놓지 않으면 남편을 살해하겠다"고 협박했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한편 일제 역시 막대한 자금이 임시정부로 흘러 들어가는 상황을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때 민정식의 장인으로 과거 일진회(一進會) 회원이기도 했던 이범철(李範喆)이 사위의 재산을 가로챌 목적으로 상하이 일본 영사관에 민정식의 구출을 요구했다.

이를 기회로 여긴 일본 영사관은 프랑스 영사관에 "본국 신민이 감금되어 있다"며 협조를 요청했다. 일본 영사관은 "프랑스 조계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이 민정식의 재산을 탐내고 그것을 빼앗으려 한다"며 "한국인들은 민씨 부부를 사실상의 죄수처럼 감금해왔으며 무력과 폭력으로 위협하며 친지들조차 만나지 못하도록 방해해 왔다"고 구출 공작의 당위성을 설명했다.

마침내 일제는 12월 10일 일본인·중국인 형사들을 이끌고 민정식의 집에 들이닥쳐 민정식 일가를 납치, 일본 영사관으로 끌고 가버렸다. 

이 사건으로 임시의정원 내 개조파 세력은 이동녕 내각에 책임을 물어 사퇴를 압박했다. 결국 하루만인 12월 11일 이동녕이 사퇴하면서 박은식이 임시대통령 대리로 선출됐다.

그러나 독립운동 진영에서는 이동녕 한 사람만의 책임으로 돌릴 것이 아니라 내각 전체가 총사퇴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고 있었다.

이때 마침 윈난강무학교를 졸업하고 상하이로 귀환한 문일민 역시 민정식 사건에 분개하여 이동녕 내각 총사퇴에 앞장섰다. 그는 윈난강무학교 동문 이기용(李基溶)·손효식(孫孝植)·김동욱(金東旭)·안경근(安敬根)·이웅(李雄)·김엄해(金奄海)·김태원(金泰源)·주부정(朱富丁)·차정신(車貞信)·이희연(李希渕) 등과 함께 12월 17일 연명으로 민정식 사건을 규탄하는 '경고(警告)'를 발표했다. 

이들은 민정식 사건의 책임자로 이동녕·이시영·김구·윤기섭을 콕 집어 언급하며 헌법을 수호해야 할 책무가 있는 정부 요인들이 오히려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재산을 보유할 권리', '법률에 의하지 않으면 체포·감금·신문·처벌을 받지 아니할 권리', '법률에 의하지 않으면 가택의 침입 또는 수색을 받지 아니할 권리' 등을 침해한 사실을 지적했다.

특히 문제가 된 것은 민정식을 호위한다는 명목으로 그를 감금하다시피 하는 과정에서 정식 경호원이 아닌 사적으로 고용한 순포(巡捕)를 동원했다는 점이다. 문일민 등은 이를 비판하면서 "비법(非法)의 수단 방법을 취하야 집권자로서의 체면과 위신을 훼손케 한 것이 우리 민족에게 직간접적으로 심리적 변동을 (가져오고) 실제의 사실에서 그 끼친 악영향이 실로 적지 않다"고 통렬히 꾸짖었다.
 
1924년 12월 17일 문일민을 비롯한 윈난육군강무학교 동문 11명이 연명으로 민정식 사건의 책임을 물어 이동녕 내각을 비판한 '경고(警告)'
 1924년 12월 17일 문일민을 비롯한 윈난육군강무학교 동문 11명이 연명으로 민정식 사건의 책임을 물어 이동녕 내각을 비판한 '경고(警告)'
ⓒ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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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들의 성토로 인해 12월 17일 김구·조소앙·이시영 등 이동녕 내각을 이루고 있던 주요 관료들이 동반 사퇴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박은식을 국무총리로 하는 개조파 내각이 들어섰다. 박은식 내각은 개조파가 추진해왔던 임시대통령 탄핵 및 임시헌법 개정 등 정국 쇄신을 위한 과도내각이었다.

힘을 얻은 개조파 그룹은 1925년 2월 개원한 제13회 임시의정원 회의에 대거 진출하면서 임시정부 쇄신운동에 박차를 가했다. 이동녕 내각을 끌어내린 주역 중 한 명이었던 문일민 역시 이때 평남(平南)을 선거구로 한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됐다.

임시의정원 의원이 된 문일민은 또 한 번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 9부에서 계속 -

[주요 참고문헌] 
1) <동아일보>, <신한민보>, <독립신문>
2)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1·2·27·45, 국사편찬위원회, 2005·2008·2011.
3) 在上海 日本總領事, <閔廷植 救出後에 있어서 不逞鮮人의 對策宣傳에 관한 件>, 1924.12.27.
4)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20, 국사편찬위원회, 1991.
5) <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 국회도서관, 1976.
6) 정현탁,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임시대통령 이승만 탄핵 연구>, 안동대 대학원 사학과 석사학위논문, 2018.
7) 김승학, <韓國獨立史>, 독립문화사, 1966.
8) 김희곤, <대한민국임시정부 연구>, 지식산업사, 2004.
9) 반병률, <통합임시정부와 안창호, 이동휘, 이승만>, 신서원, 2019.
10) 신주백, <청렴결백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킴이 이시영>, 역사공간, 2014.
11) 윤대원, <상해시기 대한민국임시정부 연구>,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6.

태그:#문일민, #무강문일민평전, #민정식, #이동녕, #대한민국임시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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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 사학과 박사과정 (한국사 전공) / 독립로드 대표 / 서울강서구궁도협회 공항정 홍보이사 / <어느 대학생의 일본 내 독립운동사적지 탐방기>, <다시 걷는 임정로드>, <무강 문일민 평전>, <활 배웁니다> 등 연재 / 기사 제보는 heigu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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